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무용단 수석단원인 이정윤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만든 신작 <윈터드림> (12월 24-29일, KB하늘극장)은 스토리텔링에 주안점을 둔 공연이었다. 작품 제목을 통해서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춥고 쓸쓸한 좌절의 시간을 버티어 이겨냄으로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내용이다.
전체적으로 계절의 편린(片鱗)을 이미지화하였는데, 구체적으로 브라운, 그린, 레드, 화이트 위주의 의상색감을 계절과 연동한 점과 색깔과 동일한 이름을 각각의 캐릭터명으로 사용함으로써 각 춤꾼들의 이야기와 연결시켰다. 계절을 이미지화하는 또 다른 수단으로 원작보다 드라마틱한 강렬함이 추가된 막스 리히터(Max Richter)의 ‘비발디의 사계’ 연주를 사용하였으며 이를 통해 전체적으로 작품의 자연스런 흐름과 스토리 전개에 따른 이해에 도움을 주었다. 특히 극 중간중간의 청아한 피아노 연주에 녹아든 듀엣의 유연함, 듀엣 사이사이 <사계> 연주에 맞춘 군무진의 춤, 그리고 애잔한 구음이 유기적으로 결속되어 전체 스토리의 결을 촘촘히 엮어주는 안정된 역할을 하였다.
공연은 전반부에 현재와 미래의 단상이 구조적으로 잘 설정되어 있었기에 식상할 수도 있는 내용이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정윤(브라운)의 심상은 무대 뒤쪽 거대한 액자 틀에 우아한 자태만 보인 후 사라진 연인 송지윤(그린)에 대한 회상으로 설정되었고 연인의 머리비녀를 손에 쥐고 쓰러져 있는 브라운의 방황에서 ‘윈터’, ‘절망’, ‘고통’이라는 성격을 일반적으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이런 고통스런 표현에 봄을 상징하는 음악의 약동하는 기운에 맞춘 군무진이 등장하면서 극적 스토리에 희망의 복선을 던졌다. 원형무대의 곳곳에 있는 출입구에서 동시에 등장한 군무진은 무대 가장자리에서부터 점차적으로 무대 중심으로 집약되는 에너지를 격정적으로 표출하였고 돔형 하늘극장의 높은 천장까지 기운이 퍼지는 듯한 효과를 주었다. 이 장면에서 순간적으로 모리스 베자르의 <볼레로>가 연상되며 강렬한 에너지 표출을 느꼈다.
이어진 장면에서는 꿈에서 만난 연인과의 재회를 통해 우아한 자태의 그린에 의한 브라운의 힐링 과정을 묘사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극의 전개를 이어갔다.
안무자가 현역 춤꾼이란 장점은 전반부 공간의 역동적인 활용면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예를 들어 옛 연인이었던 그린이 자신의 비녀를 새로운 뮤즈(화이트)에게 건네는 장면에서 원형 바닥을 4분의 1로 분할하여 시계방향으로 돌기와 되돌리기를 반복하다 군무진이 그린을 향하여 사선으로 길목을 만드는 동선배치는 현실과 과거 그리고 감정과 시간의 흐름을 환기해 극적 전환을 펼친 감각적 연출이었다. 이것은 마치 전통춤이나 마당판에서 적극적인 전진을 위해 한 바퀴 크게 돌아 사선으로 나가는 것과 유사한 동선 사용이었다.
중반부 실제 춤꾼들의 현실을 반영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오디션은 4명의 춤꾼이 모자를 얻기 위한 쟁탈전으로 희화화되었다. 이 장면은 <윈터드림>이 춤으로 공감할 수 있는 그들의 모습을 가장 재치있고 설득력 있게 표현한 부분이었으나 중반부까지의 신선함과 표현력은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너무 뻔한 극전개로 인해 진부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박혜지(화이트)와 송설(레드)이 꾸며가는 새로운 무대는 전반부의 듀엣이 반복되는 느낌을 주었다. 한국춤이라기보다는 뮤지컬과 같은 감정에 치우친 느낌은, 춤이 빠지고 스토리만 남은 아쉬움을 던졌다. 이는 스토리텔링적인 춤이 전반부에는 전체를 이해하는 데 효과적이었으나 단선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취약점이 있을 수 있는데 이러한 점이 중후반부에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추가적으로 춤꾼들 움직임의 정체성이 선명하지 않은 부분도 다듬어야 할 문제로 생각되며 어느 순간에는 비장한 긴장감을 보였다가 어느 부분에서는 뮤지컬에 등장하는 듯 주체성을 잃어버린 모양새로 비춰져 선명하게 다가오지 못했다. 얼굴과 어깨선 그리고 손짓은 한국춤의 선묘적 특징을 유지하고 있으나 몸통의 쓰임새가 역동적인 힘을 받아내기에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특히 <사계>의 여름 악장 부분의 휘몰아치는 템포와 리듬을 군무진이 따라가기에는 벅차보였다. 물론 춤꾼들 몸에 배어 있는 한국춤 호흡법과 여미는 몸습관이 현대춤 전공자들과 동일한 표현법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라 짐작되지만 이러한 점들로 인해 자연스럽지 못한 표현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겠다.
마지막 장면은 고통스런 겨울과 어제가 지나고 희망 가득한 순간을 기념촬영하는 듯했고 전반부 무대 뒤 액자 틀에 서 있었던 그린이 아닌 전체 춤꾼이 포즈를 취하며 사랑스럽게 마무리되었다.
안무자 이정윤은 겨울 시즌의 고정 레퍼토리인 <호두까기 인형>같은 각종 연말용 훈훈한 공연들 사이에서 <윈터드림>만의 특별함을 각인시키고자 하는 포부를 안무노트를 통해 드러내었다. 하지만 그의 안무 방식은 모리스 베자르의 연출방식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베자르는 탁월한 연출자였으며 스펙터클한 무대구성으로 쇠퇴한 발레에 연극적 요소와 음악적 구조를 결합하여 발레의 영역을 확장한 인물이다. 지금까지도 특별하게 기억되는 그의 작품 <볼레로>에서는 단조로운 리듬이 반복적으로 이어지면서 격하게 고조되는 몸의 역동성의 진수를 보여 주었고 이는 공연의 중심에 춤이 주체적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윈터드림>은 베자르의 안무방식 유사하게 타 분야와의 협업과 극장효과로 춤의 안정된 구조를 이뤄낼 수 있었지만, 베자르와 다른 점은 한국춤 정서의 방향성이 모호한 채 이야기에만 집중하였기 때문에 그의 작품성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안무자의 컨템포러리한 한국춤을 만들기 위한 포부와 다양한 방법론적 접근은 의미 있는 시도였다. 다만 공연 내용에서 항상 춤이 주체가 되어 연출과 함께 빛을 발할 때 보편성을 담은 스토리텔링이 공감되는 결실을 맺을 것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