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리케이댄스 예술감독인 이경은은 지난 3년간 축적된 ‘꿈 프로젝트’ 경험을 바탕으로 2월 23일에서 24일 동안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이것은 꿈이 아니다: 산행>을 선보였다. 이 작품을 통해 이경은은 실제 산행 중에 떠오른 여러 에피소드들을 재미있게 구성하여 인생의 여정을 그려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인생의 과정과 산행을 닮은꼴로 바라보기에 안무가는 버거운 일상에서 휴식을 꿈꾸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주제를 다룬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이번 작품은 ‘무엇’ 을 얘기 하다기 보다는 ‘어떻게’ 그녀만의 방식으로 풀어낼 것인가가 관건인 것으로 해석된다.
업사이클링(Upcycling), 일상적 공간의 유쾌한 변신
관객들을 편안한 산행으로 이끌 준비를 하는 것일까? 막이 오르기 전 작품의 시작은 세 명의 춤꾼(권령은, 윤가연, Sanne Haenen)이 마치 코미디 발레 막간극 주인공처럼 마임이 섞인 분주한 움직임으로 전체 작품의 경쾌한 분위기를 예고한다. 무대는 평범한 집을 배경으로 책상, 소파, 이층 침대 등 일상적 가구들이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일반적인 무대와는 달리 본 공연에서 주 무대는 무대 마루가 아니라 공연자들이 노니는 가구 위였다.
공연 전반부는 춤꾼들이 마치 산행의 오르막을 경험하듯 지친 일상을 연극의 성격을 빌어보여 준다. 권령은과 지미(Jimmy Sert)가 걸상에서 헐떡거리며 스스로를 추스르지 못하는 상황이나, 윤가연이 세느(Sanne Haenen)에게 반복적으로 질기게 매달리는 장면은 버거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일상적 단면을 직설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중반부는 무대에 배열된 가구를 이용하여 춤꾼들이 산행의 과정을 보여주는데 정상에 오른 춤꾼들의 에피소드(야호 하울링 흉내, 오이 먹는 장면, 별빛 야경 관찰 등)가 정감 있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움직임 보다는 상징성에 중점을 둔 재조합된 가구더미들과 만화 캐릭터를 연상하게 하는 관악기 효과음 그리고 춤꾼들의 표현적 연기가 전체적으로 산뜻한 분위기를 주도하였다.
이 작품은 드라마투르기의 극적 전개(상행: 오름의 시작/깔닥고개: 오름의 위기/정상: 오름의 끝, 그리고 또 다른 시작/하행: 또 다른 오름)와는 상반되게 가볍고 유쾌한 분위기가 지속되며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주된 볼거리라고 할 것이다. 최근 문화 트렌드인 리사이클링(Recycling)에서 진화된 의미로써의 업사이클링(Upcycling), 즉 디자이너가 버려진 재활용품을 해체하여 자신만의 창조적 아이디어로 제품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는 의미가 특징적으로 표현되었다. 다시 말해, 본 공연의 무대 자체가 바로 ‘업사이클링’ 트렌드처럼 무대 공간을 감각적으로 연출하고 있는데, 침대나 책상 같은 일상적 집 가구들이 산행의 공간으로 탈바꿈되어 변신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구체적으로 무대 배치를 살펴보면, 회전무대에서 가구더미를 쌓아 올려 산 정상을 연출해낸 것부터 식탁보가 텐트나 내리막 로프로 사용되는 장면 그리고 사다리를 매개로 전 무대 가구를 타는 흥미로운 연속된 장면들이 업사이클링을 표현하면서 즐거움을 제공하고 있다. 그렇다고 <산행>이 일상적 소품의 재발견만 있는 것은 아니며 안무가의 휴머니즘적 시각도 간간히 드러나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는데, 춤꾼들은 전체 흐름을 끊기지 않게 유지하려고 자연스레 하나의 몸 다리를 만들어 ‘함께’라는 산행의 의미를 강조하는 장면이 그 예이다. 또한 공연 시작부터 끝까지 가구 한 켠에 앉아 있는 이경은씨의 모습은 소설 속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자신의 얘기를 풀어내는 듯 한 연출의도로 보이는데, 결과적으로 본 작품의 취지가 관객의 심리적 공간까지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산행의 진솔한 의미와 인생을 반추하는 미적 과정을 보이고자 의도했다고 분석된다.
