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춤계 원로 김매자는 지난 연말 자기 인생을 춤인생 60년이라 하고 기념 공연(12월 14-16일, 아르코대극장)을 가졌다. 원로 무용인이 춤인생을 자처하는 것은 지당하더라도, 김매자 춤 인생 60년의 기념 방식은 좀 유달랐다. 기념 공연인 <봄날은 간다>의 제목은 두말할 나위 없이 대중가요에서 인용한 것이며, 대중가요 ‘봄날은 간다’에 익숙한 세대에게 공연 제목은 숙연하게 느껴졌거나 아니면 상당히 의아스러웠을 것이다. 김매자의 춤인생 60년 기념 공연은 이처럼 제목에서도 실제 진행 현장에서도 여느 기념 공연과는 색다르게 다가왔다.
무용가 김매자의 정체성에서 창작춤을 분리시키기는 불가능하고 또 김매자 개인의 인생은 여러 굽이의 굴곡도 있었다. 이런 맥락 때문에 기념 공연 <봄날은 간다>는 막이 오르기 전부터 지인들의 궁금증을 증폭시켰었다. 대중가요 ‘봄날은 간다’가 반세기 전부터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든 것은 아마도 애상조의 절창으로 삶을 관조하는 오묘한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념 공연은 창작춤의 성과에 바탕을 두는 것과 함께 원곡 가요의 공감대를 형상화하려 하였으므로 그 목적이 복합적이며, 그냥 의례적인 행사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봄날은 간다>의 모티브인 대중가요 가사를 떠올려본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 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그 구성진 가락이 귀에 들리듯 생생한 것은 그만큼 우리 정서에 깊이 내재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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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 공연은 김매자가 옛 기억을 회상하는 프롤로그에서 시작하여, 그녀가 아르코극장 뒷마당에서 손자손녀들과 즐겁게 노는 할머니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중간에 ‘언 땅에 발을 딛고’ ‘그해 여름 눈물이 비처럼’ ‘도대체 알 수 없는’과 같은 작은 장들이 여럿 삽입되었다. 이들 부분에서 김매자가 홀로 혹은 제자들끼리, 그리고 모두 다 같이 무대에 서며, 그들은 치마저고리와 넉넉한 가운 형태의 복색을 번갈아 고쳐 입었다. 공연 전반에 걸쳐 상체 휘감아 모으기가 바탕음을 이루고 손 공글렀다 척 떨어뜨리기나 손목 꺾음새가 장식음처럼 구사되는 움직임들은 자주 보아온 창무회의 양식적 개성을 십분 드러내고 있었다. 정갈한 호흡에 호응하는 움직임들에서는 농익은 맛이 강조된다. 김매자의 성글게 지어진 삼베 모시 질감의 치마저고리도 그러하였고 주색조였던 옅은 미색의 색감은 세련미 이상으로 현장에서 함께 들리는 음감 때문인지 아련한 황토색 향수마저 부른다. 평소 쪽진 머리에 성글게 지어 조신하게 여민 치마저고리의 김매자가 무대에 나설 때, 나는 조선 ‘녀자’의 현대적 버전이 아닐까 싶었고 이번에도 변함없었다. 그리고 원곡 ‘봄날은 간다’를 편곡하여 변주로 울려 퍼진 최효진의 가야금, 박혜진이 국악 정가 풍으로 소리를 낸 청아한 입소리는 이번 공연이 원곡의 아류가 아니라 춤으로 재탄생하는 데 크게 뒷받침하였다.
누구에게서든 봄날은 간다. 그렇게 간 날들을 되돌아보듯 김매자는 망연한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중간에 설정된 작은 부분들의 주제처럼 그 나날들은 만감을 뭉뚱 뭉뚱 부른다. 이런 것이 삶인 줄 깨달으면 그나마 다행인 것이고, 삶의 진실이란 것도 깨닫는 자에게나 조금씩 다가올 뿐이다. 각성하지 못한 자의 비극을 예술이 삶의, 예술의 진실로서 드러내듯이 예술가는 진실을 먼저 깨닫거나 겪는 특권을 갖는다. 원곡과 마찬가지로 <봄날은 간다>는 삶을 진솔하게 대면한다. 60년 기념 공연은 개인의 특정 연륜으로써 삶을 반추하는 계기에서 비롯하므로, 여기서 대면하는 삶의 진실은 말 그대로 그렇게 가버린 날들에서 스스로 감당해야 했던 진상이자 진면목인 것이다. 그런 진실이 왜 있어야 했는지 종종 석연찮은 것이 삶이지 싶다. 그래서 삶은 정갈하게 정리되기 힘들고도 불가능하며, 끝내 진실은 도저히 그 전모가 확정되기를 거부한 채 또 다른 누군가에게서 되풀이될 것이다. 그 전모를 한꺼번에 드러내지 않는, 누구든 크고 작은 아쉬움을 겪기 마련인 인생은 일종의 비경(祕境) 아닌가.
