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육완순 현대무용 50년을 미리 기념하는 공연 <재난-감싸안다(Catastrophe-Healing)>가 아르코미술관(2012년 12월 25-26일)에서 있었다.
춤이 그림이었고, 영상이 춤이었던 이 공연은 '재난-감싸안다(Catastrophe-Healing) 춤 전(展)' 이라고 제목을 붙여도 될 흥미로운 작품들이 차례로 선보였다. 재난을 주제로 한 영상작품과 감각적인 춤이 조응한 공간, 미술관의 모든 구조물과 움직임은 또 다른 무대와 작품이 되어 관객은 때론 공연자로 참가도 하면서 감상하는 작품 전(展)이었다.
지구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난의 현장과 인간의 삶이 파괴되고 있는 모습을 영상과 소리로 보여주는 전시작품 '카타스트로폴리지(Catastrophe)'와 그 재난에 대한 인간의 극복의지 등을 내포한 힐링(Healing)의 메시지를 담은 춤이 만나 또 다른 형태의 예술, 공연그림을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30여명의 관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은 2층 전시장에서 1층 전시장으로, 또 다른 그룹은 1층 전시장에서 2층으로 이동하며 감상하는 열린 구조로 된 공연이었다. 한 번에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없는 협소한 전시실의 구조 때문이었겠지만 의외로 몰입할 수 있었고, 어떤 순간은 혼자서 감상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는 매우 효율적이면서도 재미있게 전개된 공연이었다.
1층 복도와 전시장 공간과 공간 사이에 부조처럼 벽에 기대어 있거나 복도와 계단을 걷고 오히려 관객들을 감상하고 어울려 걸어 다니기도 하는 무용수들이 자연스럽게 관객들을 작품 속으로 이끈다. 김양근(숭의여대 교수) 안무의 프롤로그 작품으로 2층 전시관의 입구도 같은 형식으로 배치한 미술관 춤에 공기처럼 떠돌았다.
이어서 첫 번 째 방, 김화숙(원광대 교수) 안무의 <검은 태양 (IL sole Nero)>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크기의 미하이 그레쿠의 영상작품이 함께 만났다. 작품제목은 'we'll become oil'. 사막의 유전, 오일이 타고 있는 검은 연기 기둥, 헬리콥터가 일으키는 사막의 먼지바람, 프로펠러가 내는 굉음, 한 대씩 나타나던 헬리콥터가 마침내 8대가 되어 공중을 선회하다 서로 충돌, 땅으로 떨어지는 영상이 거듭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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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보인 채 의자위에 앉아 그 영상을 바라보는 최은봉의 검정색 드레스의 폭 넓은 뒷자락이(미술관 바닥 반 정도를 덮는 크기)매우 인상적인 그림을 만들어낸다. 미술관 바닥을 덮고 있는 넓은 드레스 자락은 영상 속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름, 미술관 바닥은 기름으로 뒤덮인 지구일수도.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영상속에서 빠져 나와 굳어버린 부조처럼 보인다. 옆 쪽 흰 벽면을 이용하며 영상쪽으로 이동하며 추는 박진경의 춤, 검은 연기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 태양의 빛처럼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움직임이다. 마지막 드레스자락을 천천히 거두어들이자 드러나는 미술관 바닥(지구)이 춤의 주제만큼 선명했다. 마치 3D 춤 영상처럼 감상자가 춤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감각적인 작품이었다.
두 번째 방은 안신희(국민대 교수)의 안무. 허먼 콜겐의 'Dust Restriction' 영상과 남녀 무용수(오초롱, 노유성)의 춤. 어둑한 내부, 벽면에 조그맣게 뚫린 구멍, 작은 빛, 큰 빛으로의 전환만 있다. 흰색과 검정색 의상, 손전등, 카메라를 이용하여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된 호기심과 그로 인해 유발된 원인모를 공포 등을 춤으로 푼 작품이었다. 작은 구멍(불빛)에서 시작된 호기심은 두려움으로 공포로 이어지고 공포는 폭력이 되어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에게 가하면서 서로를 파괴시킨다. 노유성은 작은 전등으로 관객의 얼굴을 비추는 등, 즉흥적으로 관객의 반응을 끌어내며 공포라는 주제를 잘 풀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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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수 안무(수원대 교수)의 <그러나 우리는 원치 않는다>는 미하이 그레쿠의 'we'll become oil' 영상. 같은 영상에 다른 안무 작품을 감상함에 따르는 감정 전환에 브레이크가 걸려 잠시 주춤거리게 되나 흥미로웠다. 몸의 탄력성과 힘이 좋은 남자무용수(고경환, 이병진)와 여자무용수(장혜주)는 상당한 양의 신문지를 들고 들어와 신문지를 소품으로 이용한 춤으로 환경재해의 폐해를 고발하는 메시지를 힘있게 담아냈다. 다만 영상과 메시지와의 조화 면에서는 아쉬웠다.
