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창작자는 머물러 있는 것에 불안을 느껴야 한다.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야 한다. 누군가는 가라고 재촉하고, 한편으로는 여기에 머물라고 강요하는 무언가도 있다. 새로운 시도로 인한 고독의 무게가 자신을 짓누르기도 할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12월 대구, 30대 초 중반의 세 안무가 작품이 연이어 무대에 올랐다. 의도치 않게 이들의 작품을 비교 감상하는 기회가 되었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지만 새로운 길을 나서는 이가 있었는가 하면 새로운 시도로 인한 고독의 무게를 묵묵히 견디고 있는 이, 제자리에 머문 이도 있었다.
김병규 <온더 스킨>(on the skin)
사랑을 춤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하는 상태를 객관화, 대상화해야 한다. 하지만 가능할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그 관계는?
수많은 인간관계는 처음 그 관계를 유발시킨 감정이나 실제적 동기가 사라지고 난 이후에도 구조상 변하지 않고 유지된다는 사실은 사회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관계는 영혼들의 연속적인 결혼을 통해서 정당화된다. 인습적인 이유나 순전히 외적인 이유 때문에 이루어지는 결혼에 대해서 우리가 종종 듣는 말이 있다. ‘사랑은 나중에 결혼 생활에서 온다‘ 진부하지만 진리로 일리가 있다.
사랑의 권력관계를 춤으로 푼 김병규의 작품 <온 더 스킨>(12월 8일,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무대막이 내려진 중앙에 후드티를 입은 한 남자가 쭈그리고 앉아있다. 일상복 차림의 무용수들이 한 명씩 등퇴장하면서 남자의 어깨를 두드리거나 안아준다. 위로의 언어. 김병규가 등장, 남자를 안으려 하자 김병규를 밀쳐내곤 남자 들어가자 내려진 막 중앙에 뜨는 글. 현·대·무·용· 어렵다. 김병규가 손으로 글자를 밀어내는 동작을 하니 ‘어렵다’가 사라지고 ‘쉽다’가 그 자리를 채운다. 안무자는 관객과의 소통을 꿈꾸고 있다. 이윽고 올라가는 막. 상의를 벗은 남자무용수 9명이 팔을 들고 돌아서 있다. 근육과 노란색의 머리칼. 강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다.
막으로 나뉜 두 공간. 이 두 공간은 같은 곳에 있지만 전혀 다른 공간이다. 일상복을 입은 무용수들은 관객과 같은 위치, 무대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은 <온 더 스킨> 속 공간 안에 있다. 김병규는 같은 공간에서 관객들을 무장해제 시킨 뒤 무대 속 공간으로(내면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검정색 슈트를 입고 사선으로 길게 늘어선 무용수들, 김병규가 그 앞을 지나면 무용수들을 한 명씩 차례로 쓰러진다. 사각 조명이 따라다닌다. 순간 음악. 동작을 하다 멈추면 여자무용수 세 명의 춤. 이어지는 군무에서 무용수들은 다 똑같아 보인다. 한 명이 추는 여러 명의 춤이기도, 혹은 여러 명이 추는 한 명의 춤이 된다. 검정색 의상, 노란색 머리칼, 같은 움직임이 주는 인상은 자신 안에 내재 되어 있는 여러 명의 자아 혹은 타자(他者)로 그 자아는 무리 속에서 있지만 무리 속으로 스미지 못하고 배척된다.
다투고 사랑하는 연인들의 일상. 우리나라 연인들에게 영화관은 중요한 공간이다. 이 장면이 재미있다. 몇 쌍의 연인들이 의자를 들고 나와 관객들을 마주보고 앉는다. 그들 뒤에 영화 영상이 뜬다. 폭스사의 타이타닉을 보고, 1년 후 그들은 콜럼비아사가 만든 중국영화를 보고, 2년후 유니버설사가 만든 공포영화를 보면서 그들은 집착, 구속, 압박의 감정들을 견딘다. 그리고 그들은 결혼을 한다. 관계를 존속하게 되면 그러한 관계의 심리학적 상관관계는 일단 신의로 나타난다. 이 신의에는 결국 감정들, 정서적 관심사에 대한 내적 구속들이 뒤따른다. 물론 우리는 충분히 예상하고 시작한다. 김병규의 관계 심리학은?
그들이 보고 있는 영상을 보는 것은 관객이다. 관객이 그들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들여다보고 있는 거라면. 관객의 시선이 영화를 보고 있는 그들에서, 그들 뒤에 뜨는 영상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움직인다면. 이 장에서는 연극적인 요소와 서사성이 부딪히며 빚어내는 드라마를 보는 대신 이 둘이 함께 작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은 불협화음으로 삐걱이고 남자는 답답해하면서 발을 구르고 허공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춤으로 이어지는 연기의 흐름이 간결하다. 남자 위에 올라앉는 여자들, 그들을 밀어내고 올라오는 남자. 남녀 간의 권력관계를 그렸다. 여자의 대사는 객석까지 전달이 안된다. “차” “집” “열정” 이란 단어가 섞여 들어온다. 물질을 욕망하면서 내뱉는 ‘열정‘이란 단어가 채 섞이지 못하고 서걱거린다.
