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즈음들어 한국 춤계에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흐름 중 하나는 새로운 공간에서의 춤 창작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종래 일회성이 아닌, 꾸준히 지속적으로 춤 공연이 이루어지는 극장은 서울의 경우 10곳이 되지 않았으나 최근 들어서는 그 숫자가 배 이상 늘어났다.
얼마 전 개관한 강동아트센터가 2개의 극장에서 지속적으로 춤 공연을 갖고 있고, 올해 새로 문을 연 LIG홀 합정을 비롯한 2개의 LIG홀, 대학로의 성균소극장, 그리고 간헐적으로 오픈하던 두리춤터 등이 시리즈 형태의 기획공연을 연중 시행하고 있다. 여기에 국립국악원의 풍류 사랑방, 구 서울역사를 개조한 문화역사서울284의 새로운 오픈도 무용가들을 새로운 춤 작업 공간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9월의 춤계는 이들 새로운 공간에서의 작업 외에도 기존의 춤 공간을 변형하거나 작품에 최대한 활용한 새로운 컨셉트의 신작 공연이 유독 많았다. -필자 주-
국립무용단은 드물게 KB하늘극장을 정기공연의 무대로 정했다. 어린이 청소년이나 낮 시간에 하는 특정 계층 대상의 공연이 아니라 국립무용단이 정기공연 무대로 해오름극장이나 달오름극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시설의 KB하늘극장을 선택한 것은 의외였다.
예술감독 윤성주가 구성과 안무를 맡은 <신들의 만찬>(9월 4-7일, 평자 6일 공연 관람)은 KB하늘극장의 구조를 십분 활용한 작업으로 눈길을 끌었다. 제작진들은 타원형의 객석에서 바라보면 가운데 위치한 원형의 평면 무대 외에 정면과 좌우 측면의 2층 공간을 신들의 공간과 이승의 공간으로 분할, 인간과 신들의 경계를 별다른 무대 전환없이 소통시키고 있다.
이들 두 개의 공간 사이로 저승길과 제단을 만들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시도 역시 연출적인 면에서 돋보인 시도였다. 신들의 몸을 치장한 민천홍의 의상과 백색과 연한 푸른색을 활용한 현대적인 감각의 엄진선의 무대미술은 비주얼적인 면에서 한국적인 컨템포러리댄스 작업에 큰 힘을 더했다.
빼어난 공간 활용과 비주얼적인 선명한 발현에 비해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무용수들에 의한 움직임 조합에서는 힘에 부쳤다. 저승사자, 산자와 망자 등의 캐릭터가 보다 선명하게 각인되지 못한 점, 신과 무당들의 춤이 늘 보아오던 움직임 조합에서 벗어자지 못했다. 이번 공연은 작품의 제작 컨셉트와 무대 공간의 조합이 나쁘지않게 짜여진 만큼 차후 다양한 춤의 조합과 원형 무대를 이용한 열린 판의 장점을 살려낸 연출이 보완된다면, 국립무용단의 경쟁력 있는 레퍼토리로 안착할 만한 작업이었다.
5명 젊은 안무가들의 작업을 엮은 국립현대무용단의 <11분>(9월 5-8일, 자유소극장, 평자 8일 공연 관람)은 기존 자유소극장의 무대를 승강 무대로 다채롭게 변용, 안무가에 따라 작품의 차별성을 드러내게하는데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안무가마다 각기 다른 색깔의 음악을 접합시킨 K-Jazz 트리오의 라이브 연주는 적지 않은 장면에서 치열한 움직임과 다채로운 음악이 만나는 소극장 공간에서의 특별한 체험을 선사했다.
반면에 무용예술이 움직임을 매개로 하는 창작 작업이란 측면에서 보면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는 기대치에 못미쳤다. 오히려 개개 안무가들의 작업을 별도의 피스로 분리, 안무가들의 독립적인 작업으로 연계시켰다면 그 자체로 비교하는 재미가 더했을 것이다. 국립현대무용단 새 예술감독 안애순에 의한, 개개 안무가 작품의 브릿지 시도를 통한 연출은 그러한 시도가 빚어낸 버거움 때문에 작품을 감상하는 저해요인이 되었다.
하나의 텍스트를 정해 놓고 다른 안무가들의 작업을 하나의 주제로 관통시키는 시도 자체는 나쁘지 않으나 이 경우 분명하고 세밀한 컨셉트의 설정과 함께 안무가 선정과 이후의 작업 과정 역시 오랜 시간 준비를 필요로 한다. 안무자가 직접 무용수로 출연까지 해야 하는 상황에서의 과도한 주문은 선정된 아티스트의 안무가로서의 독창성과 무용수로서의 개성까지도 반감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무대에 오른 댄스시어터샤하르의 창작 발레 <이상한 챔버 오케스트라>(9월 3-5일, 평자 4일 공연 관람)은 가족들이 함께 볼 수 있는 코믹한 소재의 작업을 표방하고 제작된 이른바 타켓형 작품이었다.
