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한국춤 창작 작업에서 대중성과 예술성에 대한 고민은 대부분의 창작자들이 인식하고 있는 문제이다. 이 질긴 동반관계에 명쾌한 해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공공의 지원 아래 수행되는 국공립과 시립 단체의 작업은 이러한 명제에서 더욱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지역의 경우는 서울권에 비해 다양한 장르 공연에 노출되기 어렵고(관객수 부족으로 극장 측에서 유치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지역대학과 예고나 학원 그리고 문화재단 같은 교육과 연계된 인프라도 제한이 있고, 특유의 지역색도 영향이 있다. 따라서 지역마다의 상황과 기존 무용단원이 추구해 왔던 성격과 상부기관의 지향점에 따라 예술감독은 단체 운영과 작품 성격을 조율해 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을 듯하다. 다수의 대중이 반기는(매표수로 이어지는) 작품을 해야 하는 여러모로 얽혀 있는 정치적인 상황도 모른 척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예술감독은 예술성이 풍부한 미적 경험의 세계로 대중을 안내해야 할 책임도 모르지 않을 터이다. 매년 정기적으로 공연을 올려야 하는 예술감독의 임무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느 방향(대중성과 예술성)에 방점을 둘지 쉽지 않으리라 짐작된다. 예술성을 염두하고 관객의 수준이 올라가기까지 인내하며 창작할 지, 대중적 눈높이(춤경험이 거의 없는)에 맞출 지, 두 경계에서 줄타기를 해야 한다. 게다가 운영이나 지원금을 쥐고 있는 기관의 입김도 저버릴 수 없고 소위 순도 높은 예술성을 지향하는 전문가 집단의 날 선 비평도 무시할 수 없으니 작품 하나에 여러 시선을 충족시키기는 여간 어렵지 않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것이 예술감독이 감당해야 할 무게이니!
천안시립무용단 〈희희낙락〉 ⓒ천안시립무용단 |
천안시립무용단 김용철 예술감독은 춤작품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예술성과 대중성이란 숙제에서 올 해 정기공연은 대중과 가까워지는 쪽을 선택했다. 제목에서부터 온갖 무거움과 복잡함을 내려놓고 신나게 웃고 즐기자는 취지로 〈희희낙락〉(11. 3. 천안예술의전당 대공연장)은 다수 시민들의 곁으로 성큼 다가서려 했다. 마치 시끌벅적한 천안 흥타령 축제의 축소판 인양 열기가 고조되기를 작정하고 마련한 총천연색의 스펙터클(spectacle) 춤판이었다.
천안시립무용단 〈희희낙락〉 ⓒ천안시립무용단 |
윤중강 평론가는 버라이어티 쇼를 진행하는 호스트로 변모했고, 대형 극장 무대는 3단 케익처럼 각 층(layer)마다 색깔이 다른 춤들로 꽉 차 있다. 선글라스를 낀 왕비가 태평의 기운을 기원하는 프롤로그는 콘서트장 같은 분위기를 조성한다. 1장의 봄의 환희는 춘앵전과 사랑가로, 서정성이 가득한 봄처녀들의 춤으로 설레고 산뜻한 감성을 추구한다. 2장의 맞이 기쁨은 불꽃 같은 열정으로 비나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한다. 김용철 특유의 캐릭터인 익살스러운 표현들로 전작들에 감초 같이 등장했던 소도구(갓, 부채, 담뱃대)를 활용하며 한 층 더 일사불란한 군무로 호방하게 신비나리를 풀어낸다. 3장은 쇼팽의 ‘야상곡’과 ‘아베마리아’곡에 멜랑꼴리하고 이질적인 신비로운 밤 분위기로 안내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야상곡’에 붉은 드레스를 입은 춤꾼은 몸 선을 강조한 요염한 춤으로 생경하게 쇼팽의 곡을 해석한다. 4장은 이 작품의 지향점을 담고 있는 하이라이트로 웃고 노는 판을 마련한다. 일종의 커뮤니티 댄스처럼 아이와 어른, 출연진과 관객들이 무대에 뒤섞여 잠재된 춤 DNA를 한껏 쏟아낸다. ‘아모레파티’곡이 나오면 청중들은 자발적으로 내적 끼를 발산하며 박수와 환호로, 바이브 넘치는 몸짓으로 ‘희희낙락’에 동조한다.
