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갖은 쓰나미의 아저씨들
아저씨, 우리는 이 말을 어떤 뜻으로 쓰는가? 안은미 안무 <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쓰>(두산아트센터, 3. 1~3.)는 제목부터 아저씨 쪽을 향해 해묵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쓰>는 물론 아저씨를 위해 올려졌다. 누가 ‘아저씨를 위해’ 올린다는 것인가? 여기서 아저씨를 위하는 주체는 아저씨 자신들이기보다는, 타자들이다. 그 타자는 두어 갈래로 나눠질 듯하다. 한쪽은 아저씨를 위해 땐스를 만드는 사람들, 다른 한쪽은 아저씨를 아저씨라 부를 만한 사람들이고, <무책임한 땐쓰>에서 두 가지 타자는 합쳐진다.
낯선 성인 남자를 가리킬 때 가장 흔하게는 아저씨라 한다. 그에 못지않게 자주 아줌마의 상대말로 쓸 때 아줌마의 짝을 아저씨라 한다. 아저씨는 기혼 남자로서 할아버지 아래의 연령대에 속한다. 가령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저씨를 위한 춤판을 꾸리겠다면, 어법에서부터 어색하다. 그런 엉뚱함에서 또 다른 발상의 춤판이 나타날지 모르지만. 아저씨를 아저씨라 부르는 태도가 어울려 보이는 층은 아무래도 아저씨 아래의 연령대이다. 그래서 <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쓰>는 아저씨 아랫세대가 아저씨를 위해 춤판을 꾸리는 그런 모습을 연상시킨다.
대개 60대 이상의 성인을 노년층으로 분류하고 할아버지 할머니라 통칭하는 관행에 비추어, 아저씨의 연령은 50대가 상한선이며 청년 세대의 나이를 웃도는 기혼 남성은 40대가 일반적이므로 <무책임한 땐쓰>가 위하는 아저씨는 중년세대(또는 장년층)의 그들이다.
아무튼 <무책임한 땐쓰>의 아저씨는 지금 우리 주변, 일상 대화 속에 흔히 등장하는 중년세대 아저씨이다. 그러므로 이 아저씨는 사회적 개념이며, 그저 낯선 성인 남자가 아니라 오늘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연상하고 결부시키는 일정한 특성을 띤 그런 남자들이다.
누구나 절감하듯, 지금 우리 아저씨들은 가정과 직장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전래의 역할에 머물기는커녕 여태껏 지난 한 세대 사이 사회가 요구하는 자기 쇄신에 응하고 청년 세대의 도전에 임해야 했었다. 게다가 그들은 절대 빈곤을 딛고 선 압축 성장의 수혜자였던 훨씬(?) 이상으로 공업화·개방화·구조조정·가족해체… 등등의 갖가지 쓰나미에 시달린 세대로서 여유 없는 메마름과 불안정과 피로감이 내면에 누적(될 대로 누적)된 세대이기도 하다. 단군 이래 전에 없던 아저씨의 현실 아닌가. 지난 세월 고르지 않은 보도블록을 걷는 듯이 살아왔을 이 아저씨들 앞에 가로 놓인 앞날 또한 전망이 불투명하고 어쩌면 더 험할 것 같다. 어찌 아저씨들만 그럴까마는, 아저씨 위기의 시대에 예술인들이 아저씨의, 아저씨에 의한, 아저씨를 위한 무대·놀이·치유에 떨쳐나서야 할 것은 당연하다.
