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최두혁 〈라흐마니노프로부터 달려가는 조금 복잡한 휴식의 버전〉
음악과 철학으로써 말하는 춤
권옥희_춤비평가

무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콘체르토 2번이 흐른다. 흰색의상의 춤 물결, 춤이 먼저 가면 음표가 따라 붙는 것 같은, 그 움직임이 마치 음표 같다.

군무에서 시작하여 군무로 이동하고, 다음 군무의 움직임을 위해 크고 작은 춤의 힘이 엇물리곤 하나, 군무가 내내 더 강하게 힘을 행사하는 춤이다. 최두혁만의 작업 스타일이다. 최두혁의 〈라흐마니노프로부터 달려가는 조금 복잡한 휴식의 버전〉(아양아트센터, 12월 15일), 무려 71명의 무용수가(중견 14명을 포함) 오른 무대.



최두혁 〈라흐마니노프로부터 달려가는 조금 복잡한 휴식의 버전〉



온갖 세상의 소리들, 잡음. 끊임없이 무대로 쏟아져 나오는 무용수들, (춤)삶의 군상. 완강한 삶의 세계를 표상하느라 바쁘다. 그 질서와 위계와 완강한 춤의 체계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갇힌 채 앙상하게 추거나, 미친 듯이 질주하거나 자신의 춤 안에 몸을 담는 것뿐일지도. 그럼으로써 휴식을 위해 ‘라흐마니노프로부터 달려가는’ 춤으로(무용수로) 가득한 이 기이한 무대 위를 가로지르는 상징과 비유들은, 그것들 없이는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는 춤의 딜레마를 그 자체로서 보여준다. 핀 조명이 군무진속 중견들의 춤(만)을, 핀셋 같은 빛이 그 순간의 움직임을 잡아낸다. 마치 세상의 온갖 잡음 속에서 듣고 싶은 음악만 골라 듣는 것처럼. ‘계속되는 선택의 시간에’도 어김없이 흐르는 삶의 계속성을 춤으로 보여준다. 눈으로 듣는 라흐마니노프 이미지.

 



최두혁 〈라흐마니노프로부터 달려가는 조금 복잡한 휴식의 버전〉



중간막이 걷히자 갓 등, 막처럼 걸려있는 은박지. 번쩍이는 은색 막 앞에 서 있는 검정색 슈트를 입은 남자.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에 갇힌 듯, 한 곳에서 춤을 춘다. 물결 같이 춤으로 넘실거리는 군무 속에서 혼자다. 앞으로 발을 내디딜 수도 안 내디딜 수도 없는 ‘허방’같은 공간에. 푸르륵, 파쇄되어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은박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가 서로 부딪히면서 변주되는 음악과 춤의 조화. 그 대비와 희망과 죽음의 이미지가 선명하다. 좋은 춤이다.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 군무진이 무대 앞 상수 쪽을 향해 이동, 일제히 한 곳을 바라보고 서 있다. 무엇을 붙들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한 곳을 향해 이끄는 춤의 힘으로 잠시 춤이 날았다. 음악과 춤의 표상이 가장 잘 드러난 이미지. 이어 음악처럼 춤춘 여섯 명의 남자들의 춤도 근사했다.

 



최두혁 〈라흐마니노프로부터 달려가는 조금 복잡한 휴식의 버전〉



다시 흰색과 검정색(의상)의 남자와 여자 네 명, 그리고 빨간색 풍선 줄을 든 여자. 그림씨 작품 같은 이미지다. 70여 명이 추는 춤으로 꽉 찬 무대. 그들의 모든 춤을 보겠다는 마음을 (턱)내려놓고 무대를 본다. 한 이가 춤을 추다 사라지면 다시 다른 이가 그 자리를 채운다. 남는 것은 춤을 추던 그 자리로서의 공간과 흔적 뿐. 풍선을 든 여자를 무용수들이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린다. 무대를 한참 이동, 여자를 내려놓자 여자가 풍선을 자신의 셔츠 안에다 집어넣는다. 풍선(을)이 밀고 나온 배. 맥락 없는, 무질서의 춤이다. 무질서는 질서의 거울이기도. 그렇다고 해서 최두혁이 작은 무질서를 버리고 큰 춤의 질서 속으로, 다시 말해서 죽음과 막막한 소멸의 평화 속으로 도피하는 음악을 춤으로 그대로 그려 보인다고 할 수 없다. 질서와 평화의 말은 늘 단순하다. 춤은 춤이고 음악은 음악이다. 아니 춤이 음악이고 음악이 춤일런가.

