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7월 더바디댄스컴퍼니는 <더 로드>를, 장은정무용단은 <하나>를 공연하였다. 두 공연은 전혀 상이한 경향 가운데서도, 함께 생각해볼 점을 제공하였다. 전자는 듀엣 춤이라는 흔치 않은 양식을 완성도 높게 제시하였다. 후자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에서 노년 여성을 전문 무용수들과 더불어 출연시켰는데, 근래의 커뮤니티 댄스 차원의 기법을 전문 춤 공연에 적용한 사례로 꼽힌다. 춤계의 다원화 현상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두 공연은 묶어 소개될 만하다.
더바디댄스컴퍼니 〈더 로드〉
이윤경-류석훈의 이번 작품
로드는 삶의 길을 은유한다. 작품과 더불어 두 사람과 함께 인생 여정을 밟으며 우리는 어느덧 종착지에 이른다. 그 사이 두 사람이 빚어내는 여러 순간들과 펼쳐지는 변주들은 장시간의 듀엣이 유발할 법한 단조로움에 빠져들지 않으면서 관객의 공감을 계속 살려가는 강점을 보였다.
<더 로드>에서 삶은 구체적 인생사로 묘사되지 않고 은유로 묘사된다. 그 삶이란 것도 듀엣의 두 사람이 일궈온 삶의 성격이 짙은 가운데 다시 삶 일반으로 해석될 여지를 갖는다. 삶을 되돌아볼 만한 연륜에서 자신의 삶을 압축 요약하는 일은 다반사일 터이며, 누구에게나 그런 습관은 반복될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춤으로 <더 로드>를 꼽게 된다.
이번 공연은 전체 5부분으로 설정되었다. 첫 부분의 ‘삶의 길’에서부터 마지막 부분 ‘아리랑 길’까지 부분들 사이의 인과성이 명료하지 않은 상태에서, 각 부분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언급된 키워드가 더 눈에 띈다. 꿈꾸기, 스며들기, 시나위, 빈 몸, 사유의 몸, 사랑... <더 로드>의 아웃라인에 해당하는 이들 키워드는 복합적으로 버무려져 이윤경-류석훈 듀엣 춤을 유다른 경지로 끌어들였다.
직사각형의 조명 패턴이 바닥에 비춰진 상태에서, 작은 망치로 내리쳐지되 옅은 여음을 남기는 종소리가 뜸을 둬서 울리고 무대가 점차 밝아지면 바닥에 꿇어앉은 여성(이윤경)과 엎드려 누운 남성(류석훈)이 모습을 희미하게 드러낸다. 두 사람은 각자 사각형의 한 모퉁이에 대각선 형태로 떨어져 위치한다. 종소리 회수가 늘고 또 강해지는 대각선 형태의 백색 조명이 두 사람을 또렷이 연결한다. 옅은 살구색의 가벼운 가운을 입은 두 사람은 손에 붉은색 장갑을 끼었다. 남성이 몸을 일으켜 대각선 조명의 발광체를 향해서 여성에게 근접하고, 여성은 계속 두 손 모아 기원하는 자세를 취한다. 남성은 여성에게 근접함으로써 기원의 의식에 동참하며, 마침내 두 사람은 삶의 길을 함께 하는 관계임이 암시된다.
오체투지(五體投地)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삼보일배(三步一拜)를 강하게 연상시키는 이 도입부는 단적으로 경건하며, <더 로드> 공연의 기저를 이루었다. 이런 기저 속에서 붉은 장갑을 벗고 이어가는 부분들에서 두 사람은 서로 스며들기 시작하여 어울림, 얽힘, 들어안음과 같은 여러 모습들을 무수한 움직임으로 펼치며 때때로 물흐르는 듯이 유연한 장면을 연출하는 중에서도 독실한 신심(信心)을 여실하게 표출하였다. 두 사람이 서서 마주 대하는 부분에선 밀레가 그린 <만종>을 연상하는 것은 퍽 자연스런 일이다. 이와 더불어 염불 형태의 구음과 아리랑 변주음들은 <더 로드>의 분위기에 깊이를 더하면서 이른바 한국적 정취를 도드라지게 하였는데, 여느 현대춤에선 접하기 어려웠던 정감이 느껴진다.
