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대구출신 두 중견 무용가(주연희· 편봉화)의 전통춤 무대가 있었다. 공교롭게 두 무용가 모두 30여년이 넘는 시간을 한 스승의 춤을 익히거나, 주역으로 무대작업을 해온 이들이다. 이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스승의 춤(류)으로만 레퍼토리를 구성, 그것도 오롯이 혼자 추어낸 무대, 생각할 거리다.
주연희의 〈한영숙류 이애주 춤 本〉
스승이 자신의 춤에 어떤 흔적을 남겼더라도, 스승이 떠난 뒤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그 흔적을 밟더라도, 춤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선 곳에 있는 듯, 춤만 보고 걸어온 오랜 시간이 축적된 그 시간은 춤을 추는 동안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마치 시간이 사라지는 자리처럼 보이는 춤 무대였다. 주연희의 춤을 본다.
주연희 〈태평무〉 ⓒ주연희 |
〈한영숙류 이애주 춤 本〉(포스트극장, 12월 4일)은 〈태평무〉를 시작으로, 윤심덕의 ‘사의 찬미’(노래 이정표)와 스승이 자주 불렀다는 ‘빈산’(김지하 시, 이종구 작곡), 그리고 〈살풀이〉에 이어 완판 〈승무〉까지. 춤은 담담함 속에 강단이 보이는, 묵직한 춤이었다.
‘이애주한국전통춤회’ (전)회장이었던 주연희의 이력에서 이애주선생과의 오래된 춤 인연을 짐작한다. ‘춤은 살아가는 몸짓이고, 살아온 몸짓이고, 살아갈 몸짓’이라 한 스승의 말을 되새기며 “맺지 못하고 놓지 못한 것들을 풀어...참사람으로서” 춤을 추고자 한다는 팸플릿의 짧은 인사말에 많은 상념이 읽힌다.
차분하게 춘 태평무에 이어 가야금 반주에 노래한 ‘사의 찬미’는 관객들을 일제강점기 때의 경성의 거리 어디쯤에다 훅 데려다 놓는다. 끝을 흔드는 (창가)창법은 마치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같기도. 이어지는 ‘빈산’. 살풀이의상을 입은 주연희가 노래의 배경처럼 고요하게 서 있다가 장구가락이 붙자 춤을 시작한다. 전통춤 공연에서 보지 못한, 의미와 미감을 동시에 담아낸 세련된 연출이었다.
주연희 〈살풀이〉 ⓒ주연희 |
춤은, 춤을 추는 자신을 비우고 마치 스승을 영접하는 듯. 고요히 머물러 있다가 뒤로 몇 발짝 물러나며 너울너울 머리 위로 수건을 던지고 뿌린다. 절대적인 어떤 것을 향한 몸짓처럼 보이는, 몸을 흔들거나 교태와 과한 애상이 없는 깨끗한 춤이다. 장단변화에도 표정변화 없이 담담하게 가락을 받아내는 춤은. 영접할 수 없는 것을 영접하기 위해 오히려 영접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아폴로적인 춤이라고 할까.
주연희 〈승무〉 ⓒ주연희 |
마지막 40여분의 완판 〈승무〉. 추는 것도, 한자리에서 춤을 지켜보는 것도 쉽지 않은 시간이다. 영상 속, 생전의 이애주선생이 승무 춤해설을 하고 있다. ‘춤은 사상이자 철학이자 삶의 몸짓’이라는, 더불어 주연희의 공연(2019년)을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의상을 갈아입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말을 길게 하고 있다는. (영상)이애주선생의 퇴장과 동시에 무대에 대북이 들어오고, 주연희의 춤이 시작된다. 다시 2023년, 지금 무대상황과 흡사하게 맞아 떨어지는 영상연출이 주는 데자뷰.
느리게 연주하는 악사들의 염불장단이 구도하는 듯 엎드려 있는 춤의 침잠을 거든다. 보일 듯 말 듯 들고 내리는 호흡, 앉아서 빙그르르 돌며 추는 어깨춤사위가 점잖다. 춤을 출수록 기운을 받아 덩실 추어올리는 춤에너지로 극장이 춤으로 넘실거린다. 춤을 추는 시간이 흐를수록 춤이 느는(에너지가 충전되는) 희한한 현상. 한바탕 결전을 치를 듯 북을 어르는 북 놀음에 이어진 유려한 북장단이 이어진다. 팔을 휘두르며 전투하듯 북을 두드리는 춤사위는 한영숙류보다 거침없는 이애주선생의(류) 춤에 더 영향을 받은 듯하다.
