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로미오와 줄리엣’은 역사적으로 정말 많은 안무자들을 유혹해 왔다. 베를리오즈나 차이콥스키 음악에 안무된 작품들도 있지만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을 재해석하는 작업이 압도적이다. 1960년대에 영국의 캐네스 맥밀런과 독일의 존 크랑코가 서정적인 발레 표현법의 극치를 보여주었다면 20세기 후반에는 줄거리의 색다른 각색으로 경쟁했다. 시대나 상황에 변화를 가하는 변형이 앙주렝 프렐조카주나 베르트랑 다를 통해 현대인의 빈부 격차, 적군의 딸을 사랑하는 전쟁터 이야기로 재탄생했다.
1996년 새로운 각색에 도전한 장-크리스토프 마요는 음악과 줄거리를 그대로 진행시키는 가운데 무대 장치의 단순화와 표현 기법의 현대화로 큰 성공을 거뒀다. 장-크리스토프 마요는 1960년 프랑스 투르에서 태어나 깐느에서 로젤라 하이타워 사사, 1977년 로잔 콩쿠르 입상 등 전형적인 발레무용가로 성장한 인재다. 1993년 몬테카를로 발레단 예술감독이 되었고, <로미오와 줄리엣>, <신데렐라>, <달은 어디에> 등 그의 대표작 다수를 한국 국립발레단이 여러 차례 공연한 바 있다.
국립발레단이 2013년 2월 14일부터 17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1996년 모나코 초연, 1999년 뉴욕 초연, 2000년 한국 국립발레단 초연 기록을 남겼다. 2002년에는 몬테카를로 발레단 주역들이 내한해 본토의 연기로 갈채를 받았으며, 2011년 정명훈 지휘로 재연된 바 있어 매우 익숙한 레퍼토리라는 느낌을 주기에 이르렀다.
마요작 <로미오와 줄리엣>은 줄거리 묘사보다는 사랑과 죽음의 재현, 특히 죽음에 중점을 두었다. 절정은 2막 3장으로, 로미오가 티볼트를 목조를 때 무대 전체가 슬로우 비디오 화면처럼 연출된다. 죽어가는 머큐소, 놀란 군중, 공포를 느낀 티볼트, 친구의 죽음에 분노한 로미오, 전 출연진이 합세해 한 장면을 각인시킨다. 제 속도로 연주되는 특유의 비극적인 멜로디를 들으며 살인 광경을 속속들이 지켜보는 관객들은 비극의 진정한 출발점은 바로 여기였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렇게 뚜렷한 이유를 간과하고, 엉뚱하게 가문간의 대립, 결혼예정자 패리스의 등장, 잘못 전해진 로렌스 신부의 편지를 탓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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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자는 3막 2장에서 로미오가 죽는 방법도 새롭게 고안했다. 줄리엣의 죽음을 확인한 로미오는 그녀의 침대 모서리에 가슴을 부딪쳐 자살한다. 키스 포즈로 줄리엣의 상체를 끌어 올리며 애절한 사랑을 표현하던 로미오가 무대 왼쪽 앞으로 이동할 때 관객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상할 수 없다. 모서리를 향해 달려가 로미오를 죽게 한 유일한 해석, 가히 발레적 죽음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사랑을 담아내는 방법도 독특하다. 우선 그 실행자인 줄리엣이 소년처럼 괄괄한 성격을 지녔음을 암시하는데, 보다 솔직한 감정 표현을 유도하기 위한 포석 같다. 남녀 기교가 유별한 발레 전통에서 살짝 빗나간 안무자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연기에 공통된 이미지를 대거 투입했다. 마음의 흐름을 몸의 리듬으로 바꾼 듯이 보이는 유연한 춤집이 그것이다. 고전발레에 비해 드라마틱 발레가 사실적이고 극적이지만 마요의 작품은 개인적 심리 묘사에서 한 단계 더 섬세하다.
침실장면이 시작될 때, 초초하게 앉아있던 줄리엣은 달려가 로미오의 뺨을 때린다. 그가 티볼트를 죽인 때문에 겪게 될 미래의 불행이 그 한 동작에 압축되어 있다. 로미오를 때리는 줄리엣이라니, 발레 관객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발상이다. 그러나 서로 쓰러지듯 의지하는 다음 포즈는 깊은 사랑과 염려를 함축하고 있다. 놀라운 장면, 그것을 덮어버리는 더 큰 놀라움 연출이 황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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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크리스토프 마요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찬사를 받는 또 다른 이유는 무대 장치와 조명의 단순화에 성공한 때문이다. 흑백 무대, 전통이 숨어든 도회적 의상, 장치 변환과 조명의 강약에서 안무자의 천재성이 드러난다. 장치의 위치나 높낮이 조절만으로 다른 배경을 만들고, 단 1초까지도 계산에 넣은 조명 효과는 감탄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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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 신부가 극을 끌어가는 상황 설정도 이 버전만의 특징이다. 마을 광장에서 몬테규가와 캐플릿가가 싸우고, 가면무도회에 숨어들고 등등의 기존 전개를 예상한 관객에게 첫 장면부터 등장하는 세 남자의 존재는 불편하다. 두 명의 복사와 로렌스 신부로, 신부는 비극을 막지 못해 고통스러운 예언자고 두 복사는 신부의 춤에 힘을 더한다. 미래의 사건을 모두 알고 있지만 그것을 피할 수 없는 로렌스 신부는 영험한 무녀 같다. 이런 이유로 그의 등장은 광장의 인형극 공연에서 줄리엣의 침실까지 시공의 제한에서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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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요 작 <로미오와 줄리엣>은 세세한 상황 설명이 없어 특히 도입부에서 다소 이해가 어렵다. 원작의 줄거리나 인물 파악이 선행되지 않으면 각 장면에 적응하기가 벅차다. 반면 구체적 사건이 중심을 이루는 2막과 3막에서는 점차 교감의 폭이 넓어진다. 처음은 쉽지만 마무리가 지루한 다른 버전에 비해 객석의 갈채를 쉽게 얻어낼 수 있는 점증적 연출 효과 역시 이 작품의 성공 요인일 것이다.
