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김용걸의 <워크(Work) 2>는 발레계의 화제작이었다. 2011년 처음 개최된 대한민국발레축제에서 그의 <워크>가 공연되었다가 2012 대한민국발레축제에 다시 초청받은 사실이 이를 대변한다. 그런데, 2012년에 손질되어 이름을 고쳐 올려진 <워크 2>를 한국춤비평가협회는 ‘2012 올해의 작품상’에 선정한 바 있다. 그 선정 이유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발레의 엄정한 고적적인 틀의 수련과 아울러 고전적 틀의 현대적인 확장을 기해야 하는 현시점에서, 오늘날 발레가 추구하는 그러한 양면성을 발레 고유의 조화미와 발레 무용수의 주체적이면서도 생명력 충만한 춤 소화력을 바탕으로 균형 있게 달성하여 국내 발레 창작에서 쇄신된 계기를 제시하였다.”
이번의 <워크 2-1> 역시 올해 대한민국발레축제에서 초청받아 올려졌다(6. 24.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그러고 보면, 김용걸의 <워크>는 이제 일련의 시리즈가 되었고, 각 버전 모두 대한민국발레축제에서 연달아 올려졌기에 <워크>는 대한민국발레축제가 거둔 수확으로 기억될 법하다.
<워크 2-1>은 <워크> 시리즈가 더 이어질 것임을 예감케 하는 제목이다. <워크 2-1>은 이전 두 버전의 기조, 즉 고전적 발레의 틀을 현대적으로 확장하는 것과 작품 소재 그리고 공중에 매달린 바 및 타이츠 차림새 등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와 함께 몇 가지 추가된 장면들에 힘입어 이번 공연은 버전업 형태로 발표되었다.
<워크 2-1>에서 작품의 막이 오르기 전에 설정된 서주 장면은 이번에 추가된 부분이다. 강철이 얼기설기 엮이어 공중에 매달린 그 아래에서 클래식 튀튀를 입은 발레 무용수가 역시 허공에 매달린 채 허우적거린다. 그런 발레 무용수를 검정 정장 차림의 남성이 멀직이서 지켜본다. <백조의 호수> <빈사의 백조>에 등장하는 무용수의 팔놀림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발레 무용수의 움직임이 허공에 매달려 너울댈 뿐 더 어쩌지도 못하는 백조를 재현하고 있음을 감지하기 마련이다.
스포트라이트 조명 아래서 1분 정도 진행되는 이 장면은 짤막하지만 결과적으로 <워크> 시리즈를 보다 명료하게 이해하도록 하는 길잡이 구실을 한다. 실제로 백조 이미지는 고전발레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백조가 견고한 강철 새장에 갇힌 채 애타게 구원을 기다리는 것처럼 설정된 이 서주 장면에서는 고전발레에 대해 안무자가 갖는 문제의식이 강하게 시사된다. 즉, 지금 고전발레는 만족스럽지 않다.
이 부분이 암전되고 나서 막이 오르면 무대는 좀 어둡고 눈에 띄는 발레 스튜디오의 다섯 개 바에서 열댓 명의 무용수들이 바 워밍업 모습을 각자 나름 진중하게 연출한다. 워밍업 도중에 발레 마스터(김용걸)가 불쑥 등장하여 손뼉으로 행동을 중지시키면 모두들 말없이 흩어져 퇴장한다. 마스터가 지켜보는 가운데 다섯 개의 바는 연결 고리로 묶여 흔들리다 서로 부딪치는 금속성 굉음을 울리며 공중으로 끌어올려진다. 이 부분까지는 <워크 2-1>의 도입부이다. 이후 작품 진행 내내 다섯 개의 바는 공중에 매달려 있다.
