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호 춤인생 50년을 기념한 <춤의 귀환> 공연(3월 5-7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은 프로그램이 3일간 각각 다르게 펼쳐진 근래 보기 드문 우리춤의 ‘큰 잔치’였다. 65세란 그의 나이는 요즈음 우리춤의 원로들이 대부분 80세를 넘기고 있기에 그리 많은 나이라 할 수 없지만, 그가 전주농고 1학년인 15세 때 춤에 입문, 국립무용단ㆍ서울예술단ㆍ중앙대ㆍ디딤무용단 등을 거쳐 살아온 그 인생 여정은 우리의 직업무용단사(史)와 춤의 교육현장을 관통하고 있기에 예사로운 삶의 여정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무용계를 벗어나 연극계ㆍ국악계와 같은 이웃 예술계는 물론 인문지성계와도 긴밀한 인적 관련성을 맺으며 스스로 성장ㆍ변화해왔기 때문에, 그의 삶은 어떤 측면 동시대의 한국공연예술사 전체와도 관련된다 하겠다. 따라서 거의 공연은 개인적 자축(自祝)의 차원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공연예술계와 그를 둘러싼 문화지성계에도 깊이 음미해볼 만한 것을 주었다.
그는 이번 공연에서 크게 두 가지를 꾀했다. 하나는 자신 춤여정의 3기(期)─‘집단 총체무’에서 ‘스펙터클한 무용극’의 시대를 거친─에 있어서 그간 틈틈이 불연속적으로 발표한 여러 소품적 레퍼토리를 이번에 몇 편의 신작(新作) 발표와 함께 묶어 프로그램화해 본 것이고, 두 번째는 우리춤 예술에 맞는 공간디자인을 무대미술가 박동우와 함께 설계ㆍ제시하면서 그의 말처럼 악ㆍ가ㆍ무(樂·歌·舞) 일체의 예술적 협업을 어떤 정형화된 틀〔形態·形式〕 속에서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전자를 위해서 그는 근래 여러 전통춤 관련의 기획공연에서 보여주었던 <장한가> <남무> <아가(雅歌)>(<부채 산조─아가>) <입춤> <남도 살풀이> <신무> <바라 승무> <기악천무> <구정놀이>에, <리어 왕>에서 모티브를 얻은 창작무 <고독>, 판소리 <적벽가>를 활용한 남성 2인무 <용호상박>, 그리고 담담한 춤의 향취를 담은 <금무(琴舞)>를 새롭게 덧붙여 보았다. 후자를 위해서는 마치 우리의 널찍한 대청마루나 경복궁 안 경회루를 연상시키는 열린 마름모꼴의 공간을 따로 디자인해서 무대 위에 설치했다. 특히 첫째 날 공연에서 자신의 춤과 함께 김영재의 거문고 연주, 그리고 그와 여성 소리꾼 안숙선의 소리와 춤이 어우러진 흥취 있는 공연을 보여주면서 마치 20세기 초 우리의 첫 현대식 극장이었던 협률사나 원각사에서 보여주었던 것과 같이 전문적 기예를 가진 무자(舞者)ㆍ창자(唱者)ㆍ연주자(演奏者)들이 자연스럽게 흥겹게 어울려 드는 ‘멋과 흥취감이 밴, 한 즐거움의 모임(연회 혹은 가회)’의 모습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프로그램에 언급된 그 자신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공연예술, 좁게는 극장예술은 그간 천편일률적으로 서구식 프로시니엄 무대 공간이나 일본식 집회강당(공회당)과 같은 공간에 공연물을 맞추어왔다. 여기서 프로시니엄 무대는 조명 등 인공적 표현 도구를 이용하면서 시각적 볼거리와 그에 따른 깊은 원근감을 조성하기 때문에 한국춤과 같이 비교적 좁은 공간에서, 관객과의 친밀스러움과 자연스런 교감을 목표로 하는 춤예술 형태와는 구조상 잘 맞지 않고, 더불어 직사각형의 큰 강당식 집회공간(다목적성을 띤)─세종문화회관과 국립극장 대극장이 대표적 예다─은 공연자의 움직임에 부자연스런 무리를 일으키면서 시ㆍ청각적 초점 모으기가 힘들게 된다. 따라서 그 두 공간형태 모두 한국춤을 위해서는 ‘맞지 않는 집이나 옷’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반면, 예술 간의 협력의 방법 즉 악ㆍ가ㆍ무의 어울림에 있어서도 어떤 영역이 주(主)가 되거나 부(副)가 되는 종속(융합)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 공존(共存)을 하면서 나름대로의 상생(相生)하는, 바꿔 말해 ‘병존(竝存)의 관계’가 더 우리다운 문화일 수 있다. 지난 1970년대나 80년대에 M. 커닝햄의 춤과 존 케이지의 전자음악, 때로는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같은 무대미술가들의 실험 공연에서 보듯 어떤 개별적 예술성은 유지하면서 상황에 맞게 즉발적으로 어울려 드는 행위가 그와 유사할지 모른다. 여하튼 이번 공연은 그 같은 한국춤, 더 나아가 한국공연예술이 근본적으로 부딪히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말이나 이론이 아닌 실천적 예술작업을 통해서 ‘한 모형(模型)’을 제시해봤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박동우의 무대디자인은 좀더 많은 생각을 갖고 그 적절성을 평가ㆍ음미해보아야 한다).