천안시립무용단 〈희희낙락〉 ⓒ천안시립무용단 |
〈희희낙락〉은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기치 아래 궁중무에서부터 막춤까지 아우르고, 웅장한 타악부터 클래식 연주와 전통적인 타령까지 게다가 범 아시아적 이미지까지 수렴한 각양 각생의 춤들이 전시되었다. 그것도 아주 속전속결로 숏 폼에 길들여진 젊은 세대가 봐도 지루할 틈이 없는 구성으로 속도와 총천연색 색감까지 눈을 사로잡을 요소를 두루 갖추었다. 프롤로그와 총 네 개의 장도 사계절의 컨셉으로 누구나 쉽게 연상되는 계절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단 10명밖에 안 되는 소수의 단원들은 1인 다역을 하며 숨가쁘게 여러 역할을 해내었다. 지역의 춤꾼들과 학생들까지 동원되어 짧은 시간에 대형 극장을 가득 채우려는 노력이 역력해 보이는 무대였다. 아마도 대다수의 관객들이 진지하고 어렵게만 생각한 한국춤과 거리를 좁히는 신나는 무대임에는 틀림없다. 한국춤을 처음 보는 관객이라면 더욱 매력적이라 생각할 만큼 다채롭게 다양한 춤의 종목들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짓수가 많은 뷔페처럼 우려나는 깊은 맛(춤)을 기대하긴 어렵다. 맥락의 부자연스러움도 간간이 있고, 음악적인 부산스러움도 있어 풍요 속의 빈곤함이랄까. 신나게 떠들고 나서 돌아서면 기억에 남지 않는 수다처럼, 맛을 음미하기도 전에 스스로 녹아버리는 달콤한 생크림처럼 말이다. 일상의 피곤함을 내려 놓고 편하고 즐겁게 보는 공연은 이미 K-pop이나 트로트로도 충분한 것 같은 데, 굳이 한국춤까지 버라이어티 쇼 같은 길을 가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안시립무용단 〈희희낙락〉 ⓒ천안시립무용단 |
김용철 감독은 그간 발표했던 시그니처 작품인 〈업경대〉(20회 정기공연)에서 특유의 위트와 철학적 사유로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또한 〈음무동락〉(19회 정기공연)에서는 여러 타령의 굴곡을 기민하게 춤적 무드로 연결하는 감각을 발휘했다. 김용철은 전통춤의 내력과 여러 장르를 향해 열린 태도와 기질적인 유연함으로 그동안 대중적이면서도 예술성 있는 작품을 만든 축에 속한다. 차원 높은 해학과 유머로 웃음을 유도할 역량이 있으나 이번 작품엔 충분하게 발휘되지 않아 아쉽다. 예술을 통한 화합이란 측면에서 정기 공연이 하나의 통로로 일정 부분 역할을 할 수도 있고, 지역에서 동반 성장하고 있는 인력들과 함께 일궈낸 것도 의미가 없진 않지만 말이다.
천안시립무용단 〈희희낙락〉 ⓒ천안시립무용단 |
그럼에도 예술이 추구해야 할 방향은 격한 호응과 관객 수만이 아니라 먼 길을 보고 묵묵하게 예술적 가치를 관객에게 일깨워 주는 역할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예술성이 높다고 대중적이지 말란 법도 없고 이 두 노선을 최대한 유지할 수 있는 균형감을 찾는 게 감독의 역할이다. 그러나 이번 정기공연은 지나치게 대중 유도에 치중했다. 한국춤 경험이 많지 않은 다수의 시민들을 극장으로 유도하려는 의도가 현장의 반응으로 보면 이번에는 통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혹여 음미하며 의미를 찾아야 하는 소위 예술성이 짙은 어려운 작품이라면 오늘 같은 성격에 환호하는 관객들이 다시 극장을 찾을까? 아마도 대다수의 반응은 긍정적이지 않을 것으로 예측되며 다시 극장에서 멀어질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이 작품은 통!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김혜라
춤웹진 편집위원. 춤미학과 비평을 전공하였고 2012년 한국춤비평가협회를 통해 비평가로 등단했다. 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심의전문위원으로 할동하며, 〈춤웹진〉에 정기적으로 평문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