친절한 드라마투르기,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작품 후반부에 오면 어떻게 정상으로 갈 수 있는지 보다는 어떻게 잘 내려올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의 투영이 보인다. 내리막길에 선 춤꾼들은 각기 제 길로 흩어지기도 하고, 뒤이어 한 시간여 동안 가구 구석에 앉아 있던 이경은씨는 2분여 남은 마지막 무대를 통해 독백과 아우성이 섞인 격렬한 움직임으로 피날레를 장식하고 있다. 안무자는 산행, 인생, 즐거움이란 삼각 축에서 작품을 전개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중견 춤꾼인 그녀 입장에서 산행, 인생길 그리고 다시 현실 안에서 ‘살아가기’라는 자아 성찰과 순환적 사유는 감지 할 수 있었으나 이를 조명하는 흐름에서 단선적이거나 비약된 부분이 아쉬웠던 작품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전체적으로 유쾌한 진행 과정에서 갑자기 혼란스러워 보이는 이경은씨의 마지막 솔로 춤이 ‘인생’이라는 삼각 축에서 갑자기 논리가 비약하는 듯 한 느낌을 주는 분위기가 공연의 맥을 가늠하기 어렵게 만들었던 지점이라 생각한다. 또 한 가지로 춤이 전개되는 전 과정이 드라마투르기에 너무 충실했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애매모호함으로 해석이 어려운 컨템퍼러리 춤도 관객의 발길을 돌리게 하지만, 시각적 장치와 극본, 춤꾼들의 움직임 조합까지 모두 예상할 수 있는 너무 친절한 공연 전개방식 또한 관객의 식상함을 유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경은씨의 춤 철학은 단순하고 명쾌한 주제전달이라는 신조라고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도 그러한 의지의 연장선에 있다고 유추할 수 있었으며, 어렵지 않은 주제적 접근, 놀이, 대중성 지향의 목표는 춤계 뿐만 아니라 다른 순수 예술분야에서도 리사이클링되어 자주 소재로 사용되고 있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거시적으로 문화예술계 외부 구조는 배제하고 순수 작품 내부에서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해 보게 된다. 아마도 대중들의 문화소비는 실용성과 감각적 상상력이 수반된 예술상품에 집중되지 않을까라고 짐작해 본다.
예술가의 창조적 상상력은 자신의 내면과 문화의 심층에 기초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통찰하는 것이라 정의할 때, 재능 있는 예술가는 관객의 심상을 자극하여 작품 감상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능동적인 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작품 <산행>은 이경은씨의 주변에 대한 세심한 관찰력과 아이디어가 돋보였고, 인생이라는 추상적인 관념과 산행이라는 실 경험 가능한 일반적 행위를 무대 위 제한된 공간에서 흥미로운 상상으로 연결할 수 있게 하였다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결국 똑같은 춤은 하나도 없다. 한마디로 상상력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 업사이클링이라는 주제에서 이경은씨의 발칙한 상상력에 성숙한 내적 통찰이 추가되어 그녀의 춤이 업사이클링 무대에 선두가 되길 기대해 본다.
예술가의 상상력, 다시 말해 제멋대로 이미지를 새롭게 결합하는 능력이 춤의 감각적 변신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상상력은 모든 창조를 분해하여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만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어떤 규칙에 따라 다시 수집하고 배열한 재료를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상상력은 새로움의 감정을 일으킨다.” (Ch. Baudelai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