<더 로드>는 숙성된 춤이자 일정한 경지가 감지되는 듀엣 춤이다. 듀엣 춤에서 핵심 관건은 호흡 맞추기에 있다. 그 같은 호흡은 두 사람 사이에 움직임뿐만 아니라 정서와 연출에서도 합치된 어떤 상태를 요한다. 당연한 지적일지 몰라도, 관객과의 공감 이전에 이번처럼 듀엣 당사자들 간의 ‘전문적인’ 공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은 환기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공감을 바탕으로, 이윤경의 청아한 자태의 몸짓을 류석훈이 원색적 질감의 움직임으로 유연하게 뒷받침하는 과정에서 에너지가 다양한 양상으로 안배된 움직임들에 힘입어 <더 로드>는 탄력 있게 전개되었다.
장은정무용단 〈하나〉
장은정무용단은 <하나>(아르코예술극장, 7. 5-6.)를 제목으로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와 <하나>, 2편의 작품을 올렸다. 전자는 지난해 공연의 재공연작이며, 후자는 현대무용가 김기인의 1984년 안무작을 리바이벌한 것이다. 일상을 현대춤화하는 데 주력해온 장은정이 이미 한 세대 전의 작품을 리메이크(개작)한 일이 좀 이례적으로 여겨지지만, 의미 있는 작업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는 안녕하지 않은 상황을 무대화하는 반어법을 구사한다. 그 같은 상황을 반전시킬 단서를 작품은 어느 할머니에게서 찾았다. 여기서 특기할 바는 일반인 할머니(이선자)를 출연진의 한 사람으로 기용한 점이다. 안나 할프린, 오노 가즈오 같은 예외가 없진 않으나, 발레나 현대무용에서 고령 세대가 춤에 등장하는 관례는 무척 드물다.
잘 알려진 노래 ‘매기의 노래’가 바이올린 선율로 울려퍼지면 붉은 한복으로 곱게 단장하고 양산을 받쳐든 할머니가 마치 손녀 같은 바이올린 주자에 이끌려 무대를 살펴보고 돌아간다. 그 다음에 등장한 예닐곱 명의 젊은이들은 자기들의 집단 행동을 통해 상황 감각을 표출한다. 붙잡기, 빠져나가기 같은 동작으로 연결되는 재빠른 질주, 부딪침 그리고 멈춤이 주도하다시피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가 묘사하는 그들의 일상은 순탄치 않은 긴장의 마당일 뿐이다.
원인이 제시되지 않은 상태로 묘사되는 그 긴장은 안영준·신종철·윤푸름·최진한 등 출연진들의 민첩한 움직임에 힘입어 일견 짜임새 있게 진행된다. 출연진들 사이의 상충된 움직임들이 표면적으로 상당히 공세적이며 날카롭게 보이는 반면에, 그런 긴장되며 상충된 행동들이 사실은 비루해서 고독한 상대를 오히려 방관하지 않으려는 배려에서 연유하는 듯하기에 이를 목격하는 객석의 안타까움은 깊어간다. 출연진들이 서로 의지하고 위무하지만 모두가 스러진 현장에 할머니가 원피스 차림으로 등장하여 종종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다 퇴장한다. 이제 일어나는 그들은 이전보다 조화스럽게 어울리는 관계를 찾아 소통하는 움직임을 펼친다. 이 대목에서 또 다시 할머니가 등장하여 대미를 장식한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의 결말에 해당하는 그들의 어울림은 할머니가 무대 위에서 보내는 온정적인 시선으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이번 공연은 집단무에서 유사한 패턴들이 반복되고 무용수들 사이의 감정 나누기가 엷어 객석과의 공감이 고르지 않은 편이었다. 한편으로, 여기서 할머니의 존재감은 그 역할을 다시 생각하도록 하였다. 전문 춤 기량보다는 연기적 몸짓으로 공연에 동참한 할머니는 물론 춤 측면의 기여도가 옅다 할지라도 출연 자체의 비중은 낮지 않다. 할머니는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동참을 이루고 함께 작품을 마무리지었다. 이처럼 안무자는 노년 여성의 예기치 않은 중량감을 무대에서 ‘발견’해내어 노년의 시선을 작품의 윤활유로 삼았다. 더 넓혀 보아, 인간의 존재 자체를 춤 무대로 끌어들이는 발상이 점차 시도되는 현시점에서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는 시금석으로 받아들여진다.
