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제19회 신인춤제전 〈젊고푸른 춤꾼 한마당〉
지역춤을 조명하다 : 과정의 미숙함을 지속적 도전으로 극복하길 바라며
김혜라_춤비평가

 부산·경남 지역 춤꾼들의 신인 등용문으로 알려진 제 19회 신인춤제전 <젊고푸른 춤꾼 한마당>이 부산 민주공원 소극장에서 3월 29~31일 열렸다. ‘푸른춤’과 ‘젊은춤’으로 구성된 총 20개의 작품은 지역 내 대학 졸업작품전에서 선출된 우수작품 9개로 구성된 푸른팀과 본 춤제전을 거쳐 간 출연자들로 구성된 젊은팀 9작품 그리고 부산을 거점으로 춤활동을 시작했던 트러스트무용단의 찬조출현 2작품으로 구성되었다.
 대학내 무용과 존립 기반이 흔들리는 현 위기상황에서 특히 지방대학의 무용과는 폐지되거나 다른과로 통합되는 직격탄을 맞고 있으며, 대부분의 공연문화가 서울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상황에 기인한 지역적 소외도 주요한 문제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지역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19회라는 짧지 않은 역사를 꾸려온 사단법인 민족미학연구소의 행보를 통해서 필자는 채희완 예술 감독의 지역의 창발적인 신인발굴에 대한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또한 새내기 춤꾼들의 데뷔뿐만이 아니라 역대 출신자들에게 지속적인 작업을 지지하는 활동의 장(場)을 제공하여 현재까지 이곳을 통해 데뷔한 부산·경남지역 출신 춤꾼들이 200여명에 이르는 등 지역 춤계와 교량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신인춤제전의 의미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효율성 있는 기획이라 할 것이다.
 비록 표현이 다소 어리숙한면이 있지만 신인들의 무대는 기성세대와는 다른 신선한 시각이 있기에 나름 풋풋한 향기를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 있으리라 예상 되었다. 또한 부산지역의 투박하지만 깊은 정을 경험한바 있는 필자는 본 공연을 통해서 지역적인 성향과 색채가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도 궁금하였다.
 본 공연의 전체적인 작품당 시간은 5분에서 10분 내외로 구성되었다. 먼저 젊은팀의 공연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윤채린 안무의 <낙엽시초>는 흔들리는 자아 존재성을 서정적인 분위기로 풀어내었다. 그러나 초반부의 긴장감을 주는 몸짓과 집중력에 비해 후반부에서 현존의 고뇌가 흩어져서 앞선 맥락과 연계성이 약해 보였고 불안과 초조한 감정때문에 전체흐름이 전복된 느낌을 주었다.
 반면에 강지영의 <사탕발림>은 유혹이라는 달콤하면서 순간적인 감정을 풍선이라는 소재와 함께 남녀간 밀고 당김, 소위 밀당을 하듯 유쾌하게 다뤘다. 특히 소극장 공간에서 관객에게 전이되는 에너지 간격을 적절히 사용하여 춤으로 보일 수 있는 공감대를 잘 형성했다. 박은지의 <언덕위에 서서>는 두려움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발상이 신선한다고 볼 수 있는 작품으로, 휴대용 의자나 장난감 같은 상징적 소품을 이용해 불안하지만 두려운 현실 밖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꾸는 모습을 그려내었다.




 또한, 구하사의 <남, 眼>은 타인의 시각에 자유로울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심플한 조명사용이 표현적 움직임에는 적절히 작용되었으나, 뷔그만이나 그라함이 연상되는 전체적인 인상은 안무자의 신인다운 신선한 접근이 상대적으로 약해보이는 경향성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수향의 <진화> 역시 우주적 존재인 나와 맞닿음을 춤으로 풀어내고자 하는 의도가 보였으나, 그러한 생각을 움직임으로 연계하는 과정에서 모호해진 느낌이었고 이런 모호함이 해당 주제를 다루기엔 아직 몸과 철학에 대한 사유가 부족하게 생각되었다.




