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서울시발레단은 세 번의 공연으로 창단 첫 해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 마지막 공연으로 한스 판 마넨과 차진엽의 〈캄머발레, 백조의 잠수〉(10. 9~12.,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 중극장)는 더블빌로 각 30분 정도의 소품들로 꾸려졌다. 한스 반 마넨의 경우 최초 아시아 초연이라 홍보하며 기대감을 높였고, 현대춤 안무가 차진엽을 영입해 클래식과 현대춤 융합에 적극적인 입장을 내세웠다. 그러나 막상 공연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마치 팥소(앙꼬) 없는 공갈빵 같이 보기엔 그럴 듯 하나 무미건조한 맛이었다. 특히 컨템퍼러리 발레를 전면에 내세운 서울시발레단의 첫 라이선스 작품인 〈캄머발레〉는 어떤 도전을 기대하고 확보한 작품인지 의구심까지 들었다.
한스 반 마넨은 2008년 유니버설발레단에서 선보인 〈블랙 케이크〉외에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유럽에서 그에 대한 존경은 대단하다. 살아있는 인물을 오마주하는 공연들(2007년 ‘한스 반 마넨 페스티벌’, 2017년 반 마넨 탄생 85주년기념 ‘한스 반 마넨에 대한 오마주’ 등)이 이를 방증하고, 필자도 몇 해 전 몽펠리에 페스티벌에서 그의 작품을 뜨겁게 관람한 기억이 있다. 그는 일생을 네덜란드국립발레단과 네덜란드댄스시어터에서 헌신하며 150편의 작품을 만들었고, 이리 킬리언과 함께 네덜란드 현대발레를 견인한 안무가다. 그의 많은 작품은 전세계 발레단에서 레퍼토리로 자리하고 있다.
서울시발레단×한스 반 마넨 〈캄머 발레〉 ⓒ세종문화회관 |
그러나 인간적 존경과는 달리 〈캄머 발레〉 공연은 기억나는 게 거의 없을 만큼 인상적이지 않았다. 너무 단조로운 안무와 형형색색의 벨벳 레오타드 이외엔 말이다. 실내악 연주처럼 흰색 원형 공간에서 사람들 간의 관계성을 묘사하고, 다양한 결의 음악 콜라쥬(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18세기 피아노 소나타와 존 케이지, 카라 카라예프의 피아노곡)로 그저 말끔한 소품일 뿐이었다. 물론 〈캄머발레〉는 문학적 서사, 성별과 캐릭터, 스펙터클을 걷어내고, 의자라는 일상적인 장치와 절제된 개인 감정에 초점을 둔 모던한 작품이다. 다시 말해 1995년 초연당시 시점에서는 현대발레로 추동하는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2024년 현재! 이 작품이 국내 발레 창작자들에게나 현대적 안목을 갖춘 관객에게 자극과 영감을 주기엔 적합하지 않았다는 판단이다. 이미 국내 발레 안무가들은 미니멀 하고 조형적이면서도 개인의 내면을 탐색하는 안무 수준은 넘어섰기 때문이다. ‘컨템퍼러리’는 오늘의 시대를 관통하는 무엇이어야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작품내용과 우리 춤계에 미칠 영향력 등 여러 입장을 고려해 작품을 사와야 한다.
서울시발레단×차진엽 〈백조의 잠수〉 ⓒ세종문화회관 |
무용수들의 수행 능력도 완벽하게 체화된 앙상블이라 하기 어려웠다(11일관람). 이러한 문제는 차진엽의 〈백조의 잠수〉에서도 나타난다. 최수진과 성창용 같은 꽤나 신뢰할 무용수들이 출현하나 기존 무용들과의 합이 조화롭지 못했다. 이는 무용수 개인의 테크닉적 문제보다는 프로젝트마다 영입된 무용수들의 경험 부족과 연습 시간과 직결된다. 정기공연인 〈한 여름밤의 꿈〉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지적되었다. 장인정신으로 칭송될 만큼 테크닉 연습에만 몰두한 발레리나(노)들이 동작을 해체하거나 이질적인 것들과 연합하기, 때로는 왜곡된 표현까지 요청되는 현대춤 테크닉을 익히는 데는 숱한 경험과 시간이 누적되어야 한다. 해외 명성 있는 발레단의 경우 발레와 현대무용마스터가 함께 있고, 꾸준히 현대 테크닉을 배운다. 국립무용단의 경우도 전통적 몸짓에 뿌리를 두면서 반복적으로 해외 안무가나 현대춤 전공자들과 협업을 통해 이제는 한국적이면서 현대적인 테크닉을 꽤 구사하는 단계에 올라왔다. 국립현대무용단도 프로젝트마다 새로운 무용수를 기용하는 유사한 방식이나 발레는 체계가 다르다. 이러한 구조적 맹점을 어떻게 돌파해 나갈지 고민이 필요하다.