2전시장으로 이동하면 전시관 입구 복도에 검은 베일과 검은 옷은 입은 무용수가 조각상처럼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다. 그 모습이 죽음의 집으로 들어서는 듯한 느낌을 준다. 복도 끝 막힌 공간에서는 여자무용수들이 앉거나 서서 풍선을 불고 벽에 손바닥 도장을 찍어대는 행위를 하고 있다. 2전시장의 프롤로그 인 듯 보였다.
다른 공간에 들어서자 한선숙(상명대 교수) 안무의 <일상인-공허함이 벽에 닿으면>이 공연되고 있다. 전시되고 있는 그림들은 박자현의 작품으로 소녀의 초상들, 흑백의 그림들 속 모습들은 눈동자가 없고 벗은 몸은 상처투성이로 피로 얼룩져있다. 그림들을 배경으로 거울을 들고 있는 여자무용수, 그림들 속 소녀의 모습과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거나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들여다보고 있다. 무용수들의 겉모습은 멀쩡하나 그들의 내면은 사진 속의 인물과 닮아있다. 춤이 그리는 그림은 마치 우리 자신들의 과거로부터 온 장면처럼 느껴진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세상이 박자현의 상처투성이인 소녀의 세상만큼이나 혼란스러울 정도로 얽혀있기 때문은 아닐까.
코너를 돌자 선보인 <eat into-but>
이동하는 복도에서 관객들 속에 스미듯 들어와 숨어있는 여자를 찾아내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무용수의 연기와 함께 자연스레 박명숙(경희대 교수) 안무의 <Ground-대지의 노래>
죽음처럼 복도에 앉아 있던 무용수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빛을 발하는데, 이는 '대지의 노래'에 어떤 미적인 성격을 부여한다. 남녀 무용수의 군무는 사실적이기보다는 형식미가 두드러진 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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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꽉 차있는 공간이다. 모든 것이 인과로 얽혀있다. 지구는 태양주위를 일정한 속도로 돌고 물질들은 물리법칙에 의해 작동한다. 20세기 실존철학, 그중에서도 샤르트르의 즉자(en-soi) 역시 마찬가지다. 즉자는 이 자연세계처럼 꽉 들어차 있는 존재를 말한다. 하지만 대자(Pour-soi)는 그와 다르다. 대자는 비어있는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주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주체에 여백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반성하고 모색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이 꽉 찬 세계에 끊임없이 여백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샤르트르에 따르면 즉자-대자가 관계를 맺는 것과 대자-대자가 관계를 맺는 것은 다르다고 한다. 대자-대자의 관계를 갈등으로 본다. 늘 상대방을 대상으로 만들고 자신이 주체가 되고 싶어 하는 욕망 때문이다. 꽉차있는 세상의 존재들. 자연과 인간의 관계,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 또한 이 개념에 이입해 볼 대상일 것이다.
'인간의 삶 전역에 걸쳐 위기로 다가오고 있는 각종 재난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힘은 인간애(人間愛)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6명의 안무가들이 큰 그림을 그려냈다. 춤의 그림들은 차분하고 과묵한가 하면 혹은 지나치게 근심스러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이 그림의 나머지 부분이 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전달하는데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기존 무대에 올려진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관객이 고립되거나 소외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하지는 않았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작품의 정적인 중심, 즉 그림 작품과 춤 작품 그리고 그 작업의 배경을 이루는 관계로 초대된다. 작품에는 분명히 올 1월에 펼쳐진 '육완순 현대무용 50주년 페스티벌'로 무대에 오를 많은 작품과는 달리 어떤 이야기가 있었다. 이 이야기는 형식적인 혹은 추상적인 요소들을 세심하게 배치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의미'라는 버거운 무게가 오래된 제자들에게, 또 이미 나이가 많이 든 스승에게 지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