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싸이의 <강남 스타일>의 진동
K-pop이라는 대명사를 갖게 된 한국의 가요에서의 춤이 국내외의 초점이 되고 있다. 이 춤들은 대중 오락춤, 이른바 방송댄스로 불리며 주로 방송을 타는 가수들의 노래에 맞춰 안무된 춤을 말한다. 90년대 댄스가요의 열풍이 불기 전엔 ‘백댄서’들이 춤의 중요한 부분과 전체적인 열기를 드높이는 것이었다면 82년 빌리진과 빗잇을 들고 마이클 잭슨이라는 춤의 신이 부상하면서 우리에게도 불어 닥친 춤신들의 강림은 이후 가수들이 직접 춤의 중심을 끌고 나가는 흐름을 형성했다. 케이팝 아이돌들은 그룹의 인원수만으로도 무대가 차고 넘치는 춤을 노래와 맞먹는 비중으로 보여줄 역량을 갖고 있으며 케이팝을 사랑하는 해외의 한류팬들은 바로 그들 춤의 수준과 강렬함에 매료되었다고 말한다. 특히 현재 각종 국내 가요 차트 뿐 아니라 유투브를 통해 해외언론과 이 춤에 대한 대중적 열기로 확산되고 있는 싸이의 <강남 스타일>은 그룹의 규모가 열명을 넘는 세태 속에서 아이돌이 아닌 아이둘(의 아빠가수) 1인이 일으킨 독특하고 개성적인 춤이 열풍의 중심이라는 점에서 더욱 강렬하고 특별하다.
이런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중심엔 이전까지 익히 보아왔던 싸이 춤이 갖고 있는 B급 파괴력이 잘 정돈되어 완성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측면과 춤 외적으로 이 B급의 춤이 가식과 허위의식이 팽배해 있음에도 그것에 대응할 만한 가치의 부재와 혼돈 상황의 틈에 절묘하게 A급의 아성을 강타하는 기획전략들이 성공한 측면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잘 짜여지고, 매끈하게 추어져 따라하기 쉽지 않을 것 같은 아이돌의 춤 사이에서 싸이의 이 싸보이는 춤들은 B급의 뻔뻔함과 당당함으로 거부할 수 없는 포스를 갖추고 있다.
싸이의 그간 음악적 흐름이 음악의 형식이나 가창력에 공을 들여 환상을 주는 길을 간 것이 아니라 난척이나 잰척없이, 게다가 랩, 발라드 등에 구애됨 없이 특히 가사에 자신의 생각이나 가치관, 좀 구체적으로 현재 세상의 허위의식에 대한 비판을 담으려는 일관된 세계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음에도 인정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이는 역시 싸이가 한 것은 웬지 다 똘끼에서 나온 별 고려할 가치가 없는 허접한 것이라는 B급에 대한 푸대접과 함께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마치 검열을 거친 것에 익숙한 우리의 감각에 그것을 거치지 않은 거 같은 감각적 불편함, 즉 금기시 된 권력과 성을 건드리는 거침없음에 대해 갖는 일종의 비호감 방어심리, 또 적절히 그것을 확인이라도 시켜주 듯 군대 스캔들까지 겹쳐 도무지 싸이를 구석에서 꺼내줄 거 같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이번 <강남 스타일>에서는 YG가 소속사 라는 것도 중요하게 영향을 미쳤겠지만 자신이 B급임을 오히려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을 전략삼아 ‘뛰는 놈위에, 나는 놈, 베이비 베이비 난 뭘 좀 아는 놈’임을 자처하며 비호감을 급호감으로, B급을 주인공으로 바꿔놓는 전복적인 파괴력으로 진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역시 <강남 스타일> 인기 열풍의 핵심에는 ‘말춤’이 있다. 강남 스타일과는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 춤은 오히려 그간 싸이가 뭔가 대중적인 응원가를 감당할 신명 넘치는 한국적인 것을 음악적으로 만들어 내려 했던 맥락에서 기인하고 있으며, 그래서 말춤에는 꽤나 정교한 여러 전략들이 숨어 있음을 찾을 수 있다. 싸이의 대부분 뮤비에서 연출되는 노래의 첫 부분이나 후렴부분에 가면 카메라를 향해 떼를 지어 전진하는 돌격 인해전술 같은 전진스텝이 이번에는 말타기의 리듬을 갖추고 맡타고 달려오는 듯한 강렬한 느낌을 주도록 짜여져 있다. 그 부분의 춤역시 첫 대목은 손목을 모아 고삐를 잡고 말을 타는 동작과 다음은 카우보이처럼 오른 손으로 채찍을 돌리는 동작으로 강화시키면서 흥을 돋구도록 짜여져 있다. 