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스파프, 10. 16. ~ 11. 9.)는 올해도 지난해와 유사한 기획 방향을 지속하면서 프랑스 보석회사 반클리프아펠이 후원하는 ‘댄스 리플렉션’(Dance Reflections by Van Cleef and Arpels) 프로그램을 통해 다수의 춤들을 소개하였다. 이 기획 방향은 예술-과학-테크놀로지의 새로운 관계성을 비롯하여 아시아 태평양 사운드·뉴뮤직, 지역성과 초지역성, 축제를 통한 이동과 협력의 주제로 세분된다. 도저히 정의될 수 없는 오늘의 공연예술 세계에서 특정 이벤트의 방향성은 그래서 제한적으로나마 설정될 수밖에 없겠는데, 실제 놓인 상황과 단계를 반영하여 열어가는 스파프대로의 방향은 중요해 보인다. 스파프는 2001년에 시작해서 올해로 25주년이다. 지난 몇 해 지속된 기획 방향은 스파프에 이전의 단편적 기획을 탈피하는 새로운 체질을 꾸준히 조성해왔다. 이를 바탕으로 새 서사 담론들이 해마다 부각되고 왕성하게 소통되도록 하는 것이 스파프의 향후 과제라 생각된다.
〈룸 위드 어 뷰〉
올해 스파프 전체에서 가장 규모가 컸을 〈룸 위드 어 뷰〉(전망 좋은 방)는 제목을 스스로 부정하는 반어법을 담았다. 프랑스 마르세유국립발레단이 올린 〈룸〉은 대리석 채석장을 재현한 현장에서 솟구치는 인간들의 갈망과 저항을 다룬다. 공연 시작 전부터 채석장 이미지가 선명한 대형 구조물의 한 벽면에다 커다란 사각형을 뚫어 만든 터널 같은 방에서 크게 울리는 일렉트로닉의 라이브 연주와 춤추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무대와 객석이 서로 가까워지는 분위기가 미리 퍼지고 있었다. 공연은 그 방 안에서 이뤄지는 경쾌한 레이브 댄스 파티가 점차 음습한 상황으로 치달으며 그 방이 갑자기 폐쇄되는 부분과 무대 바닥에서 집단적인 군중행동들이 전개되는 부분으로 대별된다. 여기서 채석장은 황량한 느낌을 유발하는 장치일 뿐, 공연의 소재는 채석장이라는 특정 장소와는 사실상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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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세유국립발레단 〈룸 위드 어 뷰〉 ⓒ2025서울국제공연예술제 |
경쾌한 레이브에서 사람들이 광란의 순간들에 몰두할 동안에는 그 방의 전망은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레이브 중에도 방 바깥에서 남녀 간에 조롱 투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고, 레이브 끝난 후엔 방 안의 남녀가 서로 폭력을 자행하고 급기야 옥상에 내몰린 여자가 남자를 아마도 대리석 같은 물체를 쳐들고 저돌적으로 강타하며 앙갚음하는 순간 돌 잔해 무더기와 먼지가 무대로 낙하 엄습하면서 방마저 돌더미로 폐쇄된다. 그 방의 전망 또한 폐쇄되었으며, 이로써 폭력은 섬뜩한 흔적을 남긴다. 폭력을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장치로서 돌 잔해의 낙하 사태는 기억에도 또렷할 만큼 퍽 인상적이다. 이제부터 바닥으로 집결한 남녀들은 듀엣, 삼삼오오 또는 전체로 무리를 지어 자기들의 처지를 공유하고 알리는 데 열중하였다. 우선 서로 감정 이입 관계들을 맺으며 동류(同類)의식을 형성하고서는 해방감을 만끽하는 모습들부터 보인다. 춤으로 호흡을 맞추는 3인무를 비롯하여, 인간 탑쌓기, 원무에서 농도 짙은 움직임들로써 집단의 결속력이 가시화된다. 그러다 급기야 그들은 한 무리로 집결되면서 단적으로 말해 저항하는 청년 군중의 몸짓들을 드러내는 데 몰두한다. 잦은 몸의 굴신과 팔 휘둘기 그리고 집단 함성과 손으로 가슴 치기가 그러한 몸짓들로서 꽤 오래 지속되었다. 그 중간에 DJ는 왜건을 끌고 등장하여 연신 라이브 테크노 사운드를 뿜어내며 사람들을 집결시키는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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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세유국립발레단 〈룸 위드 어 뷰〉 ⓒ2025서울국제공연예술제 |