주연희의 〈한영숙류 이애주 춤 本〉은 ‘춤몸’으로 체험한 절대의 마음공부를 춤의 형식으로 풀어놓은 하나의 텍스트 같은 춤판이었다. 그에게 있어 춤(이수) 공부의 어려움이 절대적이었던 만큼 아마도 마음공부도 춤처럼 절대적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한 스승을 모시는 그 절대적인 성의의 힘으로 춤으로 지녀야 할 마음의 자세를 성찰하고, 그것을 춤을 추는 ‘춤몸’으로 감지하는 경험 말이다.
주연희는 간혹 ‘빈산’을 부르던 스승에게서 인간적 고뇌와 슬픔을 읽었을지도. 마지막까지 스승의 곁을 지켰으나 스승의 춤(뜻)을 이어간다는 일에 있어 해소되기 어려운 긴장 관계가 없지 않아 보인다. 이 간극은 저 부정의 힘들에게서 파악하게 되는 그것에 못지않게 치명적일 수도. 온전하게 스승의 뜻을 받들기 위해 마음을 다하고 애쓰는 이의 발걸음이 만류하려는 힘에 걸려 자꾸 비척거린다. 스승의 부재에 따른 결여의 겉껍데기들을 하나씩 벗어버리면서 나타나지만, 아니 실은 그 허물들 속으로 사라지지만, 주연희의 춤에서 읽히는 그 결함 있는 흔적과 파편들이 서로서로 그 결함을 보충함으로서 그 거대한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다. 하여 이 작은 요소들의 부단한 협력관계가 스승의 절대적인 힘을 상대적인 너울들로 가리기도 하는.
‘빈산’의 한 구절을 옮겨 본다.
“...(중략)
한 줌 흙을 쥐고 울부짖는 사람아
네가 죽을 저 산에 죽어
끝없이 죽어
산에
저 빈산에 아아
불꽃일 줄도 몰라라
내일은 한 그루 새푸른
숲일 줄도 몰라라.”
스승이 춤으로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겼더라도, 그 스승이 자신의 ‘춤몸’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주연희는 춤은 인간을 넘어선 곳에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 마음을 그대로 그려 보여준 무대였다.
누가 ‘아무도 더는 오르지 않는 빈산’이 되길 바라는가?
〈편봉화의 옛 춤〉
편봉화(구미시립무용단 훈련장)의 전통춤 〈편봉화의 옛 춤-시간의 춤-〉(봉산문화회관 스페이스 라온, 12월 6일)을 본다. 그동안 주로 한국창작춤 작업에 천착해왔던 무용가가 스승 장유경의 전통춤 레퍼토리로 그것도 오롯이 홀로 추겠다는 프로그램에 눈이 갔다. 주역무용수로 스승 장유경(전 계명대교수)과 작업해온 오랜 시간에 값하는 어떤 보편적 가치를 ‘옛 춤(장유경류)’이 지니고 있는지, 그렇다면 그 힘은 어디서 오는지 살펴본다.
편봉화 〈입춤〉 ⓒ옥상훈 |
고 김소희선생의 구음에 춤을 얹은 〈입춤〉(장유경류)의 아름다움과 그 춤적 가치는 현실에 천착하면서도 거기에 붙잡히지 않고, 삶을 흔들어대는 고난의 무지막지한 힘을 오히려 춤적 서정의 원기로 삼으려는 춤의 의지를 은유하는 데 있다. 편봉화의 〈입춤〉, 여리지만 단아하게 추어냈다. 예전 우리네 어머니들이 입었음직한, 자잘한 꽃무늬가 직조된 비단 옥색 치마저고리를 입었다. 소맷부리에서 수건을(짧은 길이의 흰색) 꺼내 들고 돌면서 상체를 깊이 내렸다가 자진모리장단에 살짝 미소를 짓는다. (미소는) 원춤(장유경)과 다른 정서의 표현이다. 뒤로 물러나 수건을 목에 걸고, 두 팔을 양옆으로 떨어트리고, 시선을 바로 든 채 제자리에서 장단을 받아 낸다. 곧은 상체에서 느슨한 정서의 장식이 걷힌다. 속절없는 감정을 잘 다스려 풀어낸 뒤의 초연함과 여유를 잘 풀어내 춘 춤이었다. 편봉화의 춤 상태와 심경이 일치되는, 음악에서 북돋은 감정 하나를 추슬러 올리는 순간이기도.