이 리듬은 한 뉴스의 분석에 의하면 0.5초에 한번씩 비트가 반복되는데 이는 약간의 달리기를 한 후 기분 좋은 맥박수인 1분에 120회에 해당하는 심박 비트와 같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비트에서 적당한 흥분감과 열기, 그리고 감정의 고조를 느끼게 되고, 이 비트가 A-B-A-C 구조의 선율로 변화되면서 반복되어 묘한 중독적인 매력을 갖게 된다. 레이디 가가의 댄스곡 역시 0,5초 비트이나 말춤에는 3분박으로 쪼개지는 0.5초 비트라는 점이 다르다. 그래서 겉으로 듣기에는 레이디 가가의 댄스곡과 <강남 스타일>의 비트가 같아 보이지만 그 안에는 말 스텝의 리듬인 ‘다그닥 다그닥’ 으로 촘촘히 메꿔진 3분박이 숨어 있기에 말춤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깔금함과 함께 반복할 경우 단순 2분박과는 달리 경쾌하면서도 완만하게, 그러면서도 감칠맛 나면서도 지속적인 쾌감을 주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다리를 벌리고 전진하는 동작이나 옆으로 전진하는 말타기 동작 외에도 싸이 춤의 감칠맛은 신이 오르면 박자를 쪼개서 부담스러운 체중을 두려워하지 않고 몸을 날렵하게 만드는 발구르기와 같은 스텝이다. 이런 동작은 짜여졌다기 보다는 정말 싸이의 자연스러운 신명표현으로 흥에 겨워 어쩔 줄 모를 때 발을 구르는 동작으로 짜지 않고 그저 기운을 풀어놔 발이 마구 움직이도록 하기 때문에 막춤 같은 인상을 주지만 사실 이 싸이의 막춤에서 보는 사람은 그의 체중실린 무게감이 바닥에서 튕기는 거 같은 ‘육중한 발람함’을 그대로 느끼게 되고 그 강렬한 근지각적 체험은 뇌리에서 싸이의 신명을 같이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또 하나 싸이의 코드 중 빠질 수 없는 성적 동작들, 상대를 바닥에 엎드리게 한 후 다리를 벌리고 그 위에 서서 한 다리에 무게 중심을 놓고 다른 다리의 허벅지를 안과 밖으로 회전시키면서 얼러주는 동작을 사이사이 섞음으로써 <강남 스타일>의 춤들은 기마민족의 유전자를 3분박의 다그닥 거림으로 자극하고, 엉덩이를 옆으로 흔들면서 이동하거나 허벅지를 강렬하게 회전하면 본능적인 성적욕망을 자극하게 끔 짜여져 있는 것이다. 이 춤의 ‘전복적 건강성’은 경제난과 정치혼란, 더위와 황당한 사건들에 지쳐 있는 이즈음의 대중들의 어이없음을 한순간에 날려버리는 B급의 강한 사기충천에 있으며 B급들이 당당하게 말을 타고 달리는 전진하는 승리의 기운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세파에 시달려 육체적 자기(body-self)의 근원적 무력감으로 지쳐있는데다 연일 TV에서 보는 춤들이란 생명력과는 무관한 느끼하게 포장되어져 다시 한번 무력감에 빠져 있는 몸의 생명력에게 뚱뚱하고 못생긴 싸이가 바닥을 깔아 줌으로써 저런 짓을 나도 해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주고 그것을 일깨우는 리듬과 춤을 주어 근원적인 생명 에너지가 출렁거리면서 터져나오는 경험을 하게 해주는데 손색이 없는, 그래서 사랑받는 건강한 춤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스프링 댄스 씨어터의 <춤추는 논객- 길위의 사람들>
<강남 스타일>의 열풍이 언제까지 어떻게 확산될지는 아직은 미지수다. 최근 싸이는 다저스 구장의 게임 중 ‘댄스 타임’에 이 춤이 소개되는 시간을 갖기도 했으며, 미국진출도 의논 중이라고 연일 뉴스의 메뉴를 바꿔가고 있다. 이런 공식적인 활동의 확산 외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대중들의 반응이고 오히려 싸이의 활동은 이제 대중이 싸이에게 요구하는 것에 응하는 것으로 주도권이 대중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뮤직비디오의 다양한 패러디들은 이제 그 뮤비들 안의 말춤을 다양한 사람들이 추는 것을 담아 내면서 모든 사람이 쉽게 출 수 있고 추고 싶은 춤으로 검증 받아가고 있으며 그것을 넘어 <강남 스타일> 뮤비 전체 ‘따라하기’(패러디 하여)를 통해 모방에서 창작으로 가는 길을 모색 중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나의 춤이 만든 창작자의 손을 떠나 대중으로 손으로 넘겨져 그것이 대중의 손을 통해 무한 확산되는 것은 춤이 하나의 미디어로써의 기능을 충실히 하여 연예인과 대중, 창작자와 관객 사이의 상호작용(interaction)의 중요한 공간이 창출되었음을 의미한다.