 임효주의 <정(正)·반(反)·합(合)>은 헤겔의 철학적 사유를 지나치게 표면적으로만 이해하여 작품의 기승전결 구조만으로 대변하고 있었으며, 마치 무용 콩클용 춤을 보는듯한 설익은 인상을 주었다. 살아 움직이는 활발한 움직임으로 진화하는 자신을 표현하려는 안무가의 의도는 심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겠으나, 작품자체에서 그와 같은 의도가 충분히 반영되었다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철학적 주제나 제목이 주는 무게감을 가볍게 반영하데 신중해야 하겠다. 허유라의 <뫼비우스의 띠. 그 위를 걷다>는 적막하고 고요한 분위기로 안무가의 철학적인 생각을 담아내고자 의도하였으나 관록과 경험이 충분치 않은 신인의 특성상 이와 같은 주제가 자신의 생각으로만 머물러 보편적 표현으로 관객에게까지 전달되기까진 아직은 공허하게 보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반면에 이용진의 <AWAKENING>은 전체적으로 호기심을 유발시켰다는 점에서 작품 구성 능력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안무자는 문득 떠오르는 감각적인 단어를 몸으로 담아내는데 충실하므로써 관객에게 주입식으로 던지는 주제적 접근과는 차별성을 보여주었고, 오히려 관객은 안무가의 무의식적 자의식이 투영된 과정을 보며 흥미로운 해석과 대상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 같다. 또한, 허하나·강여진·김미현·이예진·최단비·구서희(공동안무)의 <Yesterday is dead>에서도 밀도 있는 시간 설정을 통해 어제와 현재에 살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환치된 공간에서 진솔하게 표현하였으며, 춤계 아이돌을 보는듯, 군무에서 느껴지는 에너지와 즉흥적으로 관객과 대화하며 전체를 이끄는 짜임새 있는 안무를 보였다.




 뒤이은 푸른팀의 작품들을 간단히 살펴보면, 김동희의 <잠기다>는 현실에서 옥조이는 자신의 심경을 표현하고자 하였으나, 내포된 절실한 심정과는 달리 형식적 표현에서는 기성의 패턴을 보는듯한 상투적인 기법에 머물러 아쉬웠다. 이연주의 <紅의 사정> 또한 紅의 다양한 이미지를 인간 감정의 변화무쌍한 정서로 연결하려는 의지는 보였으나, 주제와 표현을 잘 연결시키지 못해 추상적이고 막연한 느낌을 줄 뿐이었다.




 한편, 김지은의 <나를 만들다>는 신인다운 저돌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어 빈둥거리는 자신의 일상을 연극적으로 재미있게 풀어가면서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하였고, 가벼워 보이지만 그 안에 내재된 당당함과 솔직함이 오히려 진솔하게 다가왔다. 반면에, 이혜인의 <비움>에서는 비움만이 채움을 가능케 한다는 주제를 표현할 것을 기대했으나 너무 형상화된 춤으로만 구성되어 모양새가 주제와 어울리지 못하는 표현으로 여겨졌다.




 전해정의 <두 도시에 살고 있는 나>는 자신을 추스리며 독백하는 춤으로 관객에게 까지 공감대를 주기에는 약간은 난해한 춤으로 여겨지고 이를 해소하는데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마찬가지로 이상미·하소영(공동안무)의 <醉(취)>는 작심하고 음악에 취하여 놀아보고자 의도하였으나, 음악의 흥에만 단선적으로 이끌려 관객과의 공감이 부족한 느낌이었고 따라서 안무가들만 노는 모양새가 되어 아쉬움을 남겼다.




 또한, 이연정의 <명-鳴, 明>은 암흑과 같은 정적의 터널을 지나는 듯한 분위기를 표현하였고, 강경희<여자, 부르다>는 우리 춤사위 및 소리와 동시에 영어 말소리의 이질적이 결합이 깨끗히 정제된 느낌을 주지 못하고 거칠게 나열되어 안무가의 의도를 파악하기가 모호했다.




 이와 대비되게 김정은의 <기억할 만큼 지나침>은 무대를 구성하는 시각적인 감각이 뛰어나 보였으며 특히 과거의 기억과 현재를 춤꾼들 배치를 통해 무대 앞뒤로 중첩시켜 전체적으로 너울거리는 잔상이 입체적인 무대를 만들어 내는 효과를 보여주었다. 아쉬운점은 후반부로 진행되면서 너무 많은 얘깃거리와 감정을 드러내 식상한 부분이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춤에서 보일 수 있는 강한 임펙트인 정서적 여운을 준 것은 하나의 성과로 생각된다.