다섯 대목으로 펼친 아저씨를 위한 장
<무책임한 땐쓰>는 무대 정면을 우유 색깔의 불투명한 막걸리 페트병 수천 개를 거꾸로 매달아 장식하고 이와 어울리게 미백색의 대형 버티컬이 무대 윙을 차지하였으며 바닥 역시 흰색이었다. 아저씨들의 정서에 밀착된 막걸리병 장식과 더불어 무대 전체를 휘휘 스치는 형광 조명은 다소 환각적인 분위기를 미리 공연 전부터 연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막걸리병 위에 때때로 투사된 영상들은 이후 공연 진행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무책임한 땐쓰>에서 대중가요는 녹음으로, 막춤은 영상으로 등장한다. 이 모두 막걸리 페트병과 동일한 맥락에서 아저씨들의 자화상에 필적하는 장치들이다. 게다가 '땐쓰' 역시 아저씨적이다. 이 공연에 마침내 작품 용어로 등극한 ‘땐쓰’는 지금 아저씨들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지 않았던가. 일제 식민지 시대의 딴쓰에서 진화한 땐쓰는 일본을 거쳐 조선에(해방 후에는 미군을 거쳐 한국에) 유입된 서양식 사교춤을 일컬었지만, 실상 그것은 사회의 건전한 풍속을 문란시키는 남녀 사교춤으로 낙인찍혔다. 땐쓰가 그런 오명을 떨쳐버리는 것은 90년대 후반 댄스로 복권되면서부터였다. 지난 세기 내내 춤 아닌 춤으로서 음지에서 웅크려야 했던 땐쓰는 일면 아저씨적이었다. 더욱이 땐쓰는 아저씨적 차원의 춤을 비롯하여 그 이전부터 춤 아닌 춤을 지칭하는 매우 포괄적인 비어(卑語)로 쓰여 왔었고 지금도 그렇다. 이번 공연에 그런 과거를 연상시키는 사교춤은 등장하지 않았고, 땐쓰는 상징어로 기능한다.
<무책임한 땐쓰>의 전체 공연은 다음의 다섯 대목으로 펼쳐졌다. 안무자 안은미가 소주병을 들고 들이켰다가 객석을 향해 입으로 뿜어내는 도입부, 객석 속에서 관객들에게 소주를 권하는 퍼포먼스 부분, 전문 무용수들만으로 삶의 애환을 묘사한 끝자락에 아저씨들이 점박이 비닐우산을 들고 무대를 가로질러 퇴장하는 일테면 인생 부분, 아저씨들의 막춤 동영상을 20분 정도 아주 다양하게 무음(無音)으로 비춘 막춤 부분, 마지막으로 아저씨들이 양동이를 들고 바닥의 흥건한 물을 퍼붓고 무용수들과 난장을 펼치는 뒷풀이 식의 난장 부분.
이와 같은 얼개로 전개된 <무책임한 땐쓰>는 아저씨‘의’ 막춤을 대량의 영상으로 제시하고 그 분위기에 힘입어 아저씨를 위한 장을 마련한 것은 분명하였지만, 아저씨를 ‘위한’ 땐쓰는 부재하였다. 한 마디로, 무책임하고 안일한 공연이라 지적부터하지 않을 수 없다.
도입부에서 ‘사랑은 아무나 하나’ 가요 변주들이 울리고 무용수 여남은 명이 도열하였다. 여자까지 넥타이를 동여맨 이른바 가다마이 정장 차림이며, 그 가운데 안무자 안은미 또한 넥타이 정장에 황금색 반짝이 치마 차림으로 섰다.(가다마이는 양복 정장을 의미하는 일본식 표현으로 한국에선 1980년대까지 낯설거나 어색한 정장 차림을 부러워하거나 다소 빈정대는 의미로 쓰였다.) 여기서부터 B급 정서가 물씬하다. 이러한 발상은 춤이 고답적인 색깔을 떨구고 대중들과의 친밀성을 구축하는 데 유효할 것이므로, 그 과감성은 긍정적 시각에서 주시되어야 한다. 무용수들이 퇴장하고 나면 안은미가 무대 끄트머리 에이프런 지점에서 소주병을 들고 그 속의 액체를 들이킨다. 그 액체가 물인지 소주인지 식별되지 않아도 소주로 여겨야 관람이 원활할 것이다. 이 액체를 객석을 향해 입으로 뿜어대는 것은 객석의 즉석 반응을 유도하는 등 객석과의 교감을 위해 역시 유효하며 안무자가 그 무엇에 몰입한 듯한 표정으로 타~, 하~ 등으로 내는 목소리는 마이크로 증폭되어 음주가 선사할 환호·환각뿐 아니라 음주 순간 내뱉어질 짧은 푸념과 심지어는 어떤 신명마저 암시하는 것 같아 매우 복합적이다.