〈룸〉 공연의 대미(大尾)를 이루는 것은 사람들이 객석을 응시하며 가슴과 몸을 손으로 쳐대는 행동이다. 마치 시위 현장의 그것처럼 항변의 느낌을 촉발하는 이 부분에서 〈룸〉의 주제 의식이 완연하다. 집단이 시위를 결행하는 내내 시각적 배경을 이루는 채석장이라는 대형 구조물에 힘입어 시위의 크기는 더 확대되어 느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룸〉에서 시위가 폭력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되었으나 정작 시위의 종착점은 모호하다. 시위에서 저항이나 봉기를 연상함 직할지라도 시위의 동기나 목적 등 그 실체는 막연한 감이 짙다. 록콘서트나 레이브 파티에 모인 사람들의 해방감에서 저항 의식이 저변을 이룬다는 식의 상식적 일반론을 넘어설 만한 〈룸〉 특유의 저항 의식 내지 감성이 무엇인지 답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또한 직설적인 몸짓들에 비하여 움직임과 움직임의 구성은 평이하고 밀도 또한 그러하였다. 이러한 취약점들로 인하여 〈룸〉은 그 무대 규모와는 퍽 대조적으로 작품 의미가 미약하였던 때문에 스펙터클한 구조물 역시 유감스럽게도 소비되는 무대 이미지에 머물렀다.
〈바퀴를 두른 사람들〉
지역성에 바탕을 둔 공연 〈바퀴를 두른 사람들〉(We wear our wheels...)은 남아프리카 줄루족 가운데 인력거를 끌던 조상들을 기리는 찬가이다. 긴 영어 제목을 모두 옮기자면 이러하다. ‘바퀴를 두르는 일이 우리는 자랑스럽고 우리는 당신들[백인들]의 거리를 색깔로 내려친다... 1820년 우리는 사탄에게 봉주르(안녕하세요)라 한다.’ 줄루족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최대 부족으로서 아주 용맹했던 종족으로 알려져 있다. 〈바퀴를... 〉 공연이 앵글을 맞춘 것은 그 인력거꾼들의 현장이며 남아프리카의 당대 현실도 암암리에 곁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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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올린 〈바퀴를 두른 사람들〉 ⓒ2025 서울국제공연예술제 |
그 지역의 노래를 목청껏 내지르는 보컬리스트를 중심으로 일고여덟 명의 춤꾼들이 인력거꾼으로 등장한다. 명확한 의미가 이방인 평자로서는 잘 파악되지 않는 노래는 그곳의 민요로 짐작되며 보컬리스트는 간혹 등퇴장을 번갈으면서 판을 인도하는 무당처럼 도드라진다. 울긋불긋 아프리카의 풍미가 흠뻑 물씬한 원색조의 의상과 수시로 바뀌어 투사되는 디지털 이미지들 속에서 춤꾼들은 신들림과 자제(自制) 사이를 오가는 춤을 펼친다. 음료수 캔이 주렁주렁 매달려 천장에서 내려온 가로 바텐은 춤꾼들이 인력거꾼의 모습을 은유-재현하는 데 아주 유용한 도구로 쓰인다. 머리와 허리춤 높이 사이의 어디엔가 멈추곤 하는 바텐을 붙잡거나 매달려서 춤꾼들은 바텐과 한 몸을 이루는데, 그것은 인력거꾼의 춤들이다. 현지 출신 백인인 안무자가 실제 자기 눈에는 인력거꾼이 춤추는 천사였다고 회상하듯이, 인력거꾼의 춤은 〈바퀴를... 〉을 견인하는 핵심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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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올린 〈바퀴를 두른 사람들〉 ⓒ2025 서울국제공연예술제 |
아파르트헤이트로 대변되는 지독한 남아공 식민지 현실에서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것은 인력거꾼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바퀴를... 〉에서 그들은 희생자로 머물기보다는 자유분방한 놀이꾼 같은 면모가 훨씬 강하였다. 색색깔의 원색 카펫 위에서 춤꾼들이 놀며 어울리는 모습이 자주 바뀌고 그것들이 디지털 이미지로 정면 벽에 자주 투사되어 활달한 배경 구실을 하였다. 이처럼 인력거꾼들도 삶에서 접하곤 했을 축제 같은 분위기가 수시로 곁들여지는데, 공연은 시간이 흐를수록 식민지의 고난 속에서도 의연했던 어떤 (인간 보편의) 존엄을 환기하는 공연으로 다가온다. 공연 제목은 이렇게 말한다. 인력거꾼들은 인력거를 타는 고객인 (백인) 사탄들에게 정중하게(아니면 춤추듯이 즐겁게) 인사(봉주르)를 보냈다. 묻힌 역사 속에서 그 현실을 다시 환기하며 연대(連帶)를 찾아 모색하는 탈식민적인 연출적 인식이 부각되는 무대이다.
