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안성수픽업그룹×WHSㆍ이윤정
춤이 도착지가 될 때, 춤이 출발지가 될 때의 현상들
이지현_춤비평가
패스트 푸드 스타일의 춤
10월 동안 두 가지의 묵직한 춤축제가 열렸다. SPAF(서울국제공연예술제, 2012. 10. 5 – 27)와 SIDance(서울세계무용축제, 2012. 10. 5-20)가 마치 경쟁이라도 하 듯 거의 같은 기간에 진행되어 볼 것이 많은 가을 시즌을 비명이 나올 지경으로 만들었다. 게으른 비평가에 속하는 나는 불과 4-5년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적당히 게으름을 부리면서도 감각을 놓치지 않으면 중요하거나 신기한 공연들을 거의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베짱으로 여유를 부릴 수 있었으나 요즘은 하루 밤에 서너 군데는 보통이고 작은 소극장이나 공연이 주로 일어나는 존(zone)을 넘어서는 공연까지 합치면 공연을 선택한다는 것은 과거의 의미와는 다른 것이 되고 만다. 두 개중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의 선택은 단순할 뿐 아니라 가능하다면 몇 시간 전의 리허설이라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어쩌면 시간표만 잘 짜면 다 커버 할 수 있었지만 하룻밤에 5개 이상의 공연이 겹쳐버린다면, 어떤 하나의 공연이 이슈화 될 가능성은 그만큼 떨어지고, 각개의 공연은 나름의 이유들로 인해 동등한 호기심을 자극하며 선택을 갈등시킨다.
이런 상황은 비평가들에게는 더욱 난감한 것인데, 비평가들이 주요 공연을 모두 관람한 상태에서 해야 할 작품에 대한 논의와 동의과정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되고 전반적이고 전체적인 평가도 곤란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게다가 춤공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복합장르의 공연까지 모두 관심을 가진다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 진다. 나는 과거에 비평가가 우리 춤계에서 일어나는 춤 공연에 대해 기록의 의무를 가져야 한다는 것에 대해 어떤 심리적 저항 같은 것을 가져왔다. 비평글이 결과물로써 기록물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의무 사항이 된다는 것은 비평의 겉, 즉 비평이 글로 쓰여진다는 것을 중시하는 것이지 비평의 내용이나 비평의 질, 비평적 담론에 관련된 것은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성실하게 공연을 봐야 한다는 것에 대한 가장 큰 걸림돌 게으름이었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한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 춤공연은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의 다양한 지점에서 창작되고 공연되며 떴다 사라져 가고 있으며, 한 명의 비평가가 대략 중요한 공연들을 커버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져 버린 상황이 도래하였다.
10월 동안 공연을 보면서 공연의 풍요 속에서 또 하나 느낀 것은 다양한 형식의 공연과 춤의 다양성은 충족이 되었으나 춤 자체에서 받은 충족감은 줄었다는 것이다. 마치 춤들은 제조과정의 효율과 스피드를 위해 포장지에서 뜯어서 약간의 조리만 하면 먹을 수 있는 패스트 푸드처럼 공연 안에 그저 약간씩 다른 모습으로 부속품이나 장식품처럼 끼워져 있는 것처럼 보였고, 공연은 시간을 채워야 상품으로 인정받는 1시간짜리 물건처럼 리듬감이나 역동성을 잃은 채 지루하고 정돈되어 있지 않았다. 