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축제의 형식이 아니고서는 근 한달 동안(12.06-27. 매주 수요일) 한 호흡으로 이어지는 공연을 보러 간 경우가 많았을까?
전통춤에서 요일의 이름을 붙여 춤전의 기획은 있었고, 그것도 거의 기획전 형식이라 매주 다른 춤꾼과 작품이 올라가는 방식이지 한 단체가 한 달을 자기네 프로그램으로 공연을 이어가는 것은 자주 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던 거 같다. 게다가 그 4번의 공연이 매번 다르며 하나로 이어지는 어떤 이야기와 흐름을 갖는다는 것 역시 이 수요상설 공연을 궁금하게 하는 요인이었다.
긴 호흡의 공연은 이 작고 소박한 블랙박스 무대(성균소극장)에서 겁 없이? 펼쳐졌던 발레상설이나 승무를 100일씩 공연하는 구력으로부터 탄생한 것이고, 다른 지원금 없이 많은 액수가 아닐게 뻔한 소극장 기획 선정 하나만으로 16명의 출연자와 24개의 작품을 춤춘다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장인숙 희원무용단의 저력으로 보인다. 극장의 구력과 무용단 저력(底力)의 만남이 공연에서 어떻게 피어오를지가 관건이었다.
성균소극장은 가서 앉으면 ‘여닫이문’만큼이나 무대와 객석이 가까운 것에 흠칫 놀란다. 코로나가 끝났음에도 이 ‘가까움’은 아직 낯설다. 그럼에도 좌석이 불편한 것 빼고는 이 가까움은 금새 익숙해지고 즐길만한 것이 되어간다. 관객입장에서 무대와의 동화는 거리만큼이나 자연스럽고, 심지어 내가 무대에 있는지 객석에 있는지가 모호해질 때가 있을 정도다. 그런 곳에서 한국춤을 본다.. 이곳에서 한국춤을 볼 때마다 극장 탄생 이전에 실내에서 추어지던 한국춤은 이런 비슷한 크기의 공간이 아니었을까 하고 상상한다. 제일 앞 좌석이라면 춤추는 이와 바닥에 앉아서 보는 이의 높이가 얼추 예전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며 1열을 고집하기도 한다. 교방이나 기방의 ‘방(房)’자와 닮은 곳, 의도하지는 않았겠으나 환상의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 몸과 몸의 가까움이 있는 곳, 보는 이와 추는 이가 극단적으로 나뉠 수 없는 곳, 이 모두가 한국춤 실내 탄생지와 비슷하겠구나 위로하며 다른 모든 애로를 잊고 춤을 본다.
1주(춤이 어우러진 기쁨의 정원)와 4주(7인의 춤 수다)는 무용단 전체가 꾸미는 무대로 이인무, 3인무, 5인무등의 군무와 홀춤전으로 채워졌고, 2주(同氣連枝)는 장인숙, 장지현 자매의 가야금과 춤의 무대와 3주(별하의 춤)는 춤의 도반들의 무대로 꾸며졌다. 1주는 참관하지 못했으나 그 아쉬움은 다른 무대에서 봤던 기억과 4주의 홀춤전으로 달래고 2주_동기연지로부터 시작했다.
춤의 친구들
장인숙은 자신의 공연에 언니인 장지현(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가야금을 한 순서로 넣으며 자매의 무대를 종종 만들었다. 이번 무대는 좀 더 본격적으로 가야금과 춤이 독주와 독무의 무대를 주고받으며 진행되었다. 장인숙이 ‘구음검무’ 홀춤으로 무대를 열면 장지현이 25현 가야금 창작곡인 ‘밤의 노래(박정규 곡)’로 받고, ‘논개별곡’으로 춤이 음악을 이으면 대금 독주(권선정_청송곡)가 음악의 정취를 고양시킨다. 이어 창작곡 ‘바람, 강(이준호 곡)’이 연주되고, 끝으로 김수악제 김경란류 ‘교방굿거리춤’을 장인숙이 추는 식이다.
장인숙 희원무용단 ‘同氣連枝’(동기연지) |
이번에 추어진 ‘논개별곡’은 25현 가야금으로 연주된 반주를 사용하여 언니의 연주와 톤이 어우러지도록 했으며, 언니의 라이브 연주에 맞춰 춤을 춰보는 것을 연습 중에 있다는 말도 전했다(자매의 가야금 산조는 얼마나 맛깔스러울 것인가). 장인숙의 어떤 공연에서는 가볍게 준비된 차를 관객과 함께하거나 공연이 끝나면 따끈따끈한 호두설기를 관객들에게 나누는 것 등 춤을 ‘생활의 맥락’ 속으로 소소하게 연결시키는 감성을 갖고 있다. 이 소소한 시도는 우리가 잊었던 과거를 건드리고,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며, 춤 공연을 다른 체험으로 이끈다.