이어지는 퍼포먼스 부분에서 안은미는 관객에게 소주를 권하는 의식을 혼자서 진행하였다. 안은미가 소주병과 조그만 잔을 들고 객석을 누비는 이 의식에 관객들은 이미 동참하려고 준비된 것처럼 보였다. 동시에 원색의 형광 조명이 노래방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안은미는 객석을 통해 조용히 퇴장한다. 노래방은 일상성과 대중성은 물론 아저씨적인 그 모든 것도 함께 상징한다.
퍼포먼스 부분이 끝날 때 쯤, <무책임한 땐쓰>에는 아저씨를 위한 땐스 판으로서 안무자가 염두에 두었을 대중가요, 음주(양주나 맥주가 아닌 소주 음주), 노래방 그리고 B급 분위기와 같은 장치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이제 마침내 세 번째로 펼쳐지는 인생 부분은 관객의 시선을 무대로 유도하며 장면이 일신된다. 그런 중에서도 트로트 가요 ‘가슴 아프게’와 더불어 B급 분위기는 지속된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해저문 부두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인생 부분에서 붉은색 가다마이 차림 아저씨 같은 무용수를 비롯하여 9명의 무용수들은 퍼포먼스 부분에서 도약 회전, 점프, 다이빙 같은 매끈하며 다양한 움직임으로 객석의 시선을 끌었다. 그들의 힘 있는 민활한 움직임은 ‘가슴 아프게’와 묘한 대조를 이루었고 역동적 움직임에서 감지될 만한 신명은 신명이 아닐 듯하다. 정장한 아홉 무용수들이 바닥에 눕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사이 무대에 투명한 액체가 흘러 바닥은 어느덧 질퍽해졌다.
이 부분에서 일종의 착시 현상이 일어난다. 무대 정면의 수많은 막걸리 페트병으로 미루어 그 액체가 내심 막걸리이기를 기대한 관객도 없지 않았음직한데, 막걸리일지 물일지 곧장 식별되지 않았다. 이후 공연 내내 막걸리 냄새가 나지 않았고 계속 줄줄 흘러내린 액체의 색상으로 보아 그건 물이었다. 여기서 물은 막걸리, 바다 그리고 성인이라면 곧장 연상하기 마련인 사람의 체액(體液)처럼 매우 다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더욱이 ‘가슴 아프게’의 이별 사연도 물과 직결된다. 그렇게 스멀스멀 흘러드는 물을 아랑곳 하지 않고 물에 젖은 채 일어나고 쓰러지기를 반복하는 그들은 단발마적 기성과 괴성을 거듭하고 짐승처럼 기거나 몸을 돌렸다. 8명의 무용수가 퇴장하는 가운데 한 무용수가 우두커니 앉아 울기를(한탄하기를?) 계속하였으며, 다시 등장한 남성 무용수들은 정장(웃통)을 벗고 천장에서 쏟아지는 물에 샤워하는 모습이고, 여성 무용수들은 셔츠와 짧은 속옷으로 샤워 장면에 합세하였다. 그런 다음 무용수들은 밧줄에 끌려 당겨지는 마임으로 서서히 퇴장하고, 이와 반대 방향으로 아저씨들이 해변가나 찜질방에서 볼 수 있는 짧은 바지 차림에 저마다 점박이 투명 우산을 들고 패션 모델처럼 무대를 가로질러갔다.
그다음 막춤 부분을 구성한 것은 아저씨들을 찍은 무음 동영상이었다. 관광버스춤 아니면 장기자랑춤을 연상시키는 이른바 막춤(마구춤)을 모아 대략 20~30초 길이들로 편집한 장면들이 거의 무제한으로(?) 무대 정면 막걸리 페트병 위로 투사된다. 이 대목에서 무대는 거의 암전된 상태로서, 기억하건대 무대 위에는 아저씨와 무용수들은 보이지 않았다. 막춤을 영어로는 uncle & aunt dancing이라고들 하는 모양인데, 여기서는 오로지 아저씨들만‘의’ 막춤 영상만 투사되었다. 주로 음식점 같은 업소 안팎에서뿐만 아니라 유흥지에서, 관광지에서, 택시 안에서, 모터 사이클을 타고, 소방서 앞에서… 아저씨들이 대부분 혼자서 혹은 둘이서 전천후로(기억하건대 눈이나 비를 맞으며 춘 막춤은 보이지 않은 것 같지만) 막춤을 추는 장면들이다.
