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무용단은 시즌 프로그램의 주제를 ‘역사와 기억’으로 정하고 우리 현대무용의 역사와 기억을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현대무용의 현재성을 찾아가겠다고 나름의 이정표를 세웠다. 그리고 그 첫 출발로 안애순의 2009년도 작품인 <불쌍>(3월 21-22일, 토월극장)을 개작하여 올렸다.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는 부다 바(Buddha Bar)를 보고 자극을 받은 이 작품은 불교문화권에 속하는 아시아의 안무가가 상업과 결합되고, 팝아트가 되어버린 ‘불상(佛像)’의 전복적 지위를 근거로 창작되었다. 이 신선한 포착은 초연 때에도 한국적 팝아티스트인 설치미술가 최정화와의 협업으로 뭔가 신선하고 새로운 무대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한껏 받았었다. ‘불상’은 마네킨에 비하면 성스러운 몸의 재현물이자 몸의 전시물이다. 그리고 당연히 종교적 맥락 속에서 그 성스러움은 탄생되고 보장 받는다. 그러나 <불쌍>의 무대에서 불상은 무속과 불교용품을 파는 ‘만물상’에서 보는 그것처럼 그저 종교적 환상을 꾸며내는데 일조하는 공산품에 불과해 보이도록 종교적 맥락을 거피(去皮)시키고 그것을 다시 설치미술의 영역으로, 무대미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색감과 모양의 다양함과 화려함으로 시각적 매체가 되게 하였다. 시각 매체가 된 불상들은 이제 무용수들의 동적 에너지와 만나 출렁거리기 시작한다. 마치 파트너처럼 한 쌍씩 무대 전면에 퍼져 각각의 자세로 놓여진 채 시작된 첫 장면은 밝은 조명과 화려함의 극치인 노란색의 플로어가 받쳐주는 색감에 힘입어 복제된 불상의 키치성은 약화되고 아슬아슬하게 무대적 스펙타클로 안착되었다.
종교적 맥락에서 뽑아 올린 불상은 안무자의 의도처럼 경건함 따위는 벗어버리기 위해 무용수들의 장난감이 되어간다. 그들은 불상을 껴안고, 인형처럼 다루며, 놀리고 장난친다. 무음악속에서 장난이 장난의 리듬을 형성하도록 시간을 충분히 준 것은 이 작품의 도입의 가장 큰 미덕이다. 많이 확장되지는 않았지만 첫 장면은 전복을 통해 기존의 영토에서 탈주해보려는 안무자의 의도와 그것을 제대로 풀어 가려는 시도들이 분명하고 또렷하게 보여 눈길을 잡기에 충분했다. 색색의 싸구려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아프리카 여인들처럼 서너명의 여성무용수들이 머리에 이고 나와 그것을 펼치고, 쌓고, 던지고, 망가뜨리면서 무대 전체를 점령하는 시각과 행위가 맞물리는 시도들은 미술과 춤이 무대 위에서 놀이스럽게 엉키는 분방함과 통쾌함을 선사하였으나 그 비중만큼 작품의 주제와의 연결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미약한 해프닝 정도의 자리를 차지했다. 전반적으로 초연에 비해 무대미술이 보강되어 보다 시각적 안정성을 얻게 된 것 외에 춤과 전개는 많이 진화하지는 못하였다. 안애순 무용단에서 이 작품을 함께 했던 주요 무용수들이 눈에 띠이고 그들이 작품의 전체를 중심을 잡아가 원작의 본질을 놓치지 않으려 한 것은 알겠으나 사실 이 작품이 다시 무대에 올려 질 때 관객은 그것의 보다 나은 모습,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장된 어떤 모습을 기대하게 되는 게 사실이고 그 결과가 그것에 못 미쳤을 때 재공연 무대의 이유에 대해 의구심이 생기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역사와 기억’, ‘전통과 현대의 문제’, ‘동서양 문화 아이콘의 충돌’, ‘하이브리드 댄스 프로젝트’, ‘팝아트 불상’ ‘시간을 뛰어넘는 문화적 연대기’, ‘문화적 융합’ 등 어느 안무가 보다 안애순 감독은 자신의 예술을 개념화하는 것을 즐긴다. 트렌드에 민감한 요즘 컨템포러리 안무가들이 보이는 공통된 양상이기는 한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지적으로 성장하여 트렌디한 예술담론에 귀 기울이고 탐구하는 자세를 갖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몇몇 안무가들은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예술적 선언’과는 좀 다른 뉘앙스로 스스로 자신을 규정하고, 타자적인 시선이 들어 있는 개념들을 마구 가져다 쓰면서 자신의 예술을 담아 보려고 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그런 양상은 많은 우려를 갖게 한다. 그 근저에는 마치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론적 근거를 생산하여 포장하고 홍보하는 일련의 목적의식이 보이고 더 근저에는 어떤 불안이 보이기 때문이다. <불쌍>공연과 프로그램북을 보면서, 그리고 비정기 간행물 K-Contemporary를 보면서 느낀 것은 어떤 관념과 이데올로기에 기대고자 하는 마음이 예술을 구석으로 내몰고 초라하게 만들고 있는 현장을 보는 듯해 안타까웠다. 새로운 한국 컨템포러리의 향방을 고민하고 제시하겠다는 야심은 높이 살만한 출사표이나 내용은 그 정도의 건강성이 아니라 고민의 중심 없이 마구 잡동사니들을 모아놓은 잡다한 불안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연의 질과 언술의 내용이 무게가 맞지 않음으로서 공연 후 남겨질 기록물이 자칫 공연예술의 현장성을 왜곡시키고 착각시키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진지한 고민이었던 초발심이 욕망과 얇은 지식에 휘둘리면 진지하고, 무게감 있으며, 마음까지 뚫고 들어오는 예술이 되도록 하는 데 대한 고민은 발 붙일 곳이 없어진다. 이런 양상의 배경에는 혹시 미처 살피지 못한 오류가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컨템포러리 예술에 대한 당면 과제가 마치 이념적 강요가 되듯이 과도하게 작용하고 있으며, 그 문제의 초점을 앞에 놓은 컨템포러리에만 맞추느라 뒤에 있는 예술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닌 지 말이다. 오히려 중요하고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작업이 예술작업이며 자신이 예술가라는 정체성일텐데, 이론가나 비평가가 고민해야 할 일, 특히 어느 정도 시간차를 가지면서 충분히 숙고되고 통찰되고 연구되어야 할 종류의 일을 예술집단에서 설익은 것을 만들고 그것에 기대려는 모습은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심각하게 잘못되어질 경우, 상상하기는 싫지만 예술과 이념의 ‘잘못된 만남’으로 예술이 고사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불쌍>에서 예술적 고민의 흔적은 빈약했다. 누가 이름 붙여주지 않기에 소박해 보이나 정말 소박하지 않은 힘을 가진 예술적 고민은 동시대적인 관찰과 통찰을 통해 몸과 동작으로 충분히 발현될 수 있는 것이고, 관객은 안무가의 가치관과 시선, 그의 솜씨를 즐기기를 원하건만 그저 왔다 갔다 하는 무용수들의 몸과 춤이 되지 못한 파편적 동작들의 더미는 춤이라는 매체의 고유성과 아름다움에 목마른, 세금을 내는 관객들의 허기를 메우기에는 모자란 것이었다. 융합이나 하이브리드가 성공적이려면 각각 자신의 영역이 뚜렷해지고 난 후의 일 아닌가? 지금은 이론은 이론가에게 줘버리고 예술가는 예술을 해야할 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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