주제의식 역시 뭔가 fancy 한 듯 보이지만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거나 난해함으로만 포장되되 있고 그것을 그려내는 과정의 진지함이나 충실함 측면에서 미달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런 결과의 가장 밑바탕에는 예술에 대한 다른 마음과 다른 열정, 다른 감각으로 기획되거나 제작되는 것이 중요하기 보다는 그저 지원금으로 적당한 물건을 만들어 서로 사고 파는 유통이 강화 확장된 것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예술가들의 삶은 별반 나아진 것도 없고 경쟁이 느슨해 진 것도 아니지만 과거에 비해 공연의 기회는 많아진 편이며 인풋의 물량은 늘어나지 않은 것에 비해 기회가 늘어 난 상황은 부실상품이 대량생산되어 유통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게다가 점점 확장만을 살길로 삼는 ‘축제’들이 만들어내는 무대화의 기회들이 유통의 속도를 배가시키며 이런 현상을 자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춤이 출발지가 될 때와 도착지가 될 때
춤이 출발지가 된다는 것은 ‘춤의 형식’을 창작의 출발점으로 삼는 작품들의 일컫기 위한 표현이다. 이들은 대부분 자신이 익힌 테크닉을 의심하거나 변경하지 않고 사용한다. 그들은 익숙한 동작연결을 사용하며 어떤 상황이나 맥락 속에서도 그것을 적절히 변형하는 정도에서 능숙히 사용한다. 어쩌면 이는 너무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나 춤의 스타일과 그의 바탕이 되는 테크닉을 배운다는 것과 춤작품을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수 도 있다. 작품은 작품 나름의 탄생 기전이 있고, 그것이 과정에서 성숙되어 결과물로 나오는 일련의 창조과정이기 때문에 그 안에 춤은 얼마든지 형식과 스타일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춤이 출발지가 되는 작품들이 그 과정을 잘 겪어내지 못하면 그들은 익숙한 그들의 몸에 벤 동작을 패스트 푸드처럼 약간의 가공만 하여 통째로 끼워 넣는 식으로 작품을 만든다.
네이 하세가와라는 일본 도쿄출신의 작가, 연출가, 안무가와 우리나라의 댄스씨어터 4P의 이주형이 안무를 맡고 김수민이 기획한 〈도시의 부재〉 (SPAF, 10. 19-20.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는 “서로의 기술력과 아이디어의 결합으로 새로운 총체적 방식의 표현주의 작품을 만들어 가는 것에 목적을 두고” 만들어진 신작이다. 하세가와는 공간연출과 그것의 시각적 미장센을 만들어 내는 데 나름의 감각을 갖고 깔끔한 백열등을 균일한 간격으로 중간 높이로 늘어 뜨리고 상수쪽에 하나의 문틀을 세워 놓은 다음 나머지의 일상 소품들 – 옷걸이, 카트, 컴퓨터, 바구나, 오디오, 타이어, 선풍기..-을 무대에 늘어 놓았음에도 밝고 간결한 무대 이미지를 연출하는 솜씨를 가졌다. 그는 주로 일본어로 이야기하며 자신이 표현하려고 하는 것을 일상적인 친숙함으로 관객에서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댄스씨어터 4P는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황-얼마든지 우연히 일어나는 사람들의 부딪힘-을 반복하여 도돌이표로 보여주는 것을 표현한다든지 춤으로 풀어내는 부분을 맡아서 보여주고 있었다. 도쿄에 앉아 한국 컴퓨터를 쓰며 신라면을 먹는 상황으로 도시에서의 삶에서의 분리감과 동시성에 대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는 작품의 의도는 색다른 무대연출로 도드라졌으나 그 외의 춤의 부분은 작품으로 귀속되지 못한 채 독립적인 형식으로 겉돌고 있었다. 공동작업의 여러가지 한계와 어려움은 짐작할 만 하나 우리나라 안무가들이 해외 작가들과의 공동작업에서 무엇을 만나고 무엇을 협력해야 하는 지에 대한 고민없이 공동작업이 주는 경험의 확장만을 이점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그 결과물을 관객이 보고 있다는 것을 망각한 처사가 아닌 가 싶다. 관객은 그들이 어떤 과정으로, 얼만큼의 자금에 의해 그 일이 성사 됐는지는 관심사안이 아니다. 관객이 보는 것은 무수한 과정이 응축되어 나온 바로 ‘공연물’ 일 뿐이다.