 



최두혁 〈라흐마니노프로부터 달려가는 조금 복잡한 휴식의 버전〉



애티튜드. 뒤로 다리를 들고 접었다가 다시 내린다. 태도. 음악이 가지고 있는 격조에 춤동작이 빛난다. 최두혁의 춤 형식, 군무진이 사라졌다가 하나 둘 다시 등장하며 군무로 이야기를 다시 끌어간다. 음악이 군무(베토벤)를 받쳐준다. 베토벤 음악의 정신은 희망이다. 그것도 확실성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남자의 솔로. 검정의상을 입은 작은 몸집으로 추는 춤이 꽤 단단하다.

흰색의상의 군무진, 검정색 의상의 솔로, 때로 검정색 그룹 안에 흰색 솔로로 나타나는 춤. 마치 피아노 건반 같은 춤의 배치, 대비효과가 크다. 그런가하면 음악과 춤의 배치는 솔로 다음 군무, 다시 여자 솔로가 춤을 받아내고, 여자 춤이 군무로 다시 여자 솔로가 춤을 보여주는 형식. 춤이 마치 현악기의 부딪힘과 같이 나타난다. 안무자(최두혁)의 클래식 음악이해의 깊이를 알 수 있는 춤 이미지다. 최두혁은 (베토벤 음악)희망을, 즉 미적으로 출현하는 것을 미적 가상의 건너편에서 그려낸다. 춤으로 희망을 그려내는 것이 가상의 건너편에 존재하는 것, 이것이 음악과 춤의 미적인 내용이기도.

 



최두혁 〈라흐마니노프로부터 달려가는 조금 복잡한 휴식의 버전〉



최두혁의 작품을 보다 보면 누군가(때로 자신이) 무대를 관조하거나 깊은 감정을 표현하는 걸음으로 나타난다. 이때 이미지로 툭 던져놓는 그 걸음의 의미를 정확하게 짚어 내거나 유추하기가 쉽지 않다. 춤과 춤의 개념적 논리의 관계규정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그렇다고 춤과 개념이 춤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매개를 통해서, 즉 음악과 철학으로써 말할 수 있음의 의미이기도.

결국 춤을 구체화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힘(춤몸, 춤철학)이다. 이러한 힘과 함께 춤의 형식들은 춤에 훨씬 선명하게 나타나기도.

 



최두혁 〈라흐마니노프로부터 달려가는 조금 복잡한 휴식의 버전〉



〈라흐마니노프로부터 달려가는 조금 복잡한 휴식의 버전〉의 ‘장면 이미지’를 옮겨본다.

  함께 해야 하는 것
  프롤로그

  계속되는 선택의 시간에도

  삶을 계속된다.

  ​인생은 어디가 앞인지

  ​알 수 없지만 실재함으로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빛난다.

  에필로그


갓 조명 아래서 홀로 추는 남자의 춤. ‘어디가 앞인지’ 알 수 없는 인생의 황량함을 서정적 춤으로 잘 그려낸 이미지로 작정하고 의도한 것으로 보이지 않으나 안무자 최두혁의 정서를 무용수가 잘 그려냈다. 춤이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최두혁 〈라흐마니노프로부터 달려가는 조금 복잡한 휴식의 버전〉



일곱 명이 추는(흰색의상 6명, 여자 한 명의) 동요, ‘꽃밭에서’(바이올린 선율). 춤과 음악이 지나간 시간을 소환. 에필로그, 71명의 무용수가 모두 무대에 오른다. 자유롭고 느리게 혹은 아름답게 추는 춤. 지나간 시간의 춤, 축적된 현재의 춤, 그리고 이후 대구 현대춤을 한 눈에 전망할 수 있는 무대였다. 안무자(최두혁)가 짊어진 (춤)짐이 무겁다.

최두혁의 〈라흐마니노프로부터 달려가는 조금 복잡한 휴식의 버전〉. 전체적으로 춤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잘 드러난 작품으로 감각적이었으나, 깊이 있게 발전하지 못한 점, 매개된 음악은 좋았으나, 결국 춤 전체를 움직이는 것은 춤몸(동기)과 춤철학(주제)이라는 점. ‘조금 복잡’하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공부했다.​​​​​

2024. 1.
사진제공_최두혁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