첫째 날 공연은 그의 <장한가>와 <남무>, 그리고 신작 <고독>과 <용호상박>이 올려지면서 김영재의 신쾌동류 <거문고 산조> 연주와 예측하지 못한 연주자(김영재)의 즉흥춤, 그리고 안숙선의 창 <사랑가>와 맞춘 국수호와 안숙선 간의 2인무가 춰졌다. 이 중 모두 남성무의 무풍(舞風)을 갖는 <장한가>와 <남무>는 근래 그가 가장 많이 추고 있는 춤으로, 스타일상 신무용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나로서 ‘전통재구성무’나 ‘신전통무’라 부르고 싶다. 두 춤 모두 한량무를 모티브로 하면서도 무심(舞心)의 깊이에 있어서 <장한가>가 다소 의상에 있어서 격식을 갖춘 가운데 사대부 선비의 어떤 억눌리고 그늘진 감성을 보여주고 있다면, <남무>는 보다 자유스런 복장으로 마치 따뜻이 열 오른 평지를 흥쾌히 밟고 원형으로 맴도는 듯한 풍무(風舞)의 모습을 더 보여준다. 더불어 <장한가>가 한 남성의 억눌린 근기가 어느 순간 호쾌하게 폭발하는 듯한 춤이라면, <남무>는 대지의 기(氣)를 심호흡하듯 빨아들이면서 일상 속 자연과 함께하는, 남성의 자족적(自足的)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춤이라 할 수 있다. <장한가>에 사용된 박갑득류 음악이나 <남무>에 사용된 남도 계면조 모두 저음(低音)을 깔면서 크게 상승하는 리듬감을 갖고 있음에 따라 국수호의 춤동작도 하체의 굴신이나 큰 보폭의 이동이 두드러졌다. 일견 <처용무>에서 보는 듯한 굵은 하체 동작과 비슷한 움직임이 두 춤 모두에서 크게 돋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전자를 ‘심무(心舞)’, 후자를 ‘기무(氣舞)’라고 칭하고도 있다. 한편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에서 모티브를 얻은 <고독>은 그의 창작무인 <면암의 명상>이나 재구성무 <신무>와 같이 근본적으로 삶의 비극ㆍ비애와 연관된다. 조명과 뒷배경 처리에 의해 깊은 공간감을 조성한 가운데, 검은 무채색의 의상과 의관을 갖추고 느린 움직임과 고개 숙인 몸짓으로 무엇인가 상실의 감정과 회고의 모습을 보여주려 한 이 춤은 춤꾼 자신의 자화상(自畵像)인 듯 진중하고 스산한 그림자 같이 내게 다가왔다. 아마 이 춤은 그의 춤극 <오셀로>와 같이 보다 큰 작품 (가칭)<리어 왕>을 위한 한 ‘주제 춤’이나 ‘서무(序舞)’로 만들어진 듯도 싶다. 그런 중에 이번 공연에서 예기치 않게 큰 춤보기의 재미를 준 공연은 <용호상박>으로, 이 춤은 두 남성춤꾼 즉 이정윤(국립무용단 수석)과 국수호 간의 남성 2인무로 무대 뒤편에 앉아 북을 치며 창을 하는 네 명의 남성 창자(唱者)의 노래─판소리 <적벽가> 중 ‘조자룡의 활 쏘는 대목’─를 춤으로 극화(劇化)하면서 노(老)·소(少) 간의 서로 다른 에너지의 충돌을 긴장감 있게, 또 유머러스하게 펼쳐 보여주었다. 따라서 일견 ‘판소리춤’ 혹은 (국수호의 표현으로는 넓게는) ‘춤극’의 또 다른 형태라고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듀엣은 ‘남녀 간의 사랑춤이다’란 등식화된 생각을 여지없이 부숴버린 이 춤은, 설명적 몸동작이 적재적소에 스며들면서 상징성이 강한 일반적인 한국춤과 ‘다른’ 모습으로 공연 내내 관객과 흥미를 같이 했다. 그런 가운데 이정윤의 에너제틱한 입체감 나는 몸짓과 달리, 공연에서 국수호의 춤은 그와 동일한 병진적(竝進的) 리듬을 타되, 종종 그의 후경(後景)에서 힘에 부친 듯, 그러나 기꺼이 함께 동행하며 우화적 감각이 곁들어진 여러 삶의 고비들을 넘어가는 듯했다. 결코 값싸지 않은 해학성 섞인 움직임의 격(格)과 유머를 보여주면서, 두 캐릭터 간 상호 마음속의 이야기와 춤을 주고받는 일견 수수지례(授受之禮)의 ‘예무(禮舞)’를 어느 때보다 명징하게 보여주려 했던 이 공연은, 중국 경극(京劇) 속에서 보는 과장된 제스처, 일본 노(能)에서 보는 부자연스런 몸짓과 확연히 차별되는 우리만의 매우 흥미롭고 인상적인 ‘춤놀이’이기도 했다. 무대 후면에 위치해 있었던 네 창자(唱者)들의 소리가 더 명확히 전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 작품은 이 공연 속 최대 수확이었고, 어쩌면 이 작품으로 국수호는 또 다른 예술적 명성을 얻게 될지 모른다. 그런 가운데 맑은 거문고 소리와 함께 흥취감 나는 담백한 춤짓을 공연 중간에 돌연히 보여준 거문고 연주자 김영재는 우리 판 어울림의 예측불허성을 보여주면서 또 다른 공연보기의 재미를 더했고, <사랑가> 창과 어우러진 안숙선ㆍ국수호 간의 춤은 예인들 간의 끈끈한 인간적 정취를 보여주었다.
