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몸이 얼마나 창조적인 생성능력을 가지는가? 또는 얼마나 다양한 변이능력을 가지고 있는가?의 기준은 춤추는 몸의 욕망에 있다. 춤추는 몸의 욕망이란 어떤 활동을 하기 위해 만나고 접속하는 신체들에 속하는 것이고, 그 신체들을 접속하여 작동하게 만드는 요인이며, 그러한 작동을 통해 무언가를 생산하는 결정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욕구로서의 욕망이 아닌 어떤 신체들이 접속하여 에너지나 힘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게 하는 생산적 능력이다. 따라서 춤추는 몸의 욕망은 새로운 춤을 생산하고 창조하려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올해로 14회 째에 이르는 서울국제즉흥춤축제(Simpro)와 연계, 4월 16일부터 17일까지 대구예술발전소 수창홀 등에서 열린 첫번째 대구즉흥춤축제(Dimpro, 공동예술감독 유연아 장광열)는 이후 회가 거듭될수록 지방 춤의 스펙트럼을 넓히게 될 것이다.
4월 17일 공연은 2개의 듀오 즉흥과 6명의 무용수들이 출연한 컨택 즉흥 공연으로 짜여졌다. 첫 번째 무대. 실비 노바(Sylvie Nova)와 엠마누엘 그리베(Emmanuel Grivet)의 듀오. 실비 노바(프랑스), 이 무용수의 이력이 이채롭다. 항공기술자이며 중국의학을 공부한 현재 초등학교 교사. 아마도 춤은 그녀가 사유하는 몸의 또 다른 이력인 듯. 엠마누엘(프랑스) 역시 맑고 고요해 보이는 눈빛과 움직임에서 춤이 그의 몸에 어떻게 내재되어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무대 안쪽 벽면, 무용수들이 드나드는 두 개의 문. 문을 열면 공간연결을 위한 복도, 열린 문 사이로 새어 나오는 형광등 불빛. 그 문을 여닫으면서 공연이 시작된다. 실비와 엠마누엘은 같이 또 따로 조용히 걷는 등의 일상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 복도 쪽에서 문을 열고 어두운 객석 쪽을 내다보다가는 문을 닫는다. 조용히 걸어 나와 팔을 들었다 내리는 등의 움직임, 작은 숲속 어디쯤엔가 서있는 듯 평화롭고 고요한 움직임이다. 이들은 바람과 친숙하다. 태양하고도 똑 같이 친하다.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는다. 자신을 사로잡는 것은 무엇이든 춤으로 그려낸다. 그러면서 행복해한다. 아니 춤을 추는 동안에는 행복한 상태에 있을 거라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렇게 보였다. 문이 닫히고, 조명이 꺼진다. 사색하는 듯, 고요한 즉흥이었다.
두 번째 무대. 후드 티셔츠를 입은 남 녀 무용수(Sonea & 표상만), 여자의 움직임과 동선을 따라하는 남자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진다. 자신을 따라다니는 남자에게 여자는 따지듯 묻는다. “넌 누구니? 왜 따라다녀? 미친 거 아냐?” 등의 대사를 쏟아내곤, 대답 없이 미소만 짓는 남자를 피해 한바탕 무대를 달리고 쫓는다.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움직임에 젊은 관객들의 웃음이 쏟아진다. 타자는 나의 가능세계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거나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동요한다. 그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요를 통해서, 타자는 나의 가능세계가 된다. 나와 타자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나의 세계가 새롭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의 발전과정을 보여준 움직임이었다. 마지막 마주보고 앉아 악수하는 것으로 시작된 접촉은 손, 팔, 몸으로 이어지며 관계의 면을 넓혀간다.
세 번째 contact 즉흥 무대. 실비 노바와 엠마누엘 그리베, 한국 무용수로 우혜영, 손영민, 박정은, 설의현이 같이 움직인다. 무용수들이 자연스럽게 출입구, 혹은 객석에서 무대로 이동하면서 공연이 시작된다. 탐색하듯 흩어져 벽에 기대거나 무대바닥에 가만히 앉아있다. 손영민은 공연 내내 의상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며 관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팬티만 입고 등장하는가 하면 어느 사이 머리를 묶은 수트차림이다. 실비와 엠마누엘의 움직임은 즉흥이 어떤 장르인지, 어떻게 움직이는 것인지에 대한 모범 답안을 보여준다. 무대, 같은 공간에 있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애써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움직임을 모두 감지하고 있는 듯, 자연스럽게 춤의 흐름을 이끈다. 언제 가만히 있어야 하며, 어느 틈을 비집고 들어가 상대의 움직임을 끌어내야 하는지, 공감과 배려, 몰입과 흩어짐, 긴장과 이완의 움직임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노련함이 있다. 마치 공부하듯 움직이는 박정은, 발레전공자 특유의 동작에 치중한 우혜영, 또 ㄷ자른 남성 무용수 설의현은 40여분의 시간 중, 중반 이후부터는 집중력이 떨어지는 듯 보였다. 무대에서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무대 강박증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다. 즉흥접촉이지 않나. 접촉할 수 있는 교감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굳이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즉흥접촉이니까 접촉이 일어날 수 있는 교감을 교환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 또한 무용수의 필수요건이지만. 어쨌든 일어나지 않은 교감을 관객을 이용해서 분위기를 전환해보려는 것, 생각 없이 거듭하면 재미없다.
공교롭게 ‘대구즉흥춤축제’ 공연이 시작되는 날, 세월호 사고가 일어났다. 이튿날이 되어도 아무도 배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갇혀있을 많은 아이들 생각에 가슴이 저몄다. 즉흥춤이니까. 아무것도 미리 짜인 것은 없으니까. 즉흥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무용수들 중 누구 한 사람쯤은 이런 상황을 애도하는 춤을 추지 않을까. 아니, 한 사람으로 비롯된 춤이 연쇄작용을 일으켜 공연장이 슬픔으로 출렁이지 않을까. 내심 바라고 기대했다. 아무도 추지 않았다. 우리 무용수들의 의식이, 사회성이 서운했다. 들뢰즈는 타자라는 존재가 우리의 삶에 불가피하게 들어온다고 말한다. 우리가 실제로 지각하는 세상이 전체 세계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 삶은 타자가 존재하지 않으면 모두 조각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타자는 나의 조각난 세계를 보충해 줌으로서 전체 세계가 실재하게 된다고 말한다. 타자와의 차이를 감내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타자의 낯섬과 가능 세계를 받아들이고 변할 수 있는 힘은? 즉흥춤을 추기 위해, 춤추기 전에 고민해봐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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