익숙한 작품을 재연한 국립발레단의 이번 무대는 숙련도가 높아 안정적이었지만 과거의 좋은 기억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욕심을 부릴 여지도 있었다. 초연 때의 경이로움을 반복 경험할 수는 없겠지만 원작자의 연출이 지금쯤이면 다시 한 번 덧붙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복사들이 좀 더 날렵하고 세련되게 연기했다면, 티볼트가 살해될 때 무대 장치가 좀 더 급경사를 이뤘다면, 장치 이동과 조명이 보다 섬세하게 어울렸다면, 춤과 음악의 박자 교감이 안무자의 이미지를 보다 강하게 불러일으켰다면 등등의 아쉬움이 원작자를 그립게 만든다. 이에 더해 외국에서 지휘자를 초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케스트라의 음정이 자주 어긋나 안타까웠다.
이번 공연의 급소 중 하나는 유모 역이다. 스토리 라인이 추상화 된 마요 버전에서는 특히 등장인물의 인상으로 배역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사건 전개를 유추하기 때문에 사실적인 분장이 보다 중요하다. 과격한 줄리엣과 움직임이 굼뜬 풍만한 유모의 대거리가 자매들의 장난처럼 보여서는 안 될 일이다. <지젤>의 엄마 역할도 마찬가지로, 나이 든 여자 역을 소화할 출연자가 없다는 점은 우리나라 발레공연이 여전히 불안한 이유 중 하나다. <돈키호테>의 산초 판자 역할을 맡는 남성들처럼 유모 역을 당당히 떠맡을 연기자가 필요하다.
유모 역을 맡은 신승원이 부족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녀의 변신은 매번 탁월하고, 주어진 배역 해석에 누구보다 열정적이다. 젊은 단원 중 최고의 연기파라는 평판에 따른 배역일 것으로 생각되며, 이번 무대에서도 최선을 다했음은 물론이다. 줄리엣보다 어린 나이의 귀여운 유모가 나오니 실감이 덜해 감동도 약해진다는 연결고리를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김지영. 이동훈. 김세연. 유난희. 이영철이 교대 인력 없이 모든 공연을 떠맡은 점도 발전에 역행하는 징후가 아닐 수 없다. 움직임 배당이 매우 큰 줄리엣 역의 건강이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발레리나 응시생들이 넘친다는데 자타가 공인하는 새로운 스타 탄생은 감감 무소식이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김지영. 김주원과 견줄 고루 갖춘 발레리나가 정말 없는 것인지, 국립발레단의 고전 작품에서 간혹 주역보다 솔리스트가 돋보여 스타 부재를 염려했는데, <로미오와 줄리엣> 캐스팅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간판스타 김지영이 없다면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녀의 연기는 평가가 아닌 감사의 대상이 되었다. 지난 공연에 이어 이번에도 로렌스 신부 역을 맡은 이영철은 어느덧 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로미오 역 이동훈도 내면에서 끌어내는 유연함의 맛을 터득해 선보였고, 로잘린 역의 유난희가 기대 이상의 효과를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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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잘린은 로미오가 줄리엣을 만나기 전에 반한 여자이니 예뻐야 한다. 발레리나가 예쁘다고 말할 때는 얼굴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체와 하체의 비율, 목과 어깨 라인, 긴 팔과 다리, 그 지체를 얼마나 자유롭게 활용하는가를 본다. 마요 작품 도입부에는 마임이 없기 때문에 로미오와 춤추는 장면만으로 그녀가 로잘린임을 알아 차려야 한다. 예쁜 동시에 품위 있는 춤집까지 지닌 유난희의 등장은 편안한 감상을 선사했다.
이번 공연은 특히 스페인국립발레단에서 활동 중인 김세연의 특별 출연이 화제였다. 김세연이 유니버설 발레단을 떠나 외국발레단으로 이직한 시기를 따져보니 아직 무대를 지키는 집념과 근면함에 우선 갈채를 보내야 할 것 같다. 그간 보스턴 발레, 취리히 발레, 네덜란드 발레단 수석을 지내며 국내 갈라 공연에도 자주 출연했다. 마요 버전에서의 캐플릿 부인은 화려한 드레스를 걸치고 남편을 따라 등장하는 다른 버전에 비해 춤과 연기가 월등히 많다. 중후한 멋과 난이도 높은 기교 연기를 담당하는 상당히 까다로운 인물로 김세연 정도의 베테랑이 도전하기에 적합한 역할이다.
검정 드레스를 입고 매력을 발산하는 2인무, 조카의 죽음에 분노하는 극적 연기도 좋았지만 줄리엣의 방에서 보여준 마임은 체득된 발레 전통의 진수였다. 결혼을 거부하는 줄리엣에게는 매몰찬 포즈로 일침을 가하더니 거의 동시에 청혼자 패리스에게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사과의 몸짓을 보였다. 이런 섬세함이 감동과 이해의 깊이를 좌우함을 보여준 순간적 연기력 하나 만으로도 김세연의 출연은 큰 보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