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7개월간, 15명의 강사에 의해 진행된 안무가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을 통해 탄생한 13명의 안무가에 의한 작품을 보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다. 치열한 과정과 적절한 경쟁, 시스템과 강사의 열정과 지지 그리고 안무에 대한 야심찬 작가의식을 향한 연구물을 한꺼번에 13개나 만나게 된다는 건 현재 안무의 지평을 흔들 수 도 있는 강력한 지진에 몸을 던지는 것만큼의 흥분을 준다.
그러나 지난 1월 27일부터 2월 2일까지 하루에 3, 4명의 안무작이 발표된 '차세대 안무가 클래스 쇼케이스'공연(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은 한 작품 당 40분을 훌쩍 넘기는 러닝타임 덕분에 인터미션을 포함하여 전체 공연 시간이 3시간에 육박하는, 보는 사람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인내와 도전을 요구했으며 그런 공연을 4일간 지켜본 다는 것 역시 많은 관심과 에너지를 요하는 일이었다.
매번 이 쇼케이스 형식과 개념에 대해 지적되는 지점은 그것이 단어의 뉘앙스만큼이나 가볍지 않다는데 있다. 물론 이는 주최 측이 의도한 것처럼 인큐베이팅 과정의 결과물로써 아직도 'in progress'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며, 한국공연예술센터(이하 한팩)에서 이어질 '라이징 스타'의 무대에서 보다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기회가 예정되어 있다는 단계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올해의 무대가 관람자의 입장에서 더 힘들게 느껴졌던 이유는 작년의 9명에 비해 4명이나 늘어난 안무가의 수와 더불어 그들이 보여준 작품에서 안무가 인큐베이팅의 결과라고 보기에는 뭔가 성에 차지 않는 혹은 모호한 헤멤들이 노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반적으로 13개의 작품이 과하게 무겁고 어두웠다는 느낌은 과거 현대무용의 클리셰가 주었던 느낌과 흡사하다. 주제의 추상성과 그 추상성을 다루는 방법론의 부재 속에서 주제는 부실하고 형식은 모호하였으며 거기에 과잉된 자의식으로 포장된 허세까지 보면서 30분 이상을 버텨야 한다는 건 현대춤을 통해 현대에 대한 번쩍이는 미학적, 철학적 통찰을 얻기 보다는 현대의 생활이 주는 부담을 하나 더 얻고 돌아가야 했던 과거의 현대무용들의 상투적 느낌말이다. 우리 현대무용의 이런 상태는 80년대에 상당한 질곡으로 헤어나기 어려운 어둠이었으며 2000년을 갓 넘긴 근래에 들어서야 수준이 올라간 미학적 완성도와 다룰 수 없는 주제는 아예 건드리지 않게 되거나 수입된 형식에서 분방해지려는 노력 등에 의해 조금씩 신선해지고 있는 중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이번 쇼케이스가 무겁고 우울하게 느껴졌던 부분은 과거가 생각날 만큼 우리의 젊은 안무가 지망생들이 왜 이렇게 생기를 잃은 채 무언가에 짓눌려 있으며 방법론을 찾지 못해 헤매다 과거의 것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유희주의 <Blow up>은 어떤 창조적 순간은 본질과 상관없는 경험이나 사실에서 연결되어 나타난다는 학설인 ‘이중연상’을 근거로 익숙한 풍경 속의 낯선 감정을 다룬다. 비정형적인 패브릭 위로 투영되는 2개의 지점에서의 영상 그리고 1한 남자와 3명의 여자 캐릭터가 단발적으로 쏟아내는 맥락을 알 수 없는 독백은 이 작품을 끌고 가는 중요한 텍스트이다. 그러나 춤과 영상과 독백은 결코 끝까지 서로 창조적으로 연상하지 못한 채 무대공간에서 남아 있었다.
장혜림의 <152449’ 1”>은 그간 안무가클래스에서 교육받아 온 시간인 106일을 초로 환산한 숫자이다. 시간과 과제, 그 안에 존재하는 자아가 느낌 긴장과 불안 그리고 그것을 통제하려는 의지가 그 시간의 모래알 속에서 꿈틀거린다. 그러나 작품은 다스름 장단과 조명이 만들어 낸 공간의 분할과 집중에서 생겨나는 하얀 긴장을 드러내긴 했으나 그것이 장혜림만의 것이 될 만큼의 고유한 것이 되지는 못했다. 형식을 과감하게 탈피하면서 자신을 드러내려는 힘이 더 필요해 보인다.