이어서 둘째 날과 셋째 날에 보인 춤 중 박병천의 구음이 섞은 남도 시나위 가락을 탄 국수호의 <남도살풀이>, 애제자 노해진이 춘 <아가>, 박금슬로부터 물려받은 국수호의 <바라 승무>는 모두 앞서 언급한 <장한가>나 <남무> 못지않은 춤으로서 춤의 매력과 구성을 각각 갖고 있었다. 우선 국수호 자신이 춤춘 흰 의상을 입고 흰 천을 들고 춤춘 <남도살풀이>는 백색의 정갈함 속에서 어떤 삶의 애환과 액운(厄運)을 날려버리듯, 곧 삶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이의 초탈한 심정을 일견 구슬프게 보여주고 있었다면, <아가>는 남성춤에서 잘 볼 수 없는 매끄러운 춤의 속도감과 탄력성, 그리고 춤움직임의 매듭(마디)를 공연자(노해진)가 선명히, 또 색채감 짙게 보여주면서, 여성의 마음속에 깊게 담아놓은 정서를 김죽파류의 가야금 산조에 맞춰 우아하면서도 날카롭게 펼쳐 보여주었고, 또한 박금슬로부터 이어받고 있는 <바라 승무>는 승무의 한 맥이 또 다른 계통에 있음을 뜻깊게 시사했다. 특히 승무와 관련,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이매방류 <승무>는 다소 세속적 감정을 춤에 실어보는 것이라면, 바라를 들고 추는 <바라 승무>는 종교적(불교적) 체취가 더 진해보였고, 또 그런 만큼 탈속적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국수호는 그 춤에 다소 신비스런 진중함과 의식성을 더 짙게 가미하려 했다. 한편 이번 초연작이기도 한 <금무>(琴舞)는 채향순ㆍ전순희가 각각 추면서 춤의 움직임상 큰 변화가 없는 가운데, 대신 깊은 공간감과 은근한 춤태(態)의 멋을 풍기려 했다. 배경에 투사되기도 했던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의 시는 진정한 멋, 혹은 미는 무색(無色)·무성(無聲)의 경지임을 얘기하고 있는데, 어쩌면 이 춤 또한 그것에 가닿으려 한지 모르겠다. 특히 채향순의 낮게 가라앉는 듯하면서, 은근하고 속 깊은 정취를 보여주었던 춤태는 어떤 외압에도 흔들리거나 쉽게 눈 돌리지 않는 나름대로의 춤의 중심과 자족의 멋을 담고 있었다. 국수호의 중견 제자들이거나 그로부터 영향받은 이들인 이경수가 춘 <남무>, 김평호·정란이 춘 <장한가>, 이미숙이 춘 <입춤>, 황재섭이 춘 <신무>, 조경아가 춘 <태평산조>, 그리고 요고를 든 고구려 춤 <기악천무>(박수정 등 여성 군무)와 역동적인 남성 5인의 북춤 <구정놀이>들도 프로그램상 변화를 주면서, 국수호의 춤의 맥이 어떻게 이어질지, 그리고 그 춤들이 갖고 있는 동양미가 깃든 엔터테인먼트성을 어떻게 살려 나갈지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할거리를 주었다 하겠다.
그 외 원로 무인(舞人)들인 김매자의 <숨>, 배정혜의 <풍류장고>, 김광순의 <예기무>, 정인삼의 <소고춤>과 김무철의 <한량무>도 모두 이 춤잔치에 기꺼이 찬조 출연하면서 이 공연의 뜻깊음과 풍요로움을 도왔다.
*<공연과 리뷰> 84호(2014년 봄) 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