편봉화 〈소고춤〉 ⓒ옥상훈 |
〈소고춤〉 달성권번과 대동권번의 박지홍의 춤이 권명화 선생에게로, 그리고 최근 장유경에 의해 재구성된 작품으로 짙은 청색치마와 녹색저고리. 미소를 띠며 앉은 사위에서 두 팔로 소고와 채를 든 손을 턱 바닥을 짚은 맺고 어르는 동작에서 흥이 번지나, 살짝 힘에 부쳐 보였다. 검박하면서도 재기가 넘치는 춤 구성이 도드라진 춤이었다.
김현태 〈지게춤〉 ⓒ옥상훈 |
우정 출연한 김현태(계명대교수)의 〈지게춤〉. ‘장유경의 초등학교 시절 사진을 보고 모티브를 얻어 창작한 작품’. 흰색의상에 맑은 분홍색 조끼를 입었다. 흥을 실어 추는 맨손으로 추는 춤이 좋았다. 뒷부분에 마치 농주를 한 잔 걸친 듯, 시종일관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 비틀 툭, 호흡을 조절하며 추는 춤에 위트와 여유가 넘쳤다. 고정된 춤은 없다. 갇혀있지 않으면 풍성해질 것이다. 저고리 동정과 소매 끝단에 (반짝이)스팡클을 붙인 의상에서 시간의 축적을 확인한 김백봉류의 〈부채춤〉. 옛 정서를 화사하게 소환한 춤이었다.
편봉화 〈선살풀이〉 ⓒ옥상훈 |
마지막 〈선살풀이〉(장유경류). 이미 대구 전통춤판에서 많은 추고 있는 신전통춤으로 ‘선살풀이’가 가진 춤의 미적형태와 구조에 대해서는 지면을 통해 언급한 적이 있다. 춤에 과한 애상과 교태미가 없고, 치마를 부풀려 입지 않는 것이 장유경류(전통) 춤의 특장점인, 특히 ‘선살풀이’는 편봉화만의 고운 춤태가 선명하게 빛을 발하는 부분이 있는 춤으로, ‘선살풀이’춤이 가진 미감과 정서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춤태를 가지고 있다. 뒷짐을 지고 좌우로 흔들며 걷는 걸음새의 얌전함 등 춤선이 고운 대신 다소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기에 여린 기운은 춤날을 벼리듯 벼려야 할 요소다. 부채로 천을 감았다가 풀고, 날리는 동작이 힘을 얻고, 그 힘이 다시 춤추는 몸의 상승에 가속력이 붙는 편봉화의 춤. 이때 뜻하지 않게 얻어지는 춤의 은유들,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살(귀신)이라 규정한 정서를 꿰뚫어 보고, 보는 이의 감정을 자극하는가 하면 춤을 추는 이와 보는 이 모두를 위로하고 정신을 재촉하기 위한 수단이며 그 결과다. 부채로 천을 감았다가 풀어가는 중간 과정의 춤 구성이 한층 촘촘해지며 전체적으로 춤의 격이 달라졌다. 신전통춤이 가진 특장점인 춤의 진화라 하겠다.
편봉화의 ‘옛 춤’은 춤을 추는 내내 감정을 잘 추슬러 올리는가 하면 고양된 정신 속으로 춤을 한껏 추켜올렸다. 이번 춤판으로 혼자 춤출 용기를 얻고, 춤적 힘을 발견하겠다는 말과 다른 말이 아니다. 용기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춤 정신의 날을 세우고 춤 지성에 두께를 더하는 일이기도. 앞으로 감정을 충전하고 온 힘을 다해 스승의 춤으로 스승보다 더 높이 솟아올라야 하는 것은 편봉화 자신의 ‘춤몸’이다. 이 ‘춤몸’의 용기와 함께 춤은 몸을 타고 솟아난다.
대개 ‘~류’의 전통춤은 누구의 무엇이라는, 견고하게 규정되는 것으로(때문에) 그 힘을 행사한다. 춤으로 행사하는 이 힘과는 다르게 춤에 (예술로서)힘이 실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무엇이라 규정되지 않는, 화석처럼 굳어 있지 않는, 갇혀지지 않는, 가두어질 수 없는 자유로운 춤 정신에서 발현되는 춤의 생명감과 그 춤감각을 접수하는 ‘춤몸’이 따로 놀지 않고 만들어지는 독창성을 띤 춤이 아닐까. 춤이 가진 힘의 여부와 분별, 그 시작은 어떤 춤사위로 어떻게 춤을 추었고, 그 춤이 다른 춤과 어떻게 차별되는지 보고 따지고 의미를 파악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터.
편봉화의 장유경류의 ‘옛 춤’(신전통춤)에 대한 논의도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많은 논의의 생성이 필요한, 생각할 거리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공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