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DP무용단의 신작인 김동규의 <Egoism>과 김성훈의 <No Film>이 3월 20-22일 서강대 메리홀에서 선보였다. 이 두 작품을 통해서 무용단의 방향성을 짚어본다는 것은 일면 무리가 있으나 결성된 지 14년이 된 현 시점에서 초창기 활동들과 비교해보자는 의미로 살펴보고자 한다. 2001년 결성된 LDP 무용단의 활동은 춤계에 분명히 주목할 만한 기류를 형성하였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당시 대부분의 대학동문단체가 서열화 된 폐쇄적인 구조여서 개인적인 활동이나 다른 작품도 맘껏 참여 할 수도 없었거니와 안무도 암암리에 순번대로 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런 시대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LDP는 대학동문단체라는 기존 춤계의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활동범위의 제약 없이 자율적인 활동을 주도한 단체였다. 여기에는 초창기 그들의 스승인 유미나 선생의 예술적, 교육적 가치관과 외국무용단의 교류에 일신을 다한 것이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특히 남자 춤꾼들의 폭발적인 에너지와 거친 몸짓은 LDP만의 감각적인 움직임 해석력을 돋보이게 하는 원동력으로 이 무용단의 이미지를 구축하였다. 몇 해 전부터 이들의 작업에서 초창기 이 단체의 무기인 피지컬한 작업보다는 정돈되지 않은 개념에 과도하게 집중한 듯 했지만 이것은 한 단체가 성장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기존의 방식을 탈피해야 하는 다양한 시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며, 그러한 시도가 명확한 색깔이 되기까지는 일정 기간 침체기와 방황도 수반될 수 있다고 본다.
아이가 태어나 성숙한 성인이 되기 위해서 거치는 시기가 바로 사춘기이다. 이 시기는 어른이 보기에는 설익은 생각들로 가득하고, 과도하게 자기애에 빠져 심각하거나 행동에도 일관성이 없다. 김동규의 <Egoism>에서 이러한 사춘기적 방황과 안무의 혼란함이 읽힌다. 팜플렛에 길게 쓰인 내용의 핵심을 짚어보면, 사회의 기준에 맞춰가지 않는 이기주의자로서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Egoism>에서 주요 모티브는 남녀 관계나 다수의 사회적 관계에서 일어날 이기적 본성을 이야기 하는 듯하다. 듀엣끼리 컨텍 되는 동작 자체는 정확성도 있고 움직임 자체만을 구성해 내는 능력은 안무자에게 있다. 그러나 전체 작품에서 그 동작과 부분적 상황이 전개되는 개연성이 있어야 한다. 특히 극명하게 전환되었던 희극적인 상황은 그 의도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진지한 분위기에서 갑작스럽게 조명이 켜지고 객석 관객을 무대로 동원해서 참여시켰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안무자는 객석에 앉아서 무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며 우연적인 관계에서 파생되는 즐거움을 보이려 한 것일까? 이어지는 무대는 갑작스레 대형박스를 분주하게 옮겨가며 수직적인 사회구도를 은유한다. 사회적 관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탈출하고픈 춤꾼들은 박스에서 떨어지는 움직임을 반복하였다.
어찌 보면 안무자가 하고 싶은 말은 짧고 단순함에도 이것이 어떻게 전달될 것인가라는 객관화된 ‘안무적’ 고민이 필요한 것 같다. 춤이 안무가의 사유와 연결되어 관객을 이해시켜야 하는데, <Egoism>에서는 아직 자기애를 뚫고 나오지 못한 단계인 것이다. 그리하여 전체적으로 분주한 설정만 가득하여 관객에게는 개연성 없는 산만한 전개로 보일 뿐이었다. 춤꾼들의 개성도 살지 않았고 마치 플로어 동작에 분위기만을 입힌 전개는 LDP 초창기 작업과는 확연하게 다른 정형화된 패턴으로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안무자는 이기적 본능이 진정 이기적인 인간이 아니라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관계에 기인한 것이라는 생각일까? 그렇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사춘기는 이해받고 기다려 주는 시기로 해석할 수 있고 김동규의 첫 안무작이기에 완벽한 작품을 기대하기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장한 작품을 보기까지 기다려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다.