〈도그 데이즈〉
얀 마르텐스의 〈Dog Days Are Over 2.0〉(도그 데이즈)을 보려면 상당한 인내부터 갖춰야 할 것이다. 스파프 25년 역사상 이색적인 작품들의 하나로 꼽힐 듯하다. 근 70분 내내 무용수들이 제자리 뜀뛰기 같은 발구르기를 거의 쉼 없이 박자를 맞춰가며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가운데 자기들이 배열 대형을 조금씩 바꾸어나가는 것이 작품 구성의 요체이다. 8명의 그들은 제 나름대로들 체육복 같은 것에다 운동화와 기억컨대는 양말을 착용하였다. 주로 객석을 보고 늘어서서 뜀뛰기, 앞으로 또는 뒤로 또는 옆으로 이동하는 뜀뛰기에 덧붙여 1열 종대나 2열 종대로 재배열되거나 사선의 대형을 취하고 간격을 약간 좁혀 둘 셋씩 모여서고 때로는 객석에 등을 보이고 뜀뛰기를 계속한다. 뜀뛰기 자동 기계인 듯이 말이다. 중도에 암전되거나 약간 어두워지기도 하지만 조명은 그다지 변화가 없고 무용수들의 운동화 바닥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 그리고 바닥과의 마찰음이 음향 구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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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마르텐스 〈도그 데이즈〉 ⓒ2025 서울국제공연예술제 |
〈도그 데이즈〉에서는 작품 결론이 열려 있음은 물론이다. 한 가지 분명한 점으로서, 무용수들은 힘차고도 비교적 빠른 뜀뛰기로써 자기들 나름의 배열 약속을 따라야 하므로 실상은 1시간 내내 땀을 뻘뻘 흘리며 무미건조한 것을 참아내야 하는 극한 속에 놓였을 것이다.(퍼포머가 수행해내야 하는 이 극한이라는 상황은 퍼포머의 역할과 정체성 등에 관해 매우 복합적인 이슈를 제기하는데, 굳이 여기서 답을 내려야 할 일은 아니다.) 그 극한과 배열 약속 사이의 갈등을 짐작하면서 평자로선 오히려 배열 약속이라는 것이 극한을 끈질기게 감수하도록 하는 진정제가 아닌가 싶었다. 혼자서 그렇게 뜀뛰기를 하라면 과연 누가 얼마나 오래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규칙-약속은 어쩔 수 없이 필요악 같은 것이라는 인생사의 흔한 딜레마가 슬그머니 떠오를 것이다. 비록 그 필요악이 대부분은 잠정적일지라도. 출연 무용수들이 극한을 감수하며 애써 쌓아가는 미니멀한 순간들 덕분에 되새겨보게 되는 딜레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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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마르텐스 〈도그 데이즈〉 ⓒ2025 서울국제공연예술제 |
〈1℃〉
허성임은 〈1℃〉에서 기후위기에 맞대응할 것을 선언하였다. 허성임은 수년 전 미투 운동의 연장선에서 여성의 대상화에 맞섰었다. 허성임의 공연들은 무대 위에서 내리꽂는 듯한 저돌적인 움직임들에서 사회적 은유를 추정할 소지가 다분하여 우선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조명되곤 하였다. 이번의 〈1℃〉가 그간의 작품 경향으로부터의 이탈로 비춰질지 모르겠으나 그 자신이 염두에 두어온 사회적 이슈와 연결되며 그 확장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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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임 〈1℃〉 ⓒ2025 서울국제공연예술제 |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 무대에서도 특별한 장치는 없었다. 〈1℃〉는 허성임이 무대 왼쪽에서 기어들어 오는 도입부로 시작되며, 예닐곱의 무용수들이 기진맥진해서 기어나가는 것으로 끝난다. 