에세이
이 문장은 음악저널 23년호에 실린 이순열 선생님의 글 〈새들의 노래, 이 봄에도 들을 수 있을까〉의 마지막 문장이다. 선생님은 이글에서 그간의 본인의 성정과는 다르게, 가슴에서 피를 토하듯이 인간의 가증스런 오만에서 비롯된 현 지구의 파괴 상황에 대해 어서 되돌리자고 촉구하신다. 그리고 이 비극의 징표가 되는 새들의 노래가 사라진 무시무시한 ‘봄의 침묵’을 예로 들면서 우리 가슴을 흔들어 놓는다.
아주 가끔 이순열 선생님과 통화를 한다. 구순에 가까운 선생님은 카톡으로 당신의 자필 원고를 찍어서 보내주시기도 하고, 먼저 전화를 주시기도 한다. 내 앞가림도 못하며 헉헉대며 살고 있는 나는 그럴 때에야 겨우 답 전화를 드린다. 『봄의 침묵(Silent Spring)』1)에 대한 얘기도 그런 상황에서의 통화로 기억된다. “레이첼 카아슨 알아요?”로 시작된 통화는 매번 그렇듯이 나의 무식과 선생님의 상식이 맹렬하게 부딪히는 시간이었다. 전화 통화이기에 다행이지 매번 내 귀는 통화를 하고 있지만 내 손은 부리나케 검색을 하거나, 검색을 통해 조금 아는 척을 하느라 바쁘거나, 검색의 속도를 뛰어넘는 선생님 이야기의 속에 등장하는 용어와 인물들이라도 받아 적어 추후에라도 검색을 기약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날 통화는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고백적이어서 사실 조금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음악저널 401호에 실린 〈새들의 노래, 이 봄에도 들을 수 있을까〉의 앞부분에 쓰여있는 선생님이 레이첼 카아슨을 만나게 된 부분에 쓰여 있는 것처럼, 60년대 중반 영문 잡지의 글을 무심코 읽던 순간 “도대체 이 여인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궁금해 몇 줄을 더 읽다가 별안간 내 빈 가슴 가득히 눈물이 복받쳐 올랐다”라고 쓰여진 부분의 느낌을 그날 통화에서 고대로 들려주고 계셨다.
레이첼은 바다의 생태계를 연구하기 위해 바닷가에 움막을 짓고 해양 미생물을 연구하고 있었고 연구를 위해 퍼온 물을 1시간도 넘는 길을 되돌아가 다시 제 자리로 돌려 바다에 붓고 오는 이 장면의 묘사는 마치 어떤 순례자의 그것처럼 ‘자처한’ 고난으로 가득차 있었고, 한 인간의 드러나지 않는 행동으로 미약해 보였으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숭고해 보였다. 그 이야기에 가슴이 울려 눈물이 솟구친 선생님에 대해 난 사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를 잠시 고민했었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은 60대 초반에 경기도 광주로 귀촌하여 작고 예쁜 집을 짓고 사신다. 오래전에 한번 갔었는데 집에 비해 마당은 넓은 편이었고 그 마당엔 사모님과 두 분이 드시기에 충분한 채소와 꽃들이 가득했고, 마당까지 들어와 있는 작은 계곡 옆에는 진돗개가 두 분의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는 작은 파라다이스였다. 선생님은 봄이 되면 씨를 뿌리고 풀을 뽑으며 많은 시간을 그곳에 쭈그리고 앉아 손수 그 텃밭 농사를 짓는다는 걸 알기에 선생님의 자연과 땅에 대한 사랑은 낯선 것은 아니다.
올해 봄에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대학교에 석좌교수로 초빙되어 5월에 교수 대상의 특강을 하실 때도 원래 의도는 그리스와 르네상스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번은 정리하고 강의하고 싶다던 말씀처럼 〈Excavation of Greek〉로 제목을 잡으시고 선생님이 그리도 좋아하는 봄얘기에서 한참 머무셨다. 그리고 그 봄얘기는 마술피리의 파파게노와 파파게나의 듀엣으로 시작해 오페라의 상큼한 아리아들을 들려주어 듣는 이의 귀를 즐겁게 해주셨지만 결국 레이첼 카아슨의 이야기로 돌아가 환경이 파괴되면 이런 새들이 침묵하는 봄이 찾아올 것이고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를 예감하게 해주는 경종과도 같은 이야기를 풀어내셨다.
선생님께서 60년대에 만난 레이첼을 지금 2025년에 다시 또 얘기하는 이유는 당신의 텃밭에서 한 해가 다르게 느껴지는 벌과 나비, 그들과 같이 떠난 여러 종류의 새들의 사라짐 때문이다. “그의 작품을 새들의 노래로 가득 채우려 했으면서도 그 비극을 예감하고 있었던 말러는 깊은 시름에 잠겨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었다.“환희를 노래하려고 안간힘을 써도 내 교향곡은 왜 언제나 비명으로 가득차고 마는가”로 당신의 마음을 에돌려 표현하신 것처럼 올 봄도 그 희망만큼 비극을 잉태하고 있다.
선생님이 르네상스에, 15세기 피렌체에, 메디치 가문에 관심을 갖고 깊이 다가가는 이유는 아마 인본주의를 근거로 인간에 대한 이상적 성찰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성찰이 당시의 집중된 부와 권력을 뿌리로 학문과 예술에서 꽃을 피운 보기 드문 시절이기 때문일 것이다. 5월 7일에 있었던 특강에서 피렌체의 학자와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달콤했던지 나는 다음 생에는 르네상스가 한창이던 피렌체에서 그들과 살아보고 싶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이 한국춤비평가협회에 들어온 2011년이었으니 벌써 10여 년이 지났다. 100키로가 넘는 나의 집과 퇴촌과의 거리를 극복하지 못하여 달려가지 못하는 나는 그저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선생님 목소리로 많은 위로와 공부가 섞인 강의를 듣는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공부할 때 FM 라디오로 클래식을 듣고 자랐는데 선생님께서 KBS 1FM ‘명곡의 전당’ 진행을 오랫동안 맡으셨다는 걸 새삼 확인하고 나니 선생님을 오래 안 것 같은 착각은 선생님의 목소리 덕분이었고 황송하게도 그간 나는 어릴 때 듣던 그 목소리로 영어와 라틴어가 범람하는 시의 낭송을 듣고, 르네상스인들의 건물과 책들과 음악 뒤편의 신화를 단독으로 들었던 셈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올 6월 선생님께서는 구순을 맞으신다. 자연의 리듬으로 생활하셔서 그런지 아직도 왕복 120키로를 거뜬히 운전하시고 2시간 특강을 서서 하시는 선생님의 노익장이 그저 부럽고 부럽다. 경탄하고 경탄한다. 그리고 깊은 축하를 드린다.
─────────────────────────
1) 1962년 출간된 레이첼 카아슨의 책으로 미국에서 환경운동이 일어나게 된 계기가 된 책. 이순열 선생님은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레이첼 카슨을 레이첼 카아슨으로, 원어를 그대로 번역한 『침묵의 봄』을 『봄의 침묵』으로 번역하신다.
이지현
1999년 춤전문지의 공모를 통해 등단했다. 2011년 춤비평가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비평집 『춤에 대하여 Ⅰ, Ⅱ』를 출간했다. 현장 춤비평가로서 왕성한 비평작업과 함께 한예종 무용원 강사를 역임하고, 현재 아르코극장 운영위원과 국립현대무용단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