반면, 김성훈의 <No Film>은 무대에서 사유의 깊이보다는 형식적 폭으로 무대를 빛나게 하는 안무적 감각이 보이는 작품이었다. 마치 한편의 영화를 무대로 옮겨놓은 듯한 작품은 스펙타클한 서사적 성격을 갖추었다. 챨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를 인용하면서 휴머니티의 근본이 되는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 히틀러를 연상케 한 설정은 전체 주제를 이해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특히 개인을 억압하는 절대 권력에 대한 복종과 두려움을 강조한 그로테스크한 움직임이 전체 작품의 주요 방식(Method) 이었다. 작품 시작에 갑자기 무대 바닥으로 떨어지는 피 뭍은 쓰레기 같은 짐덩어리는 개인을 위압하는 강력한 힘이자 처절하게 망가질 몸덩어리를 상징하고 있다. 까만 얼굴로 칠을 한 독재자의 운명이 오브제를 통해 결국 인간성이 말살된 육체라는 장치로 세상의 잔혹성과 고독한 정서를 보이고자 연출한 것이다. 작품 중반부에 또 다른 도전자에 의해 독재자는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하며 공포에 일그러진 짐덩어리 모습으로 결말짓는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도를 위한 세 개의 습작>이 연상된 이 작품은 실존적 허무와 절대고독의 문제를 조명하고자 한 것 같다. 물론 김성훈은 사회적 폭력성의 실체보다는 극대화 된 인간 감정 상태를 표현하고자 하였다고 보인다.
김성훈은 춤꾼의 성격을 잘 파악하는데도 재능이 있어 보인다. 김보라의 집중력있는 열연이나 천종원의 광기어린 연기 그리고 주목할 만한 춤꾼인 안남근의 발견은 LDP 무용단이 안무적 역량만 갖추면 더욱 성장할 수 있는 인재들을 갖추고 있음을 확인 시켜주었다. 히틀러, 채플린, 베이컨의 사유를 연상하게 한 이 작품은 서구식의 운명론과 비극적 인식이 엿보이며 안무자가 유럽 아크람 칸에서 활동하고 왔음을 짐작하게 한다. 김성훈은 유럽풍의 영향과 자신의 감각적 재능을 적절하게 조합하여 긴장감 있는 무대를 선보였다. 그가 다음 작품에서는 자신만의 사유로 체화된 무엇을 펼친다면 훨씬 자신의 개성과 안무적 역량으로 관객에게 각인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김성훈이 의도한 실존적 고독이 남의 나라 이야기 같지 않고 보편적인 인간 심연의 감정이라는 공감대를 줄 것이라는 것이다.
해외 활동을 통해서 무용단의 시야와 문화적 경험은 큰 자산이 될 것이다. 유수한 춤꾼을 갖춘 LDP 무용단이 풀어야 할 과제는 그들만의 정체성이 확인되는 레파토리 확보일 것이다. 폐쇄적인 춤계의 구조와는 다르게 출발한 LDP의 초창기 출발을 상기해보면 좋겠다. 현 춤계 분위기도 그러하고 춤만 추는 것 보다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안무적 역량을 검증받아야 하는 분위기를 알고 있다. 그렇지만 필자는 LDP 1세대들의 욕심인지 희망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존 춤계 단체 같이 LDP도 순번 돌아가는식의 안무를 정기공연에서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자신들이 잘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여 공동안무든 객원 안무든 협력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이 확인되는 작품을 보이길 희망한다. 자신이 가장 많은 시간을 집중하는 하루의 일과를 생각해 보면 내가 춤꾼인지 안무가인지 교육자인지 정답이 나올 것이다. 모두가 안무를 하고 깊은 사유를 다룬 완성된 작품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서두에 성숙을 위한 탈피의 과정을 언급하였는데, 초장기 그들의 작품에서 정형화되지 않고 야성적으로 분출되었던 춤을 기억하고 있는 필자에게는 철학적 개념이나 안무 의도를 생각할 틈도 없는 관객의 몸이 흥분되는 공연들이 남아있다. 설명이 아닌 춤자체로 이해시켰던 그들의 작품들은 설익은 사유보다도 훨씬 순도 높은 심오한 몸의 논리로 우리를 감동시켰던 것이다. 14회를 맞이한 LDP 무용단의 침체된 분위기가 분명히 한 단계 성장하는 사춘기의 방황을 이겨내길 바라며, 관객은 애정 어린 시선으로 기다릴 것이라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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