이동하는 단 위에서 확성기를 든 여자, 무대 위 오른쪽 가장자리에 탁자, 의자를 들고 들어온 남자(권준철), 의자 위에 앉더니 엎드린다. 이동하는 계단이 있는 단 위에 확성기를 든 여자. 단이 밀려들어오면 여자, 소리를 질러댄다. 대사전달이 전혀 되지 않는다. 간간이 들리는 단어의 조각을 조합하면 대충 이렇다. ‘너가 도대체 내게 해준 게 뭐가 있냐? 빈 공약만 남발했지 않느냐. 난 이렇게도 살고 싶고 저렇게도 살고 싶었다. 그런데 난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다.’ 정도. (혹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무게가 실린 정치적인 발언이었을 수도. 그만큼 확성기를 든 여자의 목소리는 소음이었다) 여자가 질러대는 소리를 소음으로 처리하는 배경영상의 위트. 여자의 대사에 반응하는 권준철의 춤. 인상적이다. 언어로 춤의 의도와 내용을 설명하는 형식이 마기 마랭의 <바떼르 조이>를 떠올리게 한다. 완벽하게 새로운 것은 없다. 하지만 춤 배치의 기술이 관건이다. 경계해야할 부분이다.
인민복처럼 보이는 아래 위 검정색 의상의 남자 6명, 왼쪽 팔에 두른 빨간 완장. 남자가 산처럼 엎드려 겹쳐져 있고 그 위에 올라앉은 여자. 한 팔을 높이든 채 추는 11명의 군무. 붉은 색은 피의 색이다. 권력은 피로부터 나온다. 색의 대비효과와 완장으로 권력의 관계를 선명하게 잘 보여준 장이다. 군무 속에 섞이는 문명환의 솔로, 무대를 가로지르는가 하면 무리 속에서 웅크린 자세로 위로 튕겨오르다 마침내 일어선다. 접신이 된 듯한 춤. 작품을 이해한 연기와 춤이 돋보였다. 여자 무용수가 남자무용수들이 사선으로 일렬로 서 있는 앞으로 지나가면 한 사람씩 무대 앞에서 일렬로 다시 정렬. 검정색 상의를 벗으니 일제히 흰 셔츠 차림이 된다. 다시 뛴다. 조명의 변화와 맞물린 춤이 강렬했다.
사랑은 타자와의 차이를 감내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우리는 사랑할 때에만 비로소 타자의 낯섬과 타자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변할 수 있다. 김병규가 <온 더 스킨>에서 말하는 관계는 개인적이고 유동적이며 내면적인 삶이다. 그것은 고정되고 안정적인 관계 형식의 특성을 띤다. 또는 그 반대로 지속적인 관계에 의한 신의를 통해서 비로소 주관적이며 정서적 색채를 띤 실제적 삶의 내용이 되기도 한다.
<온 더 스킨>은 즉흥적이기보다는 조심스럽고 꼼꼼하게 계획한 안무와 연출이었다. 그리고 무용수들의 몸과 춤이 아름답게 보인 것은 김병규가 작품의 의도가 흩어지지 않도록 무용수들에게 어떤 생명을 주도록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시적으로 반짝 빛이 난 작품이 아니었길 바란다.
김현태의 <동화속 여행>
김현태의 <동화속 여행>(12월 1일. 수성아트피아 용지홀)은 발레 <호두까기 인형>을 한국창작춤으로 재해석하여 한국 춤 동화를 만들었다. 해마다 12월이면 어김없이 공연되는 발레 <호두까기 인형>을 한국적인 색채와 춤으로 만들어 대구시민들에게 선물하고 싶었다는 안무자의 의도에서 한국춤을 추는 무용수이자 안무가로서의 자존심, 그리고 창작하는 이의 고민을 읽을 수 있었다.
무대 중앙에 호두까기 병정인형이 놓여 있고, 드로셀 마이어 역할이라 짐작되는 남자(이승대)의 솔로 춤으로 공연이 시작된다. 무대에는 크리스마스트리 대신 대형 샹들리에가 무대 중앙쯤에 내려와 있고, 무대장치와 의상은 오방색이 주조를 이룬다. 빨강색 의상을 입은 6인조 마칭 밴드가 북을 치며 객석 뒤 출입구에서 등장, 그 뒤를 색동옷을 입은 꼭두각시들이 춤을 추며 따른다. 그들은 극장을 가로 지르며 객석에 앉아있던 아이들을 이끌어 무대에 오른다. 마치 피리 부는 남자의 피리소리에 아이들이 따라 나서는 듯한 광경이다. 이들의 등장으로 객석은 알지 못할 흥분으로 술렁이고, 관객들은 그들을 따라 무대 위 동화의 세계로 공간 이동을 한다. 마칭밴드의 북소리와 색동 색이 주는 몽상적인 조화로 마술적인 순간은 길게 늘어나고, 극장안의 사람들은 특별히 허락된 목격자들이 된다. 김현태의 재치와 감각이 잘 드러난 연출이었다.