서울시발레단×차진엽 〈백조의 잠수〉 ⓒ세종문화회관 |
차진엽의 〈백조의 잠수〉는 자신의 창작 화두인 ‘몸의 원형’에서 발견한 물의 본질과 클래식 발레의 대명사인 백조와의 만남에서 출발한다. 수면 위의 모습과는 다르게 물 아래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백조의 현실적 해방을 추구한다. 이는 현대사회의 숨가쁜 속도와 자극에서 벗어나 자아를 찾아가자는 의도로, 나 다운 ‘백조되기’이다. 무대 장치와 일관된 웨이브 동작에서 드넓은 바다라 상상하게 하고, 동시에 중력을 극복하려는 기존 발레에서 중력을 무력화하는 접목은 설득력이 있다. 영어 부제목 '리타데센도'(Ritardscendo)의 의미 같이 점점 느린 속도와 크기로 물 속을 유영하는 고요함을 지향한다. 그러나 실제 자신이 다이빙 체험에서 깨달은 호흡의 본질과 무중력의 세상으로 초대하려한 해방의 열망이 기대만큼 강렬하진 않았다. 백조와 발레라는 프레임을 강박적으로 의식한 건지, 백색의 날갯짓과 파 드 부레를 구사하는 앙상블 위주로 예상밖의 킥이 없는 평이한 구성이었다. 몸의 원형을 찾으려는 꾸준한 차진엽 방식의 비판적 성찰이 6주라는 너무 짧은 기간에 풀어내기엔 무리였다 믿고 싶다.
서울시발레단×차진엽 〈백조의 잠수〉 ⓒ세종문화회관 |
올 해 세 차례의 공연은 단체의 방향성을 가늠해 보게 한다. 5월 안성수, 이루다, 유회웅의 〈봄의 제전〉에서는 두 편이 재현작이었다. 오래 기간 안무가와 호흡을 맞춘 단원들이 아니기에 원작보다 테크닉적 수행 능력이 부족했다는 여론이 많았다. 기왕 재현작을 할 거면 한국 창작발레사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작품을 재발굴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 부분이 아쉽다. 가장 기대가 컸던 창단공연 주재만의 〈한 여름밤의 꿈〉도 내부 운영의 부실이 가시적으로 드러났다. 1,2부로 나뉘어 전막 공연처럼 오랜 시간을 고수하나 결과적으론 효율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유사한 씬과 과잉된 장치에 춤이 압도당해 아쉬웠다. 초청 안무가의 과한 의욕을 조율할 예술감독 및 컨트롤타워의 문제와 또 하나 원래 포스터에 나온 장면이 삭제되었으나 아무 양해도 없었던 운영진의 비전문적 조치이다.
안호상 극장장은 서울시발레단이 국내 발레 안무가들을 발굴하겠다 발표했으나, 첫 단추부터 현대춤 안무가들과 협업을 서둘러 꿰야 했는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봐야겠다. 긴 안목으로 초창기에는 흡족스럽지 않더라도 국내 발레 안무가에게 기회를 주고, 한국 발레 창작 역사에 헌신한 선배들을 복기하는 포용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방향도 고려하면 좋겠다. 작품 선정 기준을 비롯한 운영의 공론화나 여전히 감독과 지도위원 부재와 불안정한 무용수 영입 등 풀어야 할 문제가 많아 보인다. 무엇보다 행정과 창작이 혼재된 상태로 운영되는 방식이 가장 우려가 된다. 세계적인 거장의 레퍼토리를 확보했다거나 인기에 영합한 인재 기용 같은 홍보와 성과에만 치중한 것이 아닌지 냉철하게 진단해야 하겠다.
여러 우려로 보아서 서울시발레단이 유일한 공공 컨템퍼러리 발레단으로 무사히 안착하여 컨템퍼러리 발레 확장에 모멘텀이 되길 바라는 간곡한 마음이다. 국립발레단과 광주시발레단에 이은 48년만의 공공발레단 창단이란 고무적인 출발을 보며, 발레팬의 향유 기회를 넓히는 레퍼토리 발굴과 발레인들의 성장을 지원하는 플랫폼으로서 제 기능을 해 주길 바란다. 무엇보다 단체가 추구하는 ‘동시대성’이 무엇인지 선명한 방향성과 비전이 보이는 기획을 내년에는 만나고 싶은 것이다.
김혜라
현장 비평가로 2012년 한국춤비평가협회를 통해 등단했다. 월간 <춤웹진>과 <더프리뷰>에 정기적으로 컨템퍼러리 창작춤을 기고하고 있으며, 국공립을 비롯하여 여러 문화재단에서 심의와 평가도 병행하고 있다. 세종시문화재단 자문위원, <춤웹진>편집위원이며 중앙대에서 비평관련 춤이론 수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