권령은의 <꽃, 미영이란 이름의 편지들>은 무대 위에서의 즉흥이 얼마나 신선할 수 있는가의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즉흥은 상당히 철학적인 시공간의 현존을 다루고 드러낼 수 있지만 공연의 형식에서의 표현의 취약함을 담보로 하기 마련이다. 이럴 경우 작가는 한껏 의미부여를 하나 그런 의미는 그저 연기처럼 관객에게 도착하지 못하고 사라진다. 안무가의 잡다한 정서와 생각들이 아직 사춘기를 넘기지 못한 채 철학으로 과하게 포장되어 오히려 진정성을 잃었다.
정정아의 <당신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습니까?>는 관객을 적극적으로 무대에 올리고 작품에 끌어들인다. 심지어 관객에게 끝없이 공을 던지며 질문을 하고 그 대답에 책임질 기회를 제공하느라 무대로 끌어 올리고 춤추게 만든다. 무대의 4면에 빨간색의 의자와 방석 그리고 빨간 공의 분주함은 집요한 안무자의 주제로 향한 욕망이다. 관객은 의외의 상황에 자연스럽게 반응하고 그 반응이 다시 재미를 끌어낸다. 그러나 안무자가 던졌던 “춤이 뭘까요” 라는 질문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왜 그렇게 움직이는 가로 이어 달리지 못한 채 유희와 어정쩡한 마무리에서 멈추고 만다.
최명현의 <사유의 방_존재의 조건>은 자신의 고민과 그것을 적어나간 일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내레이션이 상투적인 연극적 대사 형식으로 지속되는 와중에 검은 옷과 흰 조명 속에 불면의 시간들이 중첩된다. 최명현의 동작은 깔끔하고 투명했으나 자신의 젊은 고뇌를 돌파하지 못하고 내레이션과 함께 무겁게 떠돈다.
유희웅의 <비겁해서 반가운 세상>은 자신이 참여한 안무가 클래스에서의 피티 장면을 풍자하며 시작된다. 잠시 그 과정에서 그가 포기했던 갈등했던 많은 것들이 엿보이고 그것으로 희화화의 전략은 성공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가 던진 정의와 사회에 대한 많은 질문들은 바람가득 찬 옷을 입고하는 발레의 동작들을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데 그치는 것으로 핵심에 다다르지 못했다. 언어로 직접 던지는 문제의식과 풍자적으로 다루려 했던 웃음이 은유의 방법론으로 다뤄지지 못했다.
곽고은의 <도시미생물 프로젝트-판매를 위한 춤>은 ‘판매를 위한 춤’이 어떻게 사용되어져야 하는지 전자제품에 끼워진 전단을 차용한 별도의 사용설명서까지 제작하였다. 우리는 마치 기계적인 몸으로 춤도 구입해서 사용하는 그런 시대로 옮겨온 느낌이다. 곽고은은 도시와 도시속 인간들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강렬한 원색으로 장난감 같기도 하고 기계나 로봇 같은 도시적 존재성을 파편화된 동작의 반복과 기계음 화된 목소리로 드러내어 보여준다. 형식적 감각은 잘 조직화되어 있으나 그것을 시간의 흐름 속에 구조적으로 배치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시도도 하지 못하여 작품의 흐름은 아동화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
박진영의 <What is real?>은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무용수들의 몸이 만나면서 발생되는 충돌과 왜곡, 어긋남과 일치로 은유하려 했으나 존재에 대한 질문이 그러한 무딘 날로는 움직임을 조탁해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존재에 대한 질문도 식상했고 동작은 더더군다나 어떤 실험이나 성찰이 깔려있지 못한 그저 과거의 것을 답습한다.
진향례의 <아닌가>는 안무자로써 빠지는 딜레마로부터 출발한다. 주제포착은 유아적인 신선함이 있었으나 풀어내는 방식은 연극과 춤 사이에서 불안하기만 하다. 주어진 시간을 조리하는 능력이나 기존의 표현을 넘어서 조롱하고 풍자하는 방식이 아직은 많이 머뭇거리고 두서가 없다.
양은숙의 <본>은 햄릿의 내적 갈등을 심리에 초점을 맞추어 ‘극적 상황’으로 풀어내고자 하였다. 푸짐한 엄마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성적인 넘실댐은 햄릿을 유혹하기에 충분할 만큼 무대 위에 출렁거리나 3개의 남성 자아가 보여주는 내면은 진부함을 넘어서지 못해 보기 원하지 않았으나 보고 만 관음자가 된 듯 하여 민망하다.