〈Double Exposure〉 (SIDance, 10. 13-14. 자유소극장)는 예경의 한국-핀란드 커넥션의 일환으로 안성수 픽업그룹과 컨템포러리 써커스와 비주얼 씨어터 그룹인 WHS의 공동작업으로 제작되어 서울과 헬싱키에서 공연된 작품이다. 공동작업이 진행된다는 소식이 있을 때부터 써커스, 비주얼 씨어터라는 우리에게는 좀 생소한 표현 장르와 안성수씨가 작업을 한다는 것은 많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도 우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핀란드의 거리감 만큼이나 이 두 예술 그룹의 작업이 어떤 식으로 접합의 효과를 이룰 것인지에 대한 관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조금은 암울한 톤으로 진행된 작품은 미용실에서 흔히 보는 여성 마네킨 두상과 가발이 주는 시각적인 환상성과 괴기성이 컨템포러리 써커스가 주는 현대적 환상과 마술의 자극 지점을 창출한 것에서 신선함을 연출했으나 그것이 하나의 작품으로 통일적인 완성도에 도달하기에는 구조적으로 허약해 보인다. ‘이중적 노출’에 의해 몸의 반쪽과 또 다른 몸의 반쪽이 그림자로 연결되어 하나의 춤이 되는 것이나, 목을 숙인 채 목뒤에 마네킨 두상을 얹어 몸과 얼굴이 이질로 접합되어 연출하는 야릇한 변형의 자극들은 꽤 흥미로운 것이었으나 무거운 작품 전체의 톤을 감당하기에는 이런 변형들은 오히려 장난이나 가벼운 놀이에 불과해 작품이 의미심장하게 도달하려 했던 총합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안성수의 안무 역시 춤의 형식에서 자유로워 지지 못하고 자신이 익숙히 쓰던 방식을 고수하면서 새로운 것을 기대했던 관객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안무가나 무용수가 자신이 익히고 익숙한 춤의 형식에 과도하게 기댈 때 관객은 이미 그 춤의 속성과 흐름을 파악한 후 라면 금새 호기심이 떨어지고 지루해 진다. 특히 협업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세계와 충돌한 결과로써의 확장이나 변형이다. 그러나 협업은 항상 그렇듯 보다 많은 어려운 조건 속에서 진행되기 마련이고 작업에 집중해야 가능한 새로운 변형이나 확장은 오히려 더 어려운 조건이 된다. 그러나 어쩌랴 관객은 바로 거기서 다른 것을 원하고 기대하니 말이다.
춤이 도착지가 된다는 것은 공연물로써의 춤이 어떤 형식을 고수하며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럴 때 창작자는 춤의 출발을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내는 경우가 많고 그것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형식언어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자신의 출발점을 놓치지 않고 고수하기 위해 형식과의 갈등에서 형식을 조탁하는 방법을 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춤들은 성공할 경우는 아주 새로운 춤언어 -개인의 내면적 개성이 묻어나는 새로운 창조물- 가 되거나 실패할 경우 조악한 춤형식에 머물 수 있다. 춤의 형식을 갈아 자신의 언어화하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만약 창작자가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난 주제를 놓치지 않고 잘 견지했다면 그것의 힘이 작품 곳곳에 묻어나기 때문에 그나마 결여감을 충족시킬 수 있다.
