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길을 나서기 전에, 무지와 뻔뻔함, 무책임의 3종 세트에 대해
작금 한국의 무용계는 창작활성화를 위한 ‘산실’까지 짓고 새로운 춤의 흐름을 만들기 위한 큰 걸음을 내딛고 있는 듯하다. 발레에 이어 현대무용과 한국무용 창작산실 사업이 목하 진행되는 중인데 문화부의 재정적 규모도 단편에 지원하는 문예지원금에 비하면 큰 편인 이 사업이 한국컨템포러리 춤의 새로운 장을 여는데 중요한 버팀목 역할을 할 것인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몇 번의 심사를 다니면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사업을 실행하는 주체와 보다 더 구체적으로는 일꾼들이 ‘완전초보’에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무용 공연장르에 대한 이해는 말할 것도 없고, 사업을 추진할 방향성을 갖기 위한 무용계의 상황에 대한 인식 역시 일천한 것이어서 놀랐다. 거의 타 분야에서 건너온지 얼마 되지 않은, 아니 이 일을 계기로 온 인력들이 아무 개념없 이 일을 진행한다. 무용이라는 특수성을 논하기 전에 일에 대한 능력 또한 미천한 것이어서 거기에 무용 장르에 대한 이해까지 바라고, 그들이 사업의 주체로써 최소한의 책임감까지 바라는 건 우물 앞에서 숭늉을 달라는 억지를 부리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그런 인력들이 어떻게 고용되고 어떻게 책임을 맡게 되었는지 그 과정과 어떤 역관계 또한 상당히 의심스러운 것은 둘째 치고, 그들이 초보라는 사실 위에 무지와 뻔뻔함, 그리고 당연히 연달아 나타나는 무책임 이라는 3종 세트로 일을 버무릴 것이 뻔해 두렵다. 사업을 추진하는 주체는 창작의 환경이고 산실의 지킴이다. 그런데 그들 중 상당수는 껍데기의 일만 오로지 별탈 없이 진행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거 같다. 무엇을 위해서 이 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별탈 나지 않기 위해 살고 있는 것처럼.
사람은 종족번식에 대한 고도의 문화와 예의를 갖추고 있는 종이다. 그래서 배우자 고르는 일을 중시하고 그 과정에 까다롭게 임한다. 그 모든 과정의 숨어있는 동력은 바로 후손을 생산하는 일로 귀결된다. 그것을 태교로 개념화 해 놓고 눈에 보이는 열 달은 당연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몇 배의 시간 이전부터 공을 들인다. 그렇게 공을 들이고 들여 태어나는 게 그들의 다음을 이어갈 후손이다. ‘창작산실’은 인큐베이팅 보다는 우리의 어감이라 훨씬 긍정적인 느낌이었다. 인큐베이팅이 과학과 인공이 어우러져 좀 차갑기는 하지만 법칙과 시스템에서 오는 신뢰의 느낌이라면 ‘산실’은 우리 식의 철학과 문화가 묻어나는 정성의 느낌이 때문 일 것이다. 게다가 탯줄을 보관하는 태실(胎室)까지 연상되어 뭔가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려는 정성스런 ‘곳’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들어 좋다고 생각했다.
사업의 개념과 그것에 적당한 이름을 갖추는 일은 사업의 시작이자 반이다. 그리고 사업의 주체는 그 이름으로 개념을 구체화시키는 또 하나의 창작 주체이다. 초보자라고 일을 하지 말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초보자는 초보자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사업의 규모에 적합한 능력과 경력, 그리고 문화사업의 주체답게 문화적 소양과 견해, 그 다음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양심과 책임감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를 만드는 일과 비교하자면 지원금과 그 집행주체는 陽(아버지)에, 춤을 만들어내는 창작주체 안무자와 무용수는 陰(어머니)에 해당한다. 무지하고 뻔뻔하고 무책임한 아버지가 돈 조금 들고 아버지 노릇을 다 할 수 가 있을까? 거기서 태어나는 아이는 무엇을 담아내고 무엇을 잉태할까? 가난한 엄마는 잘한 선택을 하고 있는 걸까?...
가을의 풍성함이 올해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알곡들 사이에 쭉정이도 많이 보인다. 잘 짓는 농사꾼은 출하하기 전에 농사의 긴 과정을 마지막 결실로 먹는 사람에게 잘 전달할 때까지 쭉정이 고르는 일에 심혈을 기울인다. 탄성이 나온다 “야, 농사 정말 자 지었다!” 축제는 일년 단위의 농사와 많이 닮아 있다. 축제의 기원이 ‘추수감사’ 인 것을 보면 너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예술감독은 당연히 농사꾼이다. 1년 농사를 계획하고 작물을 결정하며, 어떤 토양에 심어 어떻게 기를 것인지를 결정하고 진행한다. 축제의 단위들이 세계 속에 내 놓아도 꿀리지 않을 것으로 성장하고 있는 가운데 농사꾼의 철학과 양심, 안목과 심미안은 반비례로 허약해지는 듯하다.