장인숙 희원무용단 ‘同氣連枝’(동기연지) |
같은 나무의 다른 가지로 자매간을 나타내는 뜻인 ‘동기연지’의 무대는 잔잔한 성품의 두 자매가 차분한 톤으로 음악과 춤을 주고받으며 지금은 자주 만날 수도 없고, 잊어가고 있는 춤의 옛친구인 음악을 데려와 한 상을 반듯하게 차려낸 느낌이었다. 거기에 다른 듯 비슷하게 말없이 무대를 채우는 자매의 잔잔함이 관객에게도 서두르지 않고 한 상을 충분히 음미하게 해주었다.
장인숙 희원무용단 ‘同氣連枝’(동기연지) |
3주 ‘별하의 춤’은 유영란(강선영류 태평무), 강윤선(정민류 교방무), 임미례(한혜경류 십이체 장고춤), 서정숙(김경란류 교방굿거리춤), 그리고 마지막에 신정혜의 흥타령으로 한숨 돌리고, 장인숙의 춤(논개별곡)으로 마무리 되었다. 3주의 완숙한 춤꾼, 무르익은 춤은 공간을 꽉 채우는 힘이 있었다. 정민류의 교방무는 주로 일본에서 활동한 정민선생님이었기에 상대적으로 공연에서 자주 보기 쉽지 않아 신선했는데, 매우 공들이고 세심하게 짜여진 음악과 피리독주 부분이 색다른 정서를 느끼게 해주었다. 부채와 짧은 수건을 들고 추는 형식도 신선했다. 춤 사위의 전개는 급하지 않고 절제되어 있으며 음악은 정서의 모멘트가 가득하였다.
장인숙 희원무용단 ‘별하의 춤’ 강윤선 〈정민류 교방무〉 |
3주 ‘별하의 춤’은 관객의 입장에서 다채로운 춤을 즐길 수 있었던 기획이 돋보였고, 각각의 홀춤이 쌓여가면서 맛을 내는 흐름과 그 끝에 춤의 도반들의 마음이 장인숙의 춤(논개별곡/시나위반주)을 향해 모이는 것이 보였다. 관객을 대접하기 위해 다양하게 차려진 한 상이 푸짐하였다.
장인숙 희원무용단 ‘별하의 춤’ 장인숙 〈논개별곡〉 |
희원의 떨리는 꿈
4주 7인의 춤 수다는 드디어 희원무용단의 꽃들의 무대였다(노수연 사회). 장인숙 대표가 적지 않은 시간 키워내고 함께 춤춰온 이들은 대다수가 20대인 춤꾼들이다. 그래서인지 춤판은 어느 춤판보다 배워온 틀 안에서 예쁨이 흐드러지고 젊은 기운이 생동했다.
장인숙 희원무용단 ‘7인의 춤 수다’ 이정현 〈태평무〉 |
배우진의 장금도 민살풀이로 차분히 시작된 춤판은 배우진의 차분하고 절제된 춤으로 과함 없이 깔끔하게 추어졌다. 심지윤(승무)은 부드럽고 겸손한 춤과 활달한 법고를 보여주었고, 김서현(논개별곡)은 감정의 여러 층을 풍부히 메우는 표현력으로 시선을 장악하는 힘이 좋았다. 이정현(태평무)은 젊음과 활옷이 만나 상승시킨 기운이 젊은 태평무가 희망 자체일 수 있음을보여주었고, 김진성(교방굿거리)은 길고 시원한 몸의 선과 더불어 따뜻한 품성의 교방굿거리를 선보였다. 김채린(구음검무)의 야무진 몸체로 활달함이 강조된 색다른 구성을 깔끔하고 야무지게 추었으며, 이번 공연의 주연출을 맡은 엄정아(조갑녀류 민살풀이춤)는 성숙한 감성으로 여백을 메우는 담담한 깊이를 보여주며 무대를 채워나갔다.
장인숙 희원무용단 ‘7인의 춤 수다’ 김서현 〈논개별곡〉 |
이날의 무대는 간혹 젊음의 기운에 치받쳐 사위가 뻗치거나, 발걸음이 과하게 활달하거나, 손끝이 과하게 구부러져 있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20대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감정을 다루는 힘과 춤사위가 잘 수련되어 있었다.
