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무용수들이 매트리스 위에 힘없이 쓰러져 눕는다. 조명이 어두워지며 공연이 거의 끝났음을 암시한다. 공간에 홀로 서 있는 무용수는 안무자 차진엽 뿐이다. 그녀는 한 관객에 다가가 포옹한다. 인간에 대한 희망을 포옹한 것이다. 껴안음을 받은 그 한 관객만이 아니라 50여분 내내 인생의 축소판으로 휩쓸려 들어갔던 관객 모두는 치유됨(Healing)을 느낀다. 한순간 예술에 의해 주어지는 구원이다.
서울역이 남쪽 옆에 현대식 건물을 짓고 개찰구와 대합실을 옮긴 후, 옛 서울역사는 여행과는 상관없는 한가한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그 한적한 역사(驛舍)에서 또 다른 여행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옛 역사 입구 북쪽 귀퉁이에 있는 부속건물의 문을 들어서자 춤이 주도하는 환상적인 융복합공연예술을 즐기는 색다른 여행이 시작되었다. 여정은 한 시간이 못되었지만 온갖 장르의 예술을 접할 수 있어 길게 느껴졌다.
경이로 가득 찬 생(生)이 축복이듯이, 생의 축소판인 예술 작품이 경이를 그득 담고 있다면 그 작품의 향수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다. 무용가 차진엽이 안무·연출한 실험적인 융복합예술 작품 <로튼 애플(Rotten Apple)>에는 경이가 넘쳤다(2012. 11월 28일~12월 1일, 7회 공연, 문화역서울 284 RTO 공연장).
예술은 종국에는 상상력의 싸움이다. 너른 상상력에 큰 스케일이 합쳐지면 작품의 가치는 배가된다. 이 작품은 상상력과 스케일이 충격 그 자체였다. 이 작품을 관람하니, 전위라고 일컬어지는 다른 공연예술 작품들이 왜소하고 단순하게 느껴졌다.
주목 받는 젊은 여자 무용수였던 차진엽이 올해 ‘컬렉티브 에이(Collective A)’를 창단하고 ‘썩은 사과’라는 뜻을 갖는 <Rotten Apple>이라는 작품을 옛 서울역사에 있는 허름한 창고 같은 공간에서 공연한다고 했을 때, 제목도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그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궁금했다.
첫 번째 문을 밀치고 들어서자 로비였다. 어두운 조명 속, 긴 테이블 위와 아래에 사과와 유리잔들이 자연스럽게 배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작은 설치미술이었다. 모니터 화면에서 차진엽인 듯 한 여자무용수와 한 남자 무용수의 짧은 춤이 동영상으로 반복되었다. 손가락으로 타인의 목 부분을 접촉하는 동작을 클로즈업한 영상이 ‘몸 자체가 내러티브’라는 안무자의 생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입구에서 입장권으로 일반적인 종이 표 대신, 빨간 종이로 팔찌를 채워주는 것이 색달랐다. 입장하는 모든 관객들에게 하얀 종이로 된 큰 안경을 나누어주고 착용하게 한다. 뻥 뚫린 장난감 안경이었지만 마치 3D 영화를 관람하러 입장할 때 특수 안경을 쓰는 기분이 들었다. 모든 관객이 크고 하얀 종이안경을 쓰니 가면무도회나 가면축제를 여는 것 같았다. 익명성을 주는 하얀 안경은 공연 내내 또 하나의 오브제가 되었으며 관객 전체를 무대미술로 만들어 공연의 극적효과를 고양시켰다.
안무자는 이 공연을 하면서 크게 세 가지 개념을 염두에 두었다. 다른 장르들과 협력하여 융복합예술을 지향한다는 것, 기존의 무대 공간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공간이란 것을 실험적으로 다시 해석하여 ‘장소 특성에 맞춘 공연(Site-specific Performance)’을 한다는 것, 또 특별히 공간과 교감하여 여러 개의 춤 공연을 하면서 일종의 춤 전시회(Exhibiting Site-responsive Dance Performance)를 한다는 것, 즉 공연과 전시라는 두 가지 형식을 아우른다는 개념이다. 이 같은 세 개의 주(主)개념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의자가 없어 관객은 공연 내내 서서 보아야 했기에 관람은 서서하는 파티를 연상시켰다. 관객들이 제각각 다른 동선을 형성하는 것도 공연의 일부가 된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는데 관객을 작품 안으로 참여시키려는 안무자의 의도였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무대와 객석의 구별이 없는 직사각형의 넓은 공간 전체를 거대한 쥘부채 같기도 하고 아코디언의 주름상자 같은 세트들이 거의 천정까지 벽을 이루며 여러 개의 독립된 방을 형성했다. 온통 흰색의 주름 벽으로 나누어진 방들이 문이 없는 열린 공간이므로 전체적으로는 미궁(迷宮, Labyrinth)의 분위기를 자아내 처음 들어서면 언뜻 미로를 헤매는 느낌을 주었다. 주름 벽, 테이블, 소파, 매트리스 모두가 흰색이므로 오래 된 옛 역사의 검은 분위기와 콘트라스트 효과가 일었다.
