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박나훈 레퍼토리 열전 〈네가지 요소〉
의도되지 않은 불친절함 극복하기
이지현_춤비평가

 “배추밭에서 두 개의 문을 지나, 모르는 남자를 만났으니, 이제 세 개의 공기를 마실 차례이다”(프로그램 중에서)
 안무가 박나훈이 그간 자신의 4개의 대표적 작품을 재창작하고 재배열하여 <네 가지 요소>라는 표제로 무대에 올렸다>(3월 21-22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최정화 미술의 초록 바구니를 크기 별로 이어 붙여 배추벌레를 연상시키는 무대장치를 매달아 놓았던 작품 <배추생각>은 1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로 작품 전체를 감쌌으며, <모르는 두 남자의 만지기>는 로비무용(2부)이 되어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의 2층 로비에서 실연되고 영상으로 무대에 생중계되는 형식으로 1부 <두 개의 문>과 2부 <세 개의 공기> 사이에 놓였다.




 프롤로그에서 1부까지는 박나훈의 솔로로 진행되었는데, 짧은 머리에 간편한 반팔 티셔츠와 일상복 바지 차림의 박나훈이 약간은 긴장된 듯 혹은 그 긴장과 단호함이 삶과 춤을 대하는 자신의 기본태도인 듯한 모습으로 무대에 나선다. 토르소의 중심과 그 중심으로부터 직선적으로 뻗는 팔과 다리의 선이 힘이 있으면서도 민첩하고 절도있음은 발레를 중심으로 상당한 훈련을 한 흔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으며, 마흔이 넘은 현재까지도 게으르지 않게 훈련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동작이 자연 작동되는 흐름을 타면서 꼬이고 풀리는 탄력이 점차 생겨날 때쯤 그는 프롤로그를 마치고 ‘예스와 노우’ 라는 질문 속으로 들어 온다. 무엇이 옳은가, 이것인가 저것인가에 대한 햄릿형 질문 속에서 박나훈은 조금은 신경질 적으로 그 질문의 상황을 부정하는 듯한 모습으로 갈등한다. 매 번 선택의 기로에 놓여 선택을 강요 받는, 그것도 두 개밖에 없는 가능성 앞에 폭력적으로 노출된 실존적 고통은 관객에게 쉽게 전달되고 금새 공감을 끌어 낼 수 있는 주제로 성공적으로 작동하였다.





 춤을 추고, 배추벌레가 유영(游泳)하는 영상이 작은 모습으로 꿈틀거리는 것 앞에서 “예스? 노우?”라는 독백을 읖조리다가 그것을 다시 춤으로 끌고 가는 방식은 어떤 정서적 인과를 형성하는 듯하다가 소실되어 버리는 듯한 여운을 두고 사라진다. 고독한 애벌레-예정된 완성과 화려한 탄생을 응축하고 있으나 그저 동그라미들의 결합체에 불과한 배추벌레의 미완의 모습과 질문 속에서 그 질문을 어쩌지도 못한 채 소실되어 버리는 존재감은 ‘상실감과 소망’을 시각적으로 대조하고 사라졌다.
 1부가 끝나고 객석에 등장한 남자 무용수들이 관객을 로비로 리드하여 나간다. 물론 10여 명의 아주 일부의 관객만이 마치 선택된 듯 나가게 된 로비에는 카메라를 든 여자 촬영사가 이 현장을 무대로 생중계하였고, 그 이전에 관객과 마주서서 어깨를 부딪히는 동작이 아주 잠시 교습되거나 관객을 중앙으로 끌어들여 “안아줘”라는 독백으로 관객에게 안아주기를 강요하는 듯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결국 그런 해프닝과는 무관하게 <모르는 두 남자 만지기>의 일부가 진행되었으며, 두 무용수는 바닥을 손바닥으로 무엇을 지우는 듯한 동작을 매우 빠르고 힘있게 하거나 구르면서 “안아줘”를 연방 외친다.
 처절하게 동작을 삐집고 나오는 그들의 외침은 간절하나 정체가 없다. 곧 정체가 없다는 느낌은 박나훈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동작, 상황, 언술의 부조화에서 나오는 것인데, 상황이 실존에게 고통스러운 듯, 동작은 전반적으로 파닥거리고, 바쁘고, 격렬하고, 단호하다. 그리고 언술은 간헐적이고 파편적, 신경질적이다. 이 3가지 부조화는 시간이 흘러도 어떤 유기적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채 해결되지 않는다.





 3부는 흰색의 튜브형 잎사귀에 점차 바람이 들어가면서 그것을 등에 짊어진 모습의 3명 무용수에 의해 진행되는 <세 개의 공기>이다. 앞의 배추벌레와 연상작용을 일으켜 무용수가 마치 잎사귀에 붙은 알이 점차 성장하는 과정으로 보이기도 하고, 잎사귀가 마치 날개처럼 보여 그들이 나비가 된 곤충처럼 보이기도 한다. 흰색이 주는 황홀함이 튜브에 든 공기와 결합되어 꽤나 몽환적인 감성을 자극한다. 그러나 무용수들은 부드럽기 보다는 거친 소리를 뿜어내거나 줄 맞춰 움직이는 경로를 선택함으로써 상당히 경직되어 보여 이 장면 역시도 어떤 부조화에 사로잡힌다.
 마지막으로 무대 측면의 2층 난간에서 배추 수 십 포기가 무대로 던져지고 분노를 폭발하는 듯 무용수들이 깨어진 배추 사이로 돌아 다니다가, 마침내 배추를 들고 전면으로 걸어 나오면서 난장판 속에 공연이 마무리 된다.




 약 10여년 작업의 결과를 하나의 공연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작가로써는 많은 것을 돌아보고 정돈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공연은 4개의 작품을 재치 있게 재배열하여 하나의 구성으로 성공적으로 엮어 냈으며 그 흐름이 일관성을 획득할 수 있는 배경으로는 작가로서 그의 작업이 하나의 궤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프로그램에 의하면 그는 그간 “미니멀리즘한 작품”을 선보였으며, “현대설치미술과의 협업, 장소특정적 공연 등을 기반으로 21세기형 사실주의를 지향”하고 “인간 중심주의”를 반성하여 “환경과 자연에 대한 관심”을 갖고,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없앤다는 의미에서 커뮤니티 댄스”를 추구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의 작품경향을 스스로 정리하는 화려한 진술들은 마치 우리 컨템포러리 댄스의 모든 경향을 총 집합시켜 놓은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데, 약간의 지적 허영처럼 보이는 이런 진술들은 스스로의 고민을 개념화한다는 것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한편으로는 그런 개념에 자신의 예술을 갇히게 하지나 않을까 또는 허황한 선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게 한다.
 오히려 과거 10년을 바탕 삼아 작가가 고민해야 할 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동작과 상황과 언술이 서로 간 소외되어 있는 문제일 것이다. 이것은 기법적으로 의도되었다기 보다는 작가의 풀지 못한 숙제로 보이기 때문이며 그 결과 관객은 갈 길을 잃거나 그 불친절한 부조화 속에서 상당히 난감하고 불쾌한 기분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간 쉼 없이 달려 온 창작의 흐름을 바탕으로 개념에 사로잡히거나 그것을 출발점으로 하지 않고 생생한 살아있는 현실감과 춤을 연결시켜 보다 신선한 창작을 실험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남자 안무가로서 여러 현실의 장벽은 높지만 그것을 관조적으로 현실과 떼어서 바라 볼 수 있는 여유와 성숙함이 그에게 깊이를 줄 것이라고 본다. 

2014. 04.
사진제공_박나훈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