<봄날은 간다> 전반적으로 삶의 희로애락이 뒤섞여 감지되는 전체 구성에서 구체적인 인생살이는 마무리 부분의 그것뿐이다. 지금이 아닌 과거는 회한 속에서 아른거리기 마련이라는 삶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하다. 예술 작품의 전체 흐름에서 소재 내용은 짐작되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특정해야 할 이유가 꼭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이번 공연은 짐작되는 소재 내용이 무엇이라고 특정하기에는 다소 추상적이어서 작품 중간 중간에 김매자가 출연하지 않는 부분들은 밀도가 낮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번 공연은 김매자 본인과 제자들의 협동 무대로 펼쳐졌다. 출연한 제자들 가운데는 60세를 앞둔 인물들도 적지 않고 20대와 30대도 있었다. 김매자의 제자이자 창무회 역대 단원들로서 출연한 윤덕경 황희연 이노연 김선미 이애현 김용복 이미영 남수정 최지연 김지영 김옥순 양진예 김지영 박선욱 윤수미는 이미 초로에 접어들었다. 이들이 하나의 얼개를 갖춘 <봄날을 간다>에서 춤추었던 것은 연령의 차이를 넘어선 조화의 무대를 넘어 오히려 뜻밖에도 연령에 따른 춤의 차이를 감식할 수 있는 호기로 작용하였다. 젊었다가 노화하는 것은 생물적 몸의 정한 이치이고 연령에 따라 춤이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물리적 순발력을 앞세우지 않는 한국춤은 오히려 나이 들수록 몸의 기억과 더불어 농익는 속성이 강하다. 이번처럼 그들이 한 무대를 이룸으로써 이처럼 한국춤의 내적 특질을 재확인하게 된 것은 퍽 드문 일이다.
이 공연은 창무회가 주도해온 국내 창작춤의 성과를 부분적으로 다시 구성한 그것에 근본 의의가 있다. 신파조를 멀리 하고 현대적 감각의 구성을 도입하되 한국춤의 웅숭깊은 호흡과 자태를 동시에 구현하려는 태도는 이번 공연의 구성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와 아울러 대중가요 원곡을 국악 기악과 창(唱)의 깊이 있는 양식을 빌어 품격을 달리 함으로써 한국적 미감 혹은 정서의 현대적 구현이라는 창작춤의 지향점을 설득력 있게 예시하였다. 대중음악을 원소재로 쓰되 국악 정통을 기반으로 해서 반주음악을 재창조하는 태도는 또한 대중의 정서에 밀착하려는 삶의 관점으로 해석될 필요도 있다. 이 점은 창작춤이 한국춤의 원소재를 갖고 이른바 오늘의 춤을 창조하기를 지향해온 것과 유사한 맥락에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춤에서나 국악과 대중가요에서나 그만큼 오늘을 위한 창작에 대한 집념이 김매자 60년을 끌어온 견인차였다고 하겠다.
창작춤은 20세기 한국 춤계의 최대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특정 예술 양식과 조류에 완결이 있는지 의문이지만, 용어는 어떨지 몰라도 창작춤의 정립이라는 큰 흐름은 새 세기에 들어서도 과제로 이어지고 있다. 창작춤에 깊이 관여한 인물일수록 자신이나 우리 모두를 성찰의 심연으로 빠뜨리기 마련이었다. 김매자의 활동이 동시대성과 결부되어 말해지는 연유는 무엇보다도 여기에 있을 것이며, 김매자의 삶은 부분적으로 우리들의 삶과 겹쳐진다. 표면상 자전(自傳) 형태로 진행된 <봄날은 간다>는 사실상 개인사의 회상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 김매자가 표하는 아쉬움의 상당 부분은 창작춤 활동을 배경으로 할 것이므로 춤계의 그것으로 치환될 수 있을 것 같다. <봄날은 간다> 그날 환기되고 또 막이 내릴 때 급기야 심금마저 울린 그 공감대는 그러므로 삶의 진실의 환기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함께 감당해야 했던 데서 밀려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