여기저기 사과들이 놓여 있는 각 방에서 흰 옷을 입은 무용수 한두 명이 춤과 행위예술(Performance)을 벌였다. 산발한 채, 머리 숙여 젬베(서아프리카의 전통 북. 절구 모양임)를 껴안고 정지동작을 취하고 있는 여자 무용수, 테이블에 걸터앉아 사과들을 응시하는 남자 무용수, 노트에 글을 쓰고 있는 무용수 등 각양각색이었다. 어떤 방에서는 여자무용수 두 명이 소파를 무대장치로 그 자체로서도 하나의 춤 작품으로 손색이 없는 공연을 펼쳤다. 이 모든 것이 춤과 행위예술의 전시회 같았다.
무용수들이 관객들 사이로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변화를 주었다. 관객 역시 매트리스가 있는 방, 긴 소파가 있는 방, 작은 소파가 있는 방, 안쪽에 하얀 웨딩드레스들이 걸려 있는 탈의실, 사과 조각이 진열되어 있는 벽 옆 등을 마음대로 이동하며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관객이 공연과 동선을 선택하므로 모든 관객의 경험이 달랐다. 작품 구조의 해체와 재구성의 과정이 관객에 따라 각자 다르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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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모든 주름 벽이 쥘부채가 접히듯이 일시에 접혔다. 여러 개의 방이 홀연 사라지고 넓은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는 무용수들이 빠른 동작으로 정사각형의 하얀 철제의자 6개를 공간 중앙에 일렬로 붙여 놓으며 긴 테이블을 만들었다.
인류 역사에는 ‘아담과 이브의 사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패리스(Paris)의 사과’, ‘윌리엄 텔의 사과’, ‘스피노자의 사과’, ‘뉴턴의 사과’, ‘백설 공주의 사과’ 그리고 심지어 ‘비틀즈의 사과’, ‘스티브 잡스의 사과’ 등 실로 여러 개의 사과가 등장한다. 반어법을 사용한 작품의 제목인 <Rotten Apple>은 그 많은 사과 중에서 ‘아담과 이브의 사과’를 텍스트의 알맹이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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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테이블 뒤에 아담과 이브인 한 쌍의 남녀 무용수가 섰다. 그리고는 “태초에 그 분이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한 금단의 사과를 사악한 뱀의 꾐에 빠져 이브가 따서 먹고 아담에게도 나누어 먹임으로써 선악을 구분하게 되고, 벗은 몸의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 벌로 여자는 임신의 고통을 크게 갖게 되었고 남자는 얼굴에 땀을 흘려 노동을 해야만 먹고 살게 되었으며 낙원인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다(창세기 2:17-3:24)”는 내용의 대사를 읊는다. 희극적 요소를 담기 위해 아담의 경우는 ‘얼굴에 땀 흘리는 노동’을 사과를 먹다 목에 걸려 튀어 나오게 되었다는 ‘앞 목의 혹(Adam's apple)’으로 유머러스하게 환치했다.
구약성서 창세기의 이 부분은 다기한 해석을 낳는 텍스트이다. 그 원인되는 행위와 받은 벌이 갖는 메시지는 ‘우연과 필연’, ‘부정적인 견해와 긍정적인 견해’, 어느 쪽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예로, “놀고먹는 것이 나을 수도 있으나 상응한 노동을 하고 대가를 받는 것이 건강에도 좋고 존재의 이유를 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안무자는 ‘아담과 이브의 사과’ 이야기를 연극적인 요소를 가미해 변형했다. 무용수로 출연한 안무자 차진엽을 위시한 6명의 무용수가 테이블 뒤에 앉았다. 그 광경이 마치 연 1회 한밤중에 열린다는 ‘마녀들의 연회(Witches' Sabbath)’ 같았다. 사악한 뱀의 역할을 맡은 남자 무용수가 사과 조각들을 뚜껑이 있는 쟁반에 얹어 받쳐 들고 등장한다. 선 채로 상하로 S자로 요동치며 추는 춤이 영락없는 뱀 춤이다. 이 뱀 춤을 춘 김성현은 공연 내내 숙련된 독특한 춤으로 공연의 한 줄기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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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와 업보야 어찌 되든, 뱀의 유혹에 빠진 여섯 명의 이브(Eve)들은 먹어서는 안 되는 금단의 열매를 먹는다. 순간, 이브들은 에덴동산의 선인(善人)이 아니라 선악의 양면성을 갖는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변모한다. 이후 그들은 선녀(善女)이었다가 악녀(惡女)가 되기도 하고 마녀(魔女)이었다가 신부(新婦)가 되기도 한다.