<하나>는 이번 여름의 관심작이었다. 과묵한 무용가 김기인은 특히 80년대 말 몸의 내적 흐름을 춤화한 독무를 비롯 꾸준한 작품 활동으로 많은 이들에게서 주목받아 왔으나, 몇 해 전 돌연히 타계하여 충격을 안겼다. 김기인의 춤 세계는 언젠가 정리될 테지만, 이와는 달리 장은정이 이번에 김기인의 <하나>를 리바이벌한 동기는 개인적인 데서 비롯한다. <하나>는 장은정의 대학 신입생 시절 선배 언니들이 김기인의 안무로 만든 것으로 장은정의 기억 속에 내내 남아 있었다 한다.
이 작품을 수용하려면 원작자(김기인)의 생각부터 들어볼 필요가 있다. 장은정이 쓴 작품 소개글에서 어디까지 김기인의 생각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김기인의 생각을 쫓아 썼을 게 분명한 소개글은 이렇게 적었다. “나는 한 점...에서 시작되었다... 너는 한 점...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너를 만나러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간다... 너는 나의 팔과 다리를 먹고 꿈꾼다... 우리는 그렇게 같은 꿈을 꾼다...” 나와 너의 가까운 운명과 합일을 꿈꾸는 듯한 김기인의 심상이 읽혀진다. 이번 공연을 준비하며 장은정은 초연작의 네 출연진을 접촉해서 작품 구성의 원소재를 구했음은 물론이다. 상당히 먼 시기의 춤을 리바이벌 혹은 복원할 때, 춤 기법 교육 환경과 공연이나 작품 수용 관행에 의해 이런저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으므로 완벽한 복원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져 있다. 물론 이번 공연의 목적은 복원에 있기보다 재안무가에게 강한 추억으로 남은 작품을 재현하는 데 있을 것이다.
검정색의 짧은 속치마 같은 민소매 의상을 걸친 네 여성이 펼치는 <하나>는 지금 보니 얼마간 고풍스럽다. 의상의 색조와 형태, 둔탁하며 꾸밈이 매우 덜한 움직임, 그리고 엉키다가 이지러지는 느린 동작 패턴들에서 이 시대에 흑백의 영상을 대하는 것 같은 그런 인상이 완연하다. 오늘날의 춤에 비해 세련미가 훨씬 덜하며 움직임이 느리면서 묵직한 것도 차이점으로 지적될 만하다. 이 작품에서 피아노 반주의 육성으로 노래된 슈베르트의 가곡들은 그냥 배경 음악에 머물지 않고 작품의 내러티브 구실을 하였다. 작품 도입부의 ‘세레나데’와 종지부의 ‘아침 인사’를 비롯하여 ‘보리수’ ‘넘치는 눈물’ 등 6곡은 작품의 전개를 암시하는 구실을 한다. 낭만주의 음악의 전형인 슈베르트의 내면지향적이되 간간이 격정적인 애상곡들이 춤에서 그대로 재현된 것은 아니며, 그 정서적 율조는 그대로 반영되었다. 의상, 환하지 않은 조명, 슈베르트 가곡 등으로 미루어 <하나>는 한밤의 꿈 세계를 소재로 하였고, 작품은 꿈 속에서 여성(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모습을 담백하게 전개하였다.
이 작품은 초연 당시 에로틱하다, 레즈비언적이다는 식으로 조용한 파문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민소매와 짧은 속치마로 사지를 드러낸 여성들이 몸을 접촉하는 것이 당시에는 금기시되었다는 뜻이므로, 격세지감이 있다. 역으로 말하면, 그러한 시대상에서 김기인은 탈출을 감행하였고, 춤의 범상치 않은 모습을 갈구하는 의도를 무대에서 결행하였다. 김기인은 무대 안팎에서 현대무용계의 주류와는 얼마간 거리를 둔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자신이 30대에 진입하던 젊은 시기에 좌고우면 없이 자신의 의도를 소신처럼 내비친 작품이 <하나>인 듯해서, 이번 공연에서는 당대 춤계 상황을 새삼 되짚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