지우영이 안무한 이 작품은 피아노 외에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등 현악기 연주자와 테너 소프라노 바리톤으로 구성된 성악가들이 연주자 뿐 아니라 간단한 퍼포머로도 함께 참여하도록 짜여졌다.
CJ토월극장의 오케스트라비트를 활용하고 33개 직업군이 등장하는 캐릭터 댄서들로 조합된 구도는 가족 발레 작품으로서 충분한 소구력이 있어 보였다. 여기에 일반 대중들이 즐겨보는 TV 개그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남성 발레 댄서들을 패러디한 장면과 스마트폰을 통해 급속히 번진 한 나이든 아줌마와 통신회사 직원간의 대화가 녹음된 음원 등을 활용 관객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TV 프로그램 등을 연계시킨 친숙한 소재가 대중발레로서의 경쟁력을 갖긴 했지만 이 작품은 게스트 댄서로 합류한 중진급 발레 지도자들이 등장하는 장면으로 인해 작품의 완성도가 크게 타격을 받았다.
이 작품이 가족들이 함께 보는 발레 상품으로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댄서들의 춤 기량을 업그레이드시키는 노력과 함께 더욱 세밀한 연출력의 보안, 무슨 이벤트 하듯 연계성이 없는 댄서들의 출연을 과감하게 차단하는 시도가 뒤따라야 할것이다.
춤 전용 소극장인 두리춤터에서 공연된 Under Current Dance 컴퍼니 육미영의 신작 <이웃집 할머니>(9월 7-8일, 평자 8일 공연 관람)는 무엇보다 소극장 공간에서 관객과의 소통을 염두에 둔 작업임이 한눈에 엿보였다.
두명의 퍼포머가 시종 작품을 이끌어가는 구조 속에서 육미영은 댄서 대신 연극배우를 자신의 파트너로 선정했고, 이같은 안무자의 선택은 리얼한 연기로 할머니의 노년을 빗댄 상황설정을 통해 관객들을 작품 속에 몰입시켰다.
간간이 만들어내는 육미영의 선 굵은 지체의 라인, 얼굴표정과 몸짓에서 드러나는 노년의 성에 대한 감성적인 터치 등이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이 작품은 그러나 종반부 너무나 자의적인 어린이들의 등장 장면에서 방향감을 잃어버렸다. 과도한 소품의 활용을 절제시키고 오히려 두 퍼포머의 움직임과 농밀한 연기로 또 다른 상황들을 설정해 나간다면 관객과의 교감의 수위도 더욱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국립국악원이 지난 4월에 개관한 연희풍류극장은 1,300석의 연희마당과 130석의 소극장 풍류사랑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방문한 풍류 사랑방은 방석을 깔고 앉는 객석이라기보다는 마치 사랑방이나 대청마루에서 공연을 보는 듯한 구조부터가 색달랐다.
9월 11일 이곳 풍류사랑방에서 공연된 <최경자 춤의 정원>은 최경자의 개인 전통춤 무대로 이 새로운 공간과 전통예술 공연과의 궁합을 엿볼 수 있는 자리였다.
우선 마이크 없이 그대로 전해지는 국악기의 울림이 여느 전통 공연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중견 무용수의 몸에서 배어나는 묵직한 춤과 정교한 춤사위는 현란한 조명 대신 빛 그 자체와 만나면서 춤추는 무용수의 몸이 만들어내는 질감 그대로를 전해주었다.
<태평무>에서의 남색 치마와 연녹색 상의, <살풀이춤>에서의 백색과 자주색 고름, <승무>에서 장삼의 배색은 원형 그대로 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그리 높지 않은 무대와 연주자와 춤꾼- 음악과 춤의 조화는 새로운 공간의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이렇듯 이날 공연은 종래 지나친 극장 조명의 남발과 잘 조율되지 않은 국악기 연주와 음향과의 부조화가 주는 시청각적인 문제점을 말끔히 해소한 무대였다. 이같은 쉽지 않은 작업은 바로 눈앞에서 관객들의 시선과 마주해야 하는 적지않은 부담감을 27년 동안 국립국악원의 무용수로 재직한 경력이 말해주듯 한영숙류 춤을 향한 한 무용수가 일궈낸 꾸준한 정진의 산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