마리(김정미)가 무대 중앙, 계단이 있는 작은 단 위에 앉아있다 아래로 내려온다. 이승대가 보여주는 마술의 손동작을 따라 무대 위 마리와 아이들, 무용수들이 몸을 이리저리 기울인다. 인형을 선물 받은 마리가 단 위에 올라가 잠이 들면 펼쳐지는 꿈속 세계. 빨강색 패랭이를 쓴 무용수들. 색동 한삼을 낀 무용수들이 마리의 머리에 족두리를 얹어주고는 한바탕 같이 춤을 춘다. 화사한 춤과 음악의 조화가 아름다운 장이었다.
이어 현대춤으로 풀어낸 쥐 마왕과 쥐의 군무. 쥐마왕을 물리치는 흰 의상의 무사들. 쥐마왕과 왕자와의 대결장면은 어린 소년들이 꿈꾸었을 환상을 춤으로 잘 풀어낸 장이었다. 한국 춤 의상을 입고 칼이 아닌 총을 든 것, 마지막 격투 신을 코믹하게 풀어낸 것 등은 어린이의 시각을 고려한 위트로 보인다.
왕자역의 서상재는 지나치게 선이 고운 춤을 춘다. 쥐마왕을 물리친 기백과 정신은 어디에? 왕자와 마리가 추는 사랑의 춤과 군무, 그리고 듀엣의 장은 관객에게 어린이에서 어른으로의 감정 이동을 예고 없이 주문한다. 이후 극의 중반을 넘어서기까지 잘 붙들고 있던 긴장미가 갑자기 툭 떨어지면서 춤이 느슨해진다.
고전작품의 원형을 유지하면서 우리춤으로 새롭게 구성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불어 재미를 더해야 한다는 부담까지 얹히면. 원작이 견고한 작품이어서 그 압박감은 더 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현태 개인의 고유한 시각, 명철한 시정으로 춤에 접근한 자세에 박수를 보낸다. 선전한 작품이었다.
박홍기의 〈one moment...〉
12월 13일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어둑한 무대, 무용수가 보인다. 누워있고, 서 있다. 남녀 무용수들의 접촉과 움직임이 의미 없이 이어진다. 눈사람을 굴리듯 한 사람이 굴러서 나오면 또 하나가 나오고 무용수가 다른 무용수를 끌고 나오기를 거듭한다. 남자 무용수 두 명은 무대 왼쪽 편에 오른쪽 무대에서는 여자들의 군무가 이어진다. 두 그룹의 춤은 조화롭지도, 불협화음도 아니다. 무용수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움직여보라는 주문을 받고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현대춤 실기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연습실을 보고 있는 듯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나치다는 느낌에 시계를 본다. 공연이 시작되고 30분이 지나고 있다.
팸플릿에 적힌 안무의도를 본다. “모든 일상에서 자신이 의식할 수 있는 관습적 체계 안에서 이뤄지는 상황 등을 모티브로 하여 춤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 글이다. 일상의 모습을 춤추겠다는 말인가. ‘관습적 체계 안에서 이뤄지는 상황’이란 어떤 것인지.
검정드레스를 입은 여자무용수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전환되는가 싶었으나 남자 무용수를 무대에 두고 그냥 들어간다. 남자의 솔로. 작품의 의도가 선명하지 않으면 춤을 추는 무용수가 아무리 잘 움직여도 그 춤이 빈약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막이 내려오고 무대 앞으로 나온 남자 둘. 이전 〈help...ing〉에서 본 형식이다. 앞 뒤 맥락과 연관이 없는 배치. 관객과의 소통을 잘 못 이해하고 있다. 힙합, 팝핀 등의 동작을 한 명이 하면 다른 무용수가 그 동작을 과잉된 움직임으로 따라하면서 관객으로부터 웃음을 유도한다. 이어 무용수가 객석으로 내려와 여자 관객 한 명을 의자에서 일어서게 한 뒤 또 다른 개그를 시도 한다. 다시 시계를 들여다 본다. 45분이 지나고 있다.
장이 바뀌고 군무진의 춤. 무대 양쪽에 하나씩 세워 둔 설치물에 맵핑 영상을 입힌다. 맵핑 영상 한 가운데에서 추는 남자 솔로. 영상으로 인해 오히려 춤이 보이지 않는다. 이전의 작업보다 나아진 것은 음악뿐이었다.
조악한 무대였다. 1시간 내내 관객에게 실없는 농담을 툭툭 던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안무자가 무대와 관객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박홍기는 2년 전 작품 〈help...ing〉이후 깊어지기는 커녕 한 걸음도 앞으로 내 딛지 못하고 있다. 이 작품은 대구문화재단 ‘우수기획지원사업’ 선정 작품이다. 세금은 이렇게 쓰여지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