막춤을 찍은 카메라는 시선(각도)을 고정하였으며, 따라서 막춤 하나하나는 고정된 배경을 가졌다. 막춤의 실제 현장을 담은 막춤 에스노그래피라 해도 좋을 실적물이 근 20분 정도 끈기 있게 펼쳐진다. 그 사이에 객석에선 정겨운 웃음이 공감의 표시처럼 간간이 들렸고, 이 부분에서 적어도 무언의 미소를 짓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동영상이 1, 2분도 아니고 무려 20분 동안 엇비슷한 모습들의 막춤으로 투사되는 것은 먼저 코믹한 정서를 유발하였다. 그런 때문에 그런 영상들은 역설적으로 막춤을 생각케 하는 효과도 따랐다. 막춤 대목이 끝날 무렵, 무대 정면 막걸리 페트병 위로 ‘백문불여일견 백견불여일무’(百聞不如一見 百見不如一舞) 큼지막한 글자판이 둔탁한 B급 글씨체로 출현하였다. 이 또한 과감해서 박력이 흐른다. 이어 색소포니스트가 등장하는데, 혹시 아까 우산을 들고 무대를 가로지른 아저씨인지 모르겠다. 가요 ‘봄날은 간다’를 연주한 것으로 기억되는 이 색소폰 음률의 순간은 막춤 부분의 대미로서, 막춤 아저씨들이나 객석이나 삶을 새김질하며 아쉬워하였을 법하다.
양동이가 비중 높게 구실하는 마지막 부분은 이번 공연에서 일테면 뒷풀이라 할 만하다. 막걸리 페트병 장식 위로 골수 386세대, 엿장수, 영화감독, 방배동 김씨, 대머리 아저씨, 한옥 짓는 아저씨, 꽃중년 아저씨, 자칭 우주 대마왕 아저씨…들이 강력한 B급 글씨체의 소개글과 스틸 사진으로 저마다 등극하였다. 때때로 해방감에 들뜬 모양으로 혹은 장난스럽게 양동이로 물을 퍼붓거나 끼얹고 ‘나 물 먹었어’라고 푸념하는 아저씨의 애교도 곁들여진 이 대목에서 아저씨들과 무용수들은 이번 공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울리며 ‘비내리는 호남선’ 곡조에 호응을 더해가며 막춤을 추기에 열심이었다. 이 즈음 공연 시간은 대략 80분이 흘렀다. 그 다음에는? 객석의 사람들을 무대로 불러올리는 추임새와 더불어 모두 함께 막춤 추기에 돌입하였다. 아마도 그후 뒷풀이는 꽤 오래 이어졌을 테고 더 말할 것도 없이 저마다 추억을 새겼을 것이다.
존재감 · 해방감에 비해 취약한 안무 · 몸구성
<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쓰>는 아저씨들의 자기 존재감과 해방감을 표출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고 생각된다. 아저씨를 ‘위한’ 공연으로서 아저씨들의 자기 존재감과 해방감을 표출하였고 객석에서도 이 점은 확인될 수 있었으며 객석의 호응도 잇달았으므로 이번 공연은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여겨질 법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공연에서 출연진의 만족도가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는 점은 새삼 환기되어야 한다. 즉, 출연진이 만족하면 필히 관객도 만족한다는 등식이 (공연) 예술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쉬운 예로, 화가가 만족하는 그림 앞에서 관람객도 필히 만족하는가. 클럽 댄스에서도 저 나름의 만족도는 상당할 것이다. 따라서 아저씨들이 자기 존재감과 해방감을 표출하는 장으로서 <무책임한 땐쓰>가 과연 공연에 적절한 고유성을 가졌는지 안무자부터 다시 되물어볼 일이다.