요즘은 거의 보기 드문 공연인 자비(自費)만으로 하는 공연이 있었다. 이윤정 안무의 〈고백점프〉(2012. 11. 2. 메리홀 소극장)는 ‘춤추는 언니 이윤정이 바라 본 용기 있는 세상살이 이야기’로 펼쳐진 소박한 개인 무대였다. 자신의 예술가 친구들의 도움으로 “최고의 스텝진”을 꾸려서 (원래는 연극 연출가이지만) 프로듀서 남인우, 작곡계의 여신 신성아, 작곡계의 마당발 박소연(마당발과 작곡 능력과 무슨 상관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명계의 최고 동안 김철희(동안이 조명하는 데 도움이 되나?), 섹시 비디오아티스트 양소영, 춤추며 의상하는 곽고은, 안무계의 똘똘이 스머프 음향오퍼 윤푸름, 표관리에 의리파 춤꾼 나연우, 주정민 등이 도와 공연을 만들었다. 이윤정은 자신의 고백을 기미춤, 금연춤, 방바닥춤, 고백춤, 춤을 위한 춤, 영상춤(Climb), 고백점프춤, 사랑춤으로 소주제별로 춤을 추었다. 순전히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자서전적인 이 춤들은 하얀 커튼을 사선 각도로 천정부터 길게 치고 작은 스탠드 하나로 그녀의 방을 연상하도록 꾸민 공간에서 벌어진다. 샤워 가운과 머리띠를 두르고 맨얼굴로 당당히 나타난 이윤정은 작고 단단하고 잘 긴장되어 있는 몸으로 무대를 반짝거리게 채워나갔다. 시종 자신에게 집중하면서도 그저 방안에서 추는 진짜의 혼자춤이 아닌 것 춤으로 무대화되는 지점을 적절히 잘 잡아며 찬찬하게 풀어 나갔다. 그러나 각각의 춤들은 뚜렷이 구별되거나 맥락을 달리해서 각춤으로 살아나 각인되기에는 변별력을 갖지 못했다. 이는 각각의 춤이 발생되는 서사적 계기를 드러내지 못하고 내면의 분위기에만 머물러 동어반복적으로 된데다, 장치와 의상의 변화가 미미하여 색다른 변화를 창출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윤정 춤이 주는 매력은 자신의 생활로부터 나온 것들을 고스란히 자원으로 삼았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만들어낸 공연장의 풋풋한 분위기와 더불어 팜플릿도 없이 초록빛 엽서 사이즈와 분홍색 A4사이즈의 홍보물 한장, 그리고 공연 후반부에 입고 있었던 분홍색 주름 원피스까지 과장하거나 포장하기 보다는 소박한 듯, 정갈한 듯 하여 이윤정 만을 드러내는 데 이 모든 것들이 성공적으로 작용하였다. 작품의 주제와 소재가 자신의 삶으로부터 끌어 낸 것이긴 하지만 춤의 진정성은 잘 유지된 편이고,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춤을 썼다기 보다는 자신이 평소에 하던 짓과 표정, 춤을 조금 다듬어 보여주는 방식으로 표현함으로써 한 여자의 방을 들여다 보는 듯한 공감과 잔잔한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윤정이 창작자로써 성숙해 가면서 춤의 형식과의 힘겨루기에서 이기는 일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벗어난 다른 주제를 다룰 때도 자신만의 감성과 개성으로 춤형식을 조탁하여 새로운 춤언어를 만들어 내는 지는 춤창작자 누구에게나 부과된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윤정이 가진 장점은 자신으로부터 출발점을 삼는 시도를 잘했다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쉽사리 춤의 형식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통의 구조에 탯줄을 틀고 잉태된 작품들이 춤의 생성지점에서 진지한 고민과 발효의 과정을 피하고 간편하게 자신의 창작물을 재활용하거나 의미없는 동작들을 맥락과는 상관없이 추어대는 것은 춤이 다른 장르와 융합하거나 공동작업을 해서 얻는 것과 바꿀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는 마치 신체의 일부를 팔아 먹을 것을 사는 것과 같이 자기를 갉아 자기를 연명하는 건강하지 못한 생명유지의 방법일 테니 말이다.
더욱 빨라지는 작업의 속도와 결과에 대한 요구, 지금까지의 구조로는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기회들, 그 기회들이 요구하는 값싼 감각들이 지금 많은 공연장에 넘쳐나는 춤들을 에워싸고 꼼짝 못하게 하는 건 아닐지 살피는 게 필요하다. 볼 건 많아도 새로운 건 없으며, 새로운 건 결코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바빠도, 귀챦아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12. 1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