장인선의 <싸구려 판타지>는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상상의 캐릭터로 판타지 소설 같은 분위기로 꾸며보려 하였다. 그러나 다른 주제의 다른 공연과 달라 보일 어떤 판타지도 형성되지 못하고 끝나 버렸다.
최승윤의 <사라지기 위한 시간>은 물질화할 수 없는 어떤 성질과 사랑을 연결시킨다. 그 결과는 허무이고 시간 속에 녹아 엉켜있을 뿐이다. 제의형식을 빌려 와 무구는 장난감 같은 가방과 잔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술, 소지의 형식 등 일련의 제례과정을 찬찬히 진행한다. 신을 부르고 신이 오르는 과정을 단순한 움직임으로, 굿에서 거리가 빠귀면 무당이 옷을 갈아입듯 한 꺼풀 씩 옷을 벗으며 점차 변성되어 가는 어떤 흐름을 풀어나간다. 혼자서 당돌하게 무대를 채우는 힘이 아직은 머릿속의 것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삐걱대는 흐름 속에서 차가운 제례로 작게 빛나고 있다.
윤사비나의 <이상한 엘리스>는 실제 여성장애인이 겪었던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공연전 로비에서 그림전시회가 벌어지고 극중의 인물들이 그 로비에서 거닐 고 있다. 한켠에서 노래와 대사가 무대로 길을 안내한다. 장애여성의 성은 무대에서 온전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몸으로 소망이 충족되지만 장애의 몸에 대한 연기만으로는 그녀의 도달하지 못한 성적인 자유와 완성된 소망의 충족이 강한 대비를 일으키진 못했다. 상투적이지 않은 다른 방식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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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신인들의 무대에서 기대의 충족을 결정짓는 것은 그들이 뿜어내는 개인적이고 신선한 독창성의 강도일 것이다. 그것은 때론 주제에서, 그것을 다루는 신선한 방식에서, 작품 전체를 꾸며내는 어떤 미학적 취향과 솜씨에서 다양하게 드러내고 이는 완성도는 떨어지더라도 그들의 무대가 자극적으로 관심을 유발하여 다음을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신인의 창작과정은 배우고 익힌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것을 만들어 내는 첫발에 해당한다. 여기서 '바탕으로 한다'는 것의 의미는 그간 교육받거나 경험한 것을 자양분으로 하여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는 다는 것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는 의미이지 그것에 메이거나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뜻을 아닐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는 더더욱 자신만의 독창적 개성을 드러내는 일은 앞으로의 예술적 생존과 밀접한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번 차세대 안무가 클래스 사업은 무엇을 배우고 익힐 것인지와 무엇을 새롭게 만들 것인지가 교육자(강사, 멘토)와 피교육자(안무가들) 모두가 혼돈한 거 같다. 우리는 세계적으로 유일할 만큼의 무용과 대학의 숫자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안무가를 키워내는 내실 있는 교육의 장이 되고 있지는 못한 거 같다. 게다가 안무의 과정은 마치 무슨 신비한 것인 양 잘못 인식하여 시스템이나 교육과정과는 동시적일 수 없다고 보는 생각도 많다. 물론 그런 부분은 아주 높은 수준에서는 그럴 수 도 있지만 대부분의 수준에서 관객을 배려하고 자신을 잘 표현할 방법으로서의 ‘안무방법’은 과학에 가깝다. 그러므로 ‘안무법’ 혹은 ‘안무가 양성하기’에서의 ‘배우고 익히는’ 교육 부분은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충분히 갖출 수 있는 분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안무가가 기초적으로 갖춰야 할 안무의 ‘개념’과 ‘역사’, ‘방법론’과 그 결과로서의 ‘양식의 발전사’와 같은 기본지식이 부족해 보인다. 그런 부분은 체계 있게 잘 전달되어 교육되어지는 것이 좋다. 그와 비교해서 ‘창의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교육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개인의 예술적 감성과 역량에 맡겨야 하는 부분이다. 이런 구분만 명확히 하고 접근한다면 무엇을 도와주고, 무엇을 보존해 줄 것인가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안무의 모호한 바다에서 다 같이 헤매다 보면 안무란 것은 점점 더 뜬구름이 될지도 모른다. 철학, 미학, 전통춤의 미학, 한국인의 정체성, 안무가를 위한 글쓰기, 펠덴크라이스, 바디 어웨어니스 등은 모두 안무의 방계들이다. 안무의 직계들을 모으고 직계를 통해 안무의 유전자로 들어가야 한다. 그럴 때에야 관객은 직계 속에서 새로운 돌연변이의 탄생을 지켜보는 재미에 대한 기대감으로 차세대 안무가 작품을 보는 부담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안무의 직계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