<무책임한 땐쓰>에서 안무자는 무용수들을 조련하였고 음악과 장치를 선택하였을 것이다. 이를 배경으로 아저씨들을 막춤 동영상으로 투사하고 글자판으로 소개함으로써 마지막 뒷풀이 장에서 아저씨들이 난장을 의미 있게 벌이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안무자의 무용수들을 위한 안무 작업과 아저씨들을 위한 연출 작업은 ‘그 나름의’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이번 공연의 주된 소재가 된 아저씨와 땐쓰, 다시 말해 아저씨들의 움직임과 땐쓰 측면에서 안무자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되짚어보면 결과(무대 위의 형상 실적)는 미미해 보인다. 안무자가 무용수들을 조련하고 그 결과를 춤으로 구성한 것은 앞서 소개한 대로 <무책임한 땐쓰>의 일부를 이루었다. 이에 비하여, 막춤 또는 아저씨들을 조련하고 그 결과를 춤으로 구성한 것은 좀체 식별해낼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아저씨들의 움직임과 땐쓰를 안무자가 자기 고유의 손길 또는 관점으로 다듬은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필자로선 아리송할 뿐이다.
아저씨들을 대상으로 막춤을 소재로 연출하는 이와 유사한 행사는 얼마든지 권장되어야 한다. 가족과 친지, 지인들을 모시는 이런 행사는 참으로 진정성이 넘치고 멋진 경우도 드물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아저씨들을 대상으로 막춤을 소재로 안무자가 주도하는 행사 아닌 공연은 공연이 전제로 하는 안무 또는 몸 구성(composition)을 개입시켜야 한다. 공연(performance)과 행사(event)의 차별성은 여기에 있으며, 설령 일반 행사라도 안무 또는 몸 구성이 개입한다면 공연에 근접하게 되고 드물게는 웬만한 공연에 버금가는 그 창의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리고, 공연마다의 편차는 우선 안무나 몸 구성 방식과 역량에서의 편차로 환원되기 마련이다.
이번 공연은 그 선의에도 불구하고 전문 무용수가 마지막 대목에서 보다시피 일반인의 수위(水位)에 서는 결과도 빚었다. 전문 무대춤과 생활춤 간의 장벽이나 전문 무용수들과 아마추어 생활인들 간의 이분법은 온당치 않다. 양자 간의 교감은 필요하고 이를 통해 춤은 물론 무용수도 일반인들도 한결 풍부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번처럼 전문 무용수와 막춤 아저씨들이 남남처럼 출연하다가 마지막에 각자의 춤을 무슨 식으로 해도 무방한 뒷풀이 난장에서 (마치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는 것을 두고 과연 공연에서의 교감이라 할 수 있겠는지 역시 의문이다.
덧붙여, 특히 일반인의 참여 또는 접근을 전제로 하는 커뮤니티 댄스가 유행처럼 퍼지는 듯한 현시점에서 강조하자면, 안무가 미약한 공연을 커뮤니티 댄스로 분류한다고 해서 취약한 안무를 정당화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즉, 춤 아닌 춤을 빗댄 땐쓰 공연을 커뮤니티 댄스라 내세워도 최종 결과물인 공연에서 땐쓰 공연이 공연으로서 소화해내야 할 바는 있는 것이다. 이처럼 커뮤니티 댄스는 마력 같은 잠재력을 가졌지만 성급한 이들을 자칫 함정에 빠뜨리기도 한다. 일견 수월해 보이는 커뮤니티 댄스에는 그에 못지않은 난관도 감춰져 있다. 이번 공연에서 보듯이 일반인(아마)을 위하는 경우, 일반인이 참여하는 경우 안무는 무엇이어야 하는지 다시 묻는 것은 퍽 생산적이라 믿어진다. 그래서 다음 두 가지 점을 다시 묻고 이 새로운 흐름에 관심이 클 이들과 더불어 궁리하고 싶다. 전문 무용수와 아마 생활인의 무대 위 접점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막춤을 수용하고 춤화하는 무대는 어떤 형상성을 보여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