<워크> 시리즈는 고전발레를 향한 의문문(疑問文)으로 그득하다. 백조가 고전발레의 정서적 상징이라면, 고전발레의 물리적 상징으로 통용되는 것은 바와 튀튀이다. 그런데 <워크>에서 캐릭터로 등장한 발레 마스터는 발레 스튜디오의 가장자리 혹은 중앙을 차지(해야)하는 바를 아예 시작부터 허공으로 이전시킴으로써 고전발레에 대해 괄호치기(에포케)를 결행하였다. 발레와 떨어질 수 없는 바를 이처럼 움직임과 전혀 무관한 허공 공간으로 이전시키는 전략은, 발레에서 일상적이며 필수적인 관행을 정지시키는 그런 차원에서 일종의 결단으로 받아들여진다.
장식처럼 매달린 바 아래에서 그들은 스무 여남은 명, 열댓 명의 집단무는 물론 이인무, 삼인무, 사인무를 이어갔다. 발레 무용수들은 모두 레오타드 타이츠를 착용하였다. 여기서 고전발레는 또 한번 괄호쳐진다. 튀튀 그리고 남성 성장(盛裝)과의 결별.
발레 바와 고전발레 의상을 괄호치는 <워크> 시리즈에서 움직임은 통상적인 발레 어법과 거리를 둔다. 일례로, <워크 2-1>의 이인무는 고전발레의 이인무와 비교해 확연한 차별성을 보였다. 고전발레의 이인무는 다들 알고 있듯이 프웽트로 직립하거나 아티튀드, 아라베스크, 빠른 그랑 주테의 여성을 남성이 대개는 우아하게 때로는 세차게 지탱한 후 리프팅으로 완결되는 게 정석이다. 이에 비해 <워크 2-1>의 이인무는 우아함과는 아주 동떨어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워크 2-1>의 매우 인상적인 이인무 한 가지를 보면, 여기서 여성은 흰색 튀튀를 차려 입었는데, 남성의 지탱에 의지하면서 프웽트 상태에서 허벅지가 아랫다리를 향해 접혀지며 주저 앉는듯하다가 곧 펴지고 이내 여성이 남성의 지탱에 의지해서 일순간 몸통을 휙 돌려 낮추면서 양쪽 다리를 바닥에 앉히고 180도로 뻗치는 스트레치로 귀착된다. 일반적으로 발레 이인무에서 두 주역이 능동적이어야 하겠지만, <워크 2-1>의 이 이인무에서는 두 주역이 끊임없이 움직임을 교환하며 움직임을 산출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워크> 시리즈에서 움직임들은 계속 다듬어지고 변화의 밀도를 더해왔었다. 고전발레의 정교한 기본기를 전제로 하되, 그것을 변형한 움직임들이 물밀 듯이 밀려든다. 말하자면, 고전발레, 컨템퍼러리 댄스 그리고 접촉즉흥이 무수하게 어우러지는 이 작품은 움직임의 일대 향연(饗宴)을 펼친다.
<워크 2-1>에는 앞서 소개한 서주 장면 이외에 검정색의 팬케이크 튀튀, 그리고 두 군데 더 하얀 튀튀가 출현한다. 중반의 어느 순간 여남은 여성들이 하얀 튀튀 차림으로 등장해서 비발디의 ‘사계’ 흐름을 타면서 발레 테크닉을 구사하며 레오타드 타이츠의 남성들과 빠른 동작으로 직선 대형을 형성하면서 커플을 이루고 남성들은 짧은 순간 그들을 무릎에 눕힌다. 하얀 튀튀들이 모두 백조를 지시하는 듯해도 여기에 왕자는 없으니 일말의 러브 스토리가 깔려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한 여성 무용수가 하얀 튀튀 차림으로 김용걸과 이인무를 고난도(高難度)의 움직임으로 이어간다. 이 부분은 고전발레와 그 테크닉에 대한 발레 마스터의 갈등 혹은 애증(愛憎)을 표출한 대목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 튀튀는 여전히 고전발레의 한 상징에 머문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워크> 시리즈에서 발레 괄호치기는 소재이며, 심지어 작품 주제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고전발레와 거리를 둘 때 우리는 어떤 구성을 택하게 될까? 아마 자신들이 해낼 만한, 해내고 싶은 움직임으로 구성할 것이다. <워크>에서 그들은 발레 테크닉, 컨템퍼러리 댄스, 접촉즉흥을 혼합한 움직임을 현란하게 구사하였다. 그래도, 기억컨대, 발레 테크닉 교본에서 흔히 보임직한 테크닉이 고스란히 재현된 부분은 전혀 없었다. 여기서 안무자의 동작 응용력이 두드러져 보인다.