 ‘푸른팀’과 ‘젊은팀’의 마지막 작품으로 찬조 출연한 현재 트러스트 무용단원인 김지정의 <SWEAT>과 김동욱의 <패턴-Pattern>은 기성 춤꾼들 답게 신예들과는 달리 좀 더 성숙한 표현을 통해 춤추는 몸이 가장 빛날 수 있는 결정적인 인상과 결을 표현하였다. 특히 김동욱은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새>를 연상시키는 작품을 선보였는데, 그는 역동적인 움직임 없이도 몸에 대한 미학적 사유를 던지는, 미적 체험의 메커니즘을 잘 보여주었다. 뒷꿈치를 세운채로 긴시간 근육의 미세한 몸의 떨림을 지켜보는 관객은 생명이 약동하는 현장을 경험할 수 있기에 충분했다. 전체적으로 안무가가 스스로 춤추게 하는 우주적인 춤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있었고 춤을 통해 이러한 세계관이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으로 보였다.





 

차별화된 기획의 취지가 되살아나길 바라며….


 전체적으로 두가지 아쉬움을 가져본다. 첫번째는, 본 춤제전의 ‘푸른팀’과 ‘젊은팀’의 구별된 기획이 의도한 대로 춤꾼들의 성장과정이 확연하게 관객에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젊은팀’의 수준은 적어도 자기 주관적 생각이 관객에게 전달되는 과정에 대한, 다시 말해 보편적인 춤언어에 대한 고민이 어느 정도 투영되어야 하는데 전반적으로 주제를 정하고 가능한 움직임 언어로 채워나가는 듯 하다가 종국에는 주제가 모호해져 버리는 현상이 많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안무의 주체에만 머물지 말고 한 발짝 도약해 춤을 객관화시켜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정리된 표현에 대한 추가적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이를 위해서 우선적으로 자기논리를 일관적으로 끌고 나아갈 미학적 사유의 힘을 키워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라는 주관에만 머물것이 아니라 반대로 ‘나’를 들여다보는 객관화의 과정이 필요해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형식적인 면에서는 유행과 감각에 민감한 젊은이 다운 표현들이 보이지 않아 실망스러웠다. 이를테면 주제에만 몰입하는 단선적인 안무방식이 표현의 주를 이뤄 신인들의 생기발랄한 여유와 볼꺼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물론 공연 문화가 집중된 수도권에 비해 지역적으로 문화적 노출이 어려워 감각적 단련과 경험 기회가 부족한 환경 탓도 있겠고 개개인의 예술적 기질의 차이도 있겠으나, 전체적으로 작품의 분위기가 지나치게 상투적이고 무거워 감각적인 부분이 부족했다 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중 하나로 현 대학교육의 체계적인 창작 방법론의 부재도 문제로 작용을 했으리라 판단된다.
 두번째 아쉬운 점은, 본 공연의 취지가 신인춤꾼의 발굴과 데뷔 그리고 그것에 연계된 지원을 목적으로 하므로 한국춤, 발레, 현대라는 전공의 구별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지만 좀더 관객의 입장을 고려해서 시각적으로 구분되는 장르적 특성과 각 작품의 질적 수준에 따른 배치도 신중하게 고려했어야 한다고 본다. 무용 콩클 수준에 머무는 다소 어설픈 작품들과 관객에게 신선한 꺼리를 제공할 여지를 담고 있는 수준 있는 작품들이 뒤섞여 볼만한 작품에서 감동을 느낄 여운이 격감되는 점은 재배치를 통해 충분히 극복 가능했다는 점에서 지적하고 싶다.
 전반적으로 아직은 자기 독백적 표현 자체에만 머무는 미숙한 공연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어쩌면 이는 신인으로서 겪어야 할 당연한 과정으로 생각되며 더불어 사회의 출발선에 서있는 새내기 춤꾼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마치 좁고 가파른 민주공원 극장 길모퉁이를 올라가는 길같이 녹록해 보이진 않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젊음이라는 무기가 있기에 좌절하기 보단 지속적인 연구와 도전으로 흔들리면서도 오롯이 가야하는 그들의 춤이 이러한 녹록치 않은 행로에 버팀목으로 작용될 것을 기대하면서, 채희완 교수의 격려사인 “태극선의 활갯짓처럼 생명원천이 되살아나는 춤”을 이들이 추기까지 기성세대는 기다려 주며 지원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앞으로 신인춤제전이 배정된 시간에만 충실한 소비적인 공연이 아니라, 서로의 작품에서 자극받아 타지역으로 접속해 소통하고 발전해 나가는 부산지역의 춤문화 생산의 산파 역할을 해내는 축전이 되길 기대한다.

2013. 07.
사진제공_이장수, 국제신문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