뱀이 다시 빨간 사과 한 알을 들고 나오자 이브들에게 양보란 없다. 여지없는 야수성을 노정한다. 이브들이 사과를 서로 쟁취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사이, 여섯 개의 테이블은 가운데 공간이 있는 원형으로 놓이고 이브인 여자 무용수들의 동작은 춤으로 바뀐다. 마녀와 광녀(狂女)로 바뀐 이브들은 산발한 채 광란의 춤을 춘다. 관객들에게는 스트레스의 엄청난 대리해소 효과를 준다. 남자 무용수들도 가세하여 한바탕 춤판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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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네를 타락시킨 뱀에 대한 아담의 복수가 시작된다. 철제의자 둘이 붙여지더니 아담 역의 남자 무용수(김성우)가 뱀 역의 남자 무용수(김성현)를 죽이기 위해 독하게 몰아친다. 그것은 배반을 안겨준 운명에 대한 복수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모든 것은 그들의 춤언어로 표현되었다. 춤 작품들에 싸우는 두 남자의 이인무는 흔히 있다. 하지만 거의 부상 직전의 아슬아슬한 지경까지 몰고 가는 김성우와 김성현의 다이내믹한 춤은 관객들의 시선을 그들의 춤에서 떼지 못하게 했다. 둘은 결코 짧지 않은 길이의 춤을 테이블 위, 아래로 오르고 내리며 다양한 동작과 형태의 모습을 보이면서 추었다. 호흡이 맞는 것을 넘어 절묘했다. 둘의 춤은 아크로바틱 댄스를 방불케 했다. 한 편의 수준 높은 이인무 공연이었다.
다시 장면이 바뀌어 웨딩드레스를 한껏 차려입은 여자무용수들은 거만에 가까운 자태를 보인다. 하지만 한 번 맛본 금단의 열매에 대한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다. 환생한 뱀이 다시 사과 한 알을 들고 나타나자 이브들은 미혹되어 사과를 좇는다. 한쪽 귀퉁이 테이블 위에 사과가 놓이자 웨딩드레스를 입은 이브들은 모두 사과로 몰리며 서로 차지하려 한다. 이때 관객들도 무용수들을 따라 자연스럽게 사과 주위로 모여든다. 3D 춤영화를 보면서 관객은 마치 무대 중앙으로 들어간 듯 한 착각에 빠진다지만 관객들이 무용수들 바로 옆에서 모든 동작을 보게 되는 이 경우는 3D 영화보다 더 생생했다.
다시 이브들의 춤은 광란의 춤으로 바뀌었다가 허탈에 겨운 나머지 처절한 춤새가 된다. 계속 바뀌는 춤은 야누스적인 인간의 양면성, 잠재적 욕망들, 인생의 희로애락, 운명의 끊임없는 반전을 상징했다. 결국은 모두가 쓰러진다. 혼자 남은 차진엽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공연이 끝났다.
작품은 탄탄한 구성에 의미 있는 내러티브를 갖추었다. 복잡하지만 각 장면이 맞물리면서 치밀한 복선과 계속되는 반전을 깔았다. 일상의 사물들과도 대화를 시도하면서, 수많은 상징을 사용했다. 공연예술의 엔터테인먼트 기능까지를 감안한 다양하고 의외적인 많은 볼거리들로 즐거움을 선사했다. 남녀 무용수들의 만만치 않은 기량과 그에서 우러나오는 즉흥이 장면, 장면을 연결했다. 허름한 창고 같은 건물이 충만한 아우라(Aura)와 에너지로 달아올랐다.
멀티 장르, 멀티 아트, 토털 아트, 협업 작업, 장르와 장르 간의 경계 허물기, 통섭, 크로스 오버, 복합적인 예술언어 등 온갖 용어가 난무하더니 요즘 융복합예술이라는 용어가 대세다. 춤, 설치미술, 영상, 사진, 음악, 사운드 아트, 그래픽 디자인, 멀티미디어, 패션, 푸드 인스톨레이션이라는 여러 장르가 동원된 이 작품은 융복합예술의 좋은 본보기였다. 차진엽은 무용가에서 춤예술가가 되었고 이 작품으로 춤예술의 무한한 확장가능성을 증명했다.
실상 융복합예술의 경우, 의욕만 내다가 완성도와 격을 놓칠 수 있고, 특히 춤예술이 다양한 장르와 협력할 경우 자칫 산만해지기 쉽다. 하지만 차진엽은 공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함께, 공간을 활용하며 전체를 ‘춤과 사과’라는 일관된 연결고리에 끼워 통일성과 조화를 이루었다.
공연을 보며 문득 머릿속에 백남준과 오노 요코가 떠올랐다. 이 작품은 그들과 견줄 정도의 수준과 급이 된다는 암시가 와 닿았다. 그들이 천재적으로 선구적인 발상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형예술 쪽에서의 실험이었다. 그들이 보여준 행위들은 기발한 해프닝(Happening)에 가까웠다. 하지만 차진엽은 그들의 영역과 다른, 춤과 공연예술 쪽에서 결코 예사롭지 않은 실험을 보여주었다.
*전재_ 공연과 리뷰, 2013.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