2013 SPAF는 “초현실과 리얼리티”라는 주제로 SIDANCE는 주제도 없이 보따리를 풀었다. SPAF는 무용파트 예술감독 부재 속에서 당연히 무용작품의 수나 규모는 줄어들었고 시댄스는 양적으로는 세계적인 축제이나 특별히 눈길을 끌거나 이슈를 갖는 작품을 담아내지는 못했다. <Sfumato>
이런 류의 작품들이 의미를 갖는 것은 퍼포먼스성이 살아있을 때이다. 공연의 특성을 보다 확장시켜 시간적으로 과거의 것을 고정된 형태로 보여주는 것에서 벗어나 현장성과 시간성을 최대한 지금, 여기로 끌어 당겨 바로 그 현장에 함께 한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펄떡거리는 새로운 것이며 규정되거나 정해지지 않은 예측불허의 진행형일 때이다. 이 작품 역시 출발은 그런 것을 추구했던 거 같다. 그러나 결과로까지 그것을 이어내지 못한 역량부족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보인다. 그래서 작품은 아이들의 물놀이로 끝나고 말았고 관객은 작품의 미숙함에 한번, 미사여구 포장지와의 괴리로 두번을 괴로워야 했던 작품이었다.
양 축제의 작품 홍수 속에서 기뻤던 것은 자기세계가 발현되기 시작한 안무가들의 발견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현대무용을 지켜보면서 기고, 서고, 걷고, 춤으로 몸을 세우는 법을 배워 무대라는 공간 속에서 춤을 추기까지는 정말 지난한 시간이 필요하다. 몸으로 익혀야 하는 수련의 시간도 만만한 것이 아니지만 게다가 정신세계를 담아야 하는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오자면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다같이 공연을 한다해서 같은 공연이 아니요, 다 같은 예술가라해서 모두 예술가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아주 단순한 의미에서 비평은 그것에 지속적으로 품류를 따지고 급수매기는 일을 하는 것일 것이다. 나는 안무가를 나눌 때 아직 무대를 채우는 일에 습작을 하고 있는 수준 다음이 자신의 목소리를 담을 줄 아는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이성을 갖지 못했을 때 아직은 동물이었다.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동물과 구별되는 새로운 지평선에 서게 되었고 이런 생각의 탄생에 바탕이 된 것은 직립과 손의 사용이 한몫을 했다. 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의 축적된 몸쓰는 기법들을 익히고 홀로 서게 될 때가 어느 정도 테크닉을 완성한 시기이고, 그 다음 무엇을 표현할까 생각을 하게 되면서 예술가로 탄생하게 된다. 거기서 일반인과 예술가는 구별된다. 곧 예술가는 자신이 다룰 줄 아는 도구와 기법을 가지고 그것에 자신의 세계를 담을 줄 아는 사람이다.
<몸의 탐구>(안무 신창호/ 2013 SPAF 국내초청작)는 그야말로 탐구중인 상태를 보여준다. 대극장에서 벌어지는 큰규모의 작품이었으나 그 수준은 학생처럼 순진하고 초보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창호는 이제 자신이 배워왔던 것들을 되새김질해서 스스로의 것으로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질문은 “인간의 행위는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가?”이고 그것을 ‘왜?’와 ‘만약’이라는 가설을 통해 ‘사회적 몸의 의미’를 다루고자 했다. 그러나 그 역시 이내 개념적 틀(conceptual frame)에 꿰어지지 않는 온갖 무관한 개념의 광풍에 휩싸이고 만다.
작품의 의도는 갑자기 “바라보는 순간을 극대화시킨 이미지 효과”, “미디어 디자인”, “사운드 효과로 상황을 연출”, “예술을 바라보는 사회적 이슈까지”, 그래서 결국 “시사적인 형식과 아방가르드 형식의 실험적인 무용 다큐멘터리 형식의 공연” 으로 작품을 규정한다. 그러나 공연의 골자는 마네킨의 눈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그의 시선을_그것도 전혀 자발적이지 않은 그저 감각기관을 모방한 것에 불과한-통해 무용수와 무대 위의 상황을 비춰 무대 위에 투사하였고, 그것이 무용수의 실제 움직임과 각도를 창출하며 겹쳐지는 효과를 주로 하여 진행되었다. 대단한 군무를 형성할 수 있는 무용수의 숫자는 그의 허술한 가설에 기댄 채 습관적인 움직임을 반복하고 이전 작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실험의 종류와 수준으로 봤을 때 이런 류의 작업은 소극장에서 대학원 1학기 정도에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행위와 의미의 관계는 스스로 혼돈되어 몸과 의미의 관계로 전화되고 그것이 어디에서 원인을 묻는 왜라는 것과 만나는지, 이 작품에서 ‘만약’의 가설은 무엇인지를 더 꼼꼼히 밝히고 스스로 물으면서 이 흔한 질문에 답을 한 수많은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해 낼 때 관객 앞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고로 <몸의 탐구>는 날 것 그대로의 제목만큼이나 진일보하지 못한 팻말뿐인 탐구를 가져다 쓴 유치한 것이 되었다.