한 사람이 기어들어 오던 것이 모두가 기어나가는 것으로 변하는 모습에서 기후위기 끝의 어떤 운명을 미리 보는 듯하여 암울한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무대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제시하는 허성임의 성향을 엿볼 만한 대목이다. 도입부에서 살금살금 들어왔던 허성임이 그 자세로써 여러 방향으로 이동하고 일어나 배회하고 무대를 뛰면서 도는 도중에 6명이 등장하자 허성임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퇴장한다. 이후 이어지는 대부분의 공연은 그 6명에 의해서 전개되는데, 서너 명씩 또는 함께 행하는 걷기 동작은 전반적으로 무표정의 빠르며 리드미컬한 행진으로 진행되고 자주 급회전을 동반한다. 그들은 걷기 동작을 축으로 하되 간간이 쓰러지기, 굴신, 몸 일렁이기와 몸틀기, 비틀대기 같은 움직임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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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임 〈1℃〉 ⓒ2025 서울국제공연예술제 |
걷기는 말하자면 〈1℃〉의 주제 동작이다. 걷기는 직립보행 인간의 기본이자 인간 생명을 유지하는 데 따르는 최소의 요건이다. 직립인간 출현 이래 걷기는 계속되었고 기후위기에도 계속된다. 이처럼 생명에 못지않게 중대한 걷기가 여러 가지 양상으로 변주되는 〈1℃〉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이룬 것은 제시되지도 않는다. 그들은 마냥 양상을 바꾸며 걷는다. 그런 결과, 〈1℃〉의 세계에서 우리가 최종적으로 마주칠 것은 걷기 행위가 무위(無爲)로 끝나고 오히려 과도하며 맹렬한 스팟 조명이 시사하듯 온도가 상승한 더운 땅(지구)에서 마침내 사람들이 생존자로서 거친 숨소리로 헐뜩이다 기진맥진하는 살풍경이다. 〈1℃〉는 기후위기의 당면한 현실을 은유하는 데 집중하며, 그 위기의 현실이 구체적 실상으로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그 위기에 대처하는 모습은 제시되지 않는다. 기후위기가 초래할 운명이 환기되는 데 비하여 정작 그 운명을 접하는 느낌은 평이한 편이었다. 다시 말하여, 기후위기 의식을 공유하고 함께 다져나가도록 촉진하는 모종의 플러스알파가 〈1℃〉에 투입될 필요가 있었다.
2025 스파프
올해 스파프에서 평자는 일정상 춤 공연 중에서 4편을 보는 데 그쳤다. 프로그램 소개에 따르면 올해 스파프는 공연 행사 이외에도 여러 워크숍과 포럼을 펼쳤다는데, 새로운 서사를 포착하고 소통하며 가다듬으려는 의도를 담은 행사들이 아닌가 한다. 공연 후 관객과의 대화 말고는 부대 행사가 없었던 과거와는 차별성을 갖는 부분이기도 하다. 올해 스파프에서 한국에서 활동하는 공연예술인의 국내작이 한 작품(〈12 사운드〉)을 빼고 사실상 전무한 것으로 파악되며 글로벌 차원에서 활동하는 한국 공연예술인들의 작품이 몇 점 선정된 것은 과감한 시도로서 신선한 감을 준다.
무용 부문에서 전체 9편의 작품은 반클리프아펠 후원의 ‘댄스 리플렉션’으로 진행되었다. 자료들에 의하면 반클리프아펠은 20세기 전반부터 춤에 관심을 기울여왔고 21세기 들어 춤 분야 후원 활동을 더욱 강화해왔다고 한다. ‘댄스 리플렉션’은 2020년에 시작 올해 6번째로서 연간 100편 가량의 작품을 선정 지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가운데 9편이 이번 스파프에서 올려졌다. 이번 춤 공연작들의 면면으로 보아 믿음이 가며 반클리프아펠과의 협력이 가져올 결실에도 기대를 걸게 된다. 반클리프아펠 자체의 ‘댄스 리플렉션’이 탄탄하므로 그 일부를 스파프에 초청하는 것도 수긍되는 점이다. 올해 처음 시도되는 프로그램인 탓도 있을 터인데, 그러한 협력이 어떤 경로를 통해 진행되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상태에서 간략히 첨언하자면 이 협력에서 스파프의 독자성은 견지되어야 할 것이고, 이와는 별도로 스파프만의 초청 작업이 병행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