한창 춤을 수련 중인 이들은 아직은 연마되지 못한 지점들이 없지 않지만 전통춤은 끝이 있는 공부가 아니기에 젊음의 기운으로 모든 어려움을 넘어가기를 바라는 건 모든 선배 춤꾼들의 마음일 것이다. 장인숙 선생은 오랜 시간 이들에게 춤을 가르쳤기에 제자들에게 “기술은 많이 가르쳤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은 마음이다. 몸은 악기이고, 그 악기는 마음으로 울리는 것”을 강조한다고 한다(장인숙 인터뷰, 2023.12.28.).
늙어서는 감정은 다루고 표현하는 능력은 좋아 지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아파지는 게 문제라면, 젊을 때는 그 젊음의 기운이 전통춤이 기본으로 요구하는 숙이고, 누르고, 머물고, 없애는 빼기의 방법과 충돌하기에 거기서 생기는 갈등과 번뇌를 다스리는 것이 춤 수련의 주요한 과제가 된다. 그날 가장 많이 본 것은 젊은 춤꾼들이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애쓰는 호흡의 떨림과 손끝의 떨림이었다.
창단은 2019년 연말이지만 그 이전부터 함께 활동해 온 희원의 춤꾼들은 각각 홀로 추어야 하는 외로운 홀춤을 앞과 뒤에서 서로를 받쳐주며 보이지 않는 힘으로 하나로 이어내는 떨림의 춤판을 지어나갔다.
전통춤 담론에 담겨야 할 것
동아시아에서 공유하고 있는 예술론에는 도기병진(道技並進)이라는 말이 있다. 현상을 넘어 실상을 꿰뚫어 보는 도(道)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생생하게 살려내는 것은 바로 기술(技)이고, 이 둘이 함께 있어야 진정한 예술로 향해갈 수 있다는 말이다. 실상을 꿰뚫어 보는 도를 위해서는 ‘순수한 영혼’을 가져야 하고, 그것을 감정의 파동으로 살려내는 일은 그 방법과 ‘기술에 집중하고 연마’하는 일이라고 보는 것이고 이 둘이 다 있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전통춤에서의 수련은 우리 문화 속에서 오랜 시간 쌓여 온 춤의 자산을 배우고 익히는 것(技)이 중심이다. 그것이 많이 강조되어 왔기에 이는 낯선 일은 아니다. 우리가 예술세계로 들어갈 때 그것부터 만나게 되기에 이를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병진(竝進)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또 한 축이 있어야 하는데, 그 도(道)는 삶을, 순간을 가슴으로 느끼고 그것을 머리로 올려 생각하는 그 과정에서 닦여나간다고 보았고, 그럴 때의 자아는 이기심, 고정관념, 집착 등과 연결되어 있는 작은 아(我)가 아니라 순수한 영혼 또는 깨달음이 가능한 주체인 오(吾)를 말한다. 이오관물(以吾觀物): 오(吾)로서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 본다.
이를 전통춤에 대입해 보면, 춤의 기예를 수련하는 것은 기본이자 기본이고 그것뿐 아니라 예술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실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슴과 머리로의 궁구(窮究)를 통해 무엇인가를 깨닫고, 꿰뚫는 것이 빠지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연마된 기술로 담아낼 때 예술의 경지에 가 닿게 된다는 것이다. 전통춤의 수련과 교육에 빠지지 말아야 할 두 가지의 균형이다.
희원무용단의 4주간의 〈춤, 사람 그리고 이야기〉에서 감성적으로 느껴진 것은 예의 장인숙의 전통춤을 대하는 마음이었다. 춤만 따로 떼어져 무대로 올라간 지 백 년이 훌쩍 넘은 시간 동안 우리 모두 잊어가고 있는 춤의 친구들, 춤과 더불어 있던 한 몸들, 춤을 출 때의 그 마음을 소소하게 불러들인 장인숙은 춤과 사람과 이야기를 연결하고 싶다고 하였다. 감성적으로 전통춤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건조해진 춤이 따뜻하고 말랑해진 느낌이다.
이지현
1999년 춤전문지의 공모를 통해 등단했다. 2011년 춤비평가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비평집 『춤에 대하여 Ⅰ, Ⅱ』를 출간했다. 현장 춤비평가로서 왕성한 비평작업과 함께 한예종 무용원 강사를 역임하고, 현재 아르코극장 운영위원과 국립현대무용단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