<RE:OK…But!>
대화식의 제스처로 움직임을 주고 받는 것으로 관계에서의 막힘과 충돌을 표현하려고 시도한 것, 생생하게 그들 문화 속에서의 표정을 동반한 동작들을 1시간 내내 끌고 가려고 한 것의 집중도는 상당한 것이었으나 움직임과 전체 구성과의 관계는 아직 터득되지 못하여 주제의 동어반복이거나 감정의 흐름 속에서 보다 발전된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관객은 점차 싱가폴 문화적 칼라에 화합되지 못한 채 미궁으로 빠져들어야 했다.
김재덕이 2000년대 후반에 보여주었던 자신의 얘기를 자신의 투로 보여주었을 때의 파워는 가히 기록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후 별반의 발전을 이뤄내지 못하고 있어 보인다. 특유의 주제에의 집중력(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것)과 춤과 음악, 언어라는 매체를 넘나드는 자유함은 김재덕의 자산이다. 무슨 이유인지 이 작품에서는 주제에 대한 안무가의 정서적 집중력이 떨어져 보이고 관객에게 그것이 맥빠진 것으로 다가오게 한다. 어쨌든, 앞의 이유일지 모르겠으나 가장 허약한 것은 1시간을 무대 위에서 춤을 중심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공부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무대예술로써 춤을 중심으로 한 공연의 구성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길을 나선 이들
<Because of why>
이인수의 그간의 진도와 경로는 모범답안처럼 정직하고 정확하다. 지금까지의 과정에서 이인수는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것의 100%를 해냈으며 그것의 내공이 고스란히 축적되었다고 보인다. 이제는 삶의 대한 고민의 축을 놓치지 않으면서 성숙해지는 일이 남아 있다. 주제의식의 성숙과 그에 따라 변하게 될 움직임 언어만들기, 그가 넘어가야 할 이유 있는 山이다.
안무가가 자신의 철학을 담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중진 여성안무가 허용순은 귀한 존재이다. 발레의 테크닉만으로도 평생 일거리일 수 있으나 그녀는 그것들을 훌쩍훌쩍 해치우고 여성 발레 안무가로써 컨템포러리 발레안무의 세계적 흐름과 한국발레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스위스의 쮜리히, 바젤 발레단 그리고 뒤셀도르프 발레단까지의 경험과 세계적 안무가들 작품의 주역으로써의 경험을 잘 모아 그녀는 스스로 안무작도 31개를 갖고 있는 탄탄한 안무가이다.
그녀가 이번 K-Ballet World에서 초연한 <The Moment>
우리나라에서도 컨템포러리 발레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무가이고, 우리는 운이 좋게도 아주 훌륭한 여성안무가를 저절로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안무가가 자신의 안무력을 맘껏 펼쳐 보일 물적인 조건들은 빈약하게 제공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직업적으로 장기간 에너지와 기량을 투입할 무용수를 안정적으로 제공받기 어렵다면 안무가는 얼마나 불안한 환경 속에서 작업을 진행할 수 밖에 없는가? 허용순씨가 그나마 한국에서 인정받고 기회도 많이 갖고 있기는 하지만 앞으로 안무가로 좋은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필요한 것은, 좋은 컨템포러리 안무가를 갖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작품에 집중할 수 있는 조건일 것이다.
또 하나, 상대적으로 한국무용수와의 작업이 적은 상황에서 이번 <The Moment>
그녀가 기본적으로 발레창작의 탄탄함을 갖추고 있고, 안무가로써의 주제를 대하는 품격도 훌륭하며 게다가 여성적 시선까지 놓치지 않는 것은 이미 앞선 작품들에서 확인되었다. 거기에 자신만의 고유한 작품세계를 완성하는 고도의 과정이 그녀 앞에 놓인 길이고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갖고 지켜보고 있다.
<Philia>
이 작품의 놀라운 지점은 출연자들이 감정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방식이다. 어떠한 꺼리김도 없이, 꾸밈도 없이 이야기를 끌고가는 힘은 그들의 거침없는 표현에서 나온다. 여성에게 스테레오타입으로 짐지워진 행동 패턴이나 포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아마 그들 이야기의 시발점이 사회의 젠더 역할에 물들지 않을 소녀시절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녀 둘은 시원하게 저 뱃속부터의 이야기를 끌어내어 목청껏 지르면서 울고 웃고, 눈물과 콧물과 땀을 버무리는데 열중한다.
정말 오래 만에 어떤 트렌드나 이론의 포장없는 머리를 동원할 틈을 안주는 원초적인 날 것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을 보았으며 사회 속에 드러내지 못한 여자들의 진짜 성장담을 들었다. 그 이야기의 끝에 우리가 도달한 곳은 적절히 비밀스럽고, 적절히 위험하며, 적절히 아픈, 여자라는 동물의 아름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