<워크>에서 각각의 움직임은 제 나름 곧은 라인과 뻗침, 빠른 다리 휘두름새 그리고 유연한 팔놀림을 보이면서 그것이 엄정한 발레 테크닉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확연히 드러내었다. 무용수들의 현란한 움직임들은 다양성 면에서 진폭이 크고 종횡무진 주유하며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발산하였다. 이번에도 전반적으로 20대 초반의 무용수들이 발산하는 청신한 에너지가 완연한 반면에 그들의 표현력은 더 무르익을 필요가 있어 보였다. 움직임에서 나이는 어느 정도 필요조건인 것 같다. 안무자이자 출연자인 김용걸의 움직임 또한 나이를 초월하여 젊은 무용수들과 호흡을 맞추는 한편 그들의 움직임을 인도하는 편이었다. 이러한 기조 위에서 <워크 2-1>은 스토리텔링을 사실상 배제한 상태에서 고전발레 뛰어넘기를 시도하는 다양한 양상을 작품의 소재로 보이고, 이를 다시 주제의 하나로 구현하였다. 다시 말해 고전발레 괄호치기는 발레의 포기가 아니라 발레를 딛고 다시 설 것을 기약하는 작업임을 직감하게 한다.
<워크 2-1>은 <워크 2>의 연속작으로서 움직임에서 밀도가 높아졌고 남성 무용수의 투입이 늘었으며, 배경 음악 실연(實演; 라이브 연주)을 몇 장면 추가하였다. 바이올린의 이영준, 카운터테너 이희상, 기타리스트 서장실, 피아니스트 김상현의 독주들은 움직임의 생동감에 힘입어 실연의 맛을 발산하였다. 이영준이 바이올린을 켜며 이동하면서 독무 무용수와 어울리는 부분은 흔히 연상됨직한 장면이긴 할지라도 국내에선 드문 방법이다. 카운터테너-기타리스트의 세트 실연 연주을 배경으로 김용걸이 여성 무용수와 고난도의 이인무를 진행하면서 프웽트를 섞어가며 허벅지 구부림과 무대 바닥 스트레치를 연속으로 실행하도록 분투하는 모습은 실연 연주의 잔잔한 바로크풍 소리들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이들 음악 실연을 배경으로 한 춤 장면들은 작품 전개에 참신한 변화를 일으키는 효과가 적지 않았다. 특히 이 대목에선 고전발레와의 사투(死鬪)에 전념할 뿐 그 아무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집중성과 냉정함이 부각된다.
(고전)발레에서 흔한 꿈이나 환상은 <워크>와 전혀 무관하다. <워크> 시리즈에서는 무대에서 보여지는 것을 보면 된다. 캐릭터도 꿈과 환상의 세계도 배제된 상태에서는 움직임부터 보일 텐데, 다만 그런 움직임의 맥락이 상기될수록 바람직스럽다. 여기서 그 맥락이란 고전발레 괄호치기일 것이다. 고전발레 괄호치기가 명쾌한 한편으로 제대로 달성되려면 움직임에서 뒷받침을 받아야 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헛구호에 맴돌기 마련이다. 자칫 무미건조해지기 쉬운 소재를 <워크>가 농후한 질감으로 표현할 수 있은 것도 새로운 발상으로 구현된 움직임 덕분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워크>의 주제는 고전발레 괄호치기 그리고 새 발상의 움직임 느끼기, 두 가지로 집약된다. 많은 관객들이 고전발레 괄호치기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 터이고, 또 언젠가는 고전발레 괄호치기가 주제로서는 희석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 두 주제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참조하는 관계에 있다. <워크> 시리즈에서 두 가지를 함께 강조할 필요 없이 움직임에 훨씬 더 초점을 맞추는 그 시점에 국내 발레도 그만큼 고전발레 편식을 벗어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