여태까지의 춤들은 보여주는 춤과 추어지는 춤으로 단단히 나누어져 진행되는 역사를 이어오면서 보여지는 춤은 예술춤으로 주로 예술가는 재현으로서의 오브제인 춤을 만들고 관객은 그것을 관조하는 관계였다면, 요즈음은 이런 관계의 지루함을 깨고 관객은 스스로 몸을 통해 적극적으로 춤을 받아들이고 춤을 추는 온몸으로의 수용, 해석을 원하는 ‘독자의 탄생’을 맞았으며, 예술가는 무엇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적이고 현존적인 수행(performance)를 통해 관객과 시공간의 현재성을 나누어 바로 그 자리에서 예측 불가능한 최초의 것을 창조하기를 즐기는 흐름 속에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싸이의 <강남 스타일>의 대중적 유행을 통해 보여진 창작자의 정확한 대중적 전략과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중의 춤에 대한 열망이 상호작용하는 공간, 그런 틈이 생겼다는 것은 춤이 그곳에서 자신의 건강성을 회복하고 있는 좋은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술춤, 무대춤이 처한 현실도 이와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술춤은 이미 관객대중의 사랑을 놓쳤고 그래서 외롭게 고군분투하나 마치 자양분이 끊긴 고목나무와 같이 생기를 잃은 지 오래다. 예술은 원래 대중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 지 모르나 그 궁색한 변명 역시 어느 정도의 예술 애호가라도 있어야 가능한 상황이고 특히 국내의 예술춤 관객의 빈약한 상황은 더욱 참혹하다. 그러나 작년부터 불고 있는 커뮤니티 댄스의 바람을 타고 몇몇 예술가들이 대중들을 직접 만나 춤을 나누고 그들을 무대에 끌어 들이는 일들을 통해 춤의 생태계를 확장하고자 하는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용감하게 대중을 찾아 나서는 안무가 중에 한명이 최경실이다. 최경실은 춘천 아트 페스티벌에서 진행한 중년여성 대상 댄스 프로젝트인 <당신은 봄내에 살고 있군요>라는 커뮤니티 댄스 프로그램을 초기에 장은정과 함께 진행하면서 공연을 올렸고, 춤을 사람과 삶속에 다시 움티우고 싶어하는 안무가의 길을 추구해 오고 있다. 나는 최경실의 스프링 댄스 씨어터의 <춤추는 논객-길위의 사람들>(2012. 8. 3-5. 아르코 소극장)을 앞서 언급했던 ‘관객과 춤의 상호작용의 공간’이라는 틀로 바라보고 싶다. 예술춤이 대중에게 다가가 스스로 힘을 차리고 새로운 춤을 창조해보고자 하는 중대한 순간에 안무가들은 성급히 그들을 무대에 올려 놓는 전시용 방식의 단면들을 보고 있는 흐름 속에서 안무가들이 오히려 짚어봐야 할 것은 과연 ‘춤과 대중의 관계를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 ‘그 사이의 상호작용의 공간을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창출할 것인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경실은 <춤추는 논객-길위의 사람들>에서 보여주는 공연으로서의 틀속에서 춤이 전공이 아닌 사람들을 4명을 출연시켰다. 다재다능한 배우인 장고, 스타킹에 출연한 무엇이든 세우는 섯다맨 변남석, 작가인 장정희, 건축사사무소 상무이사인 김수미 등이 출연하여 ‘길위의 사람들’로서 자신의 직업과 관련된 이야기와 춤을 보여주거나 군무를 함께 추며 무대에서 별 이질감 없이 어울린다. 그 외의 5명의 무용수들이 본격적인 춤을 담당하는 것으로 이들의 춤을 에워싸면서 전반적으로 무대는 솔직하고 가식이 없으며, 푸근하고 차분하다. 춤꾼이 아닌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다른 결들이 어떤 안무가보다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만들어 낸 것은 최경실의 춤에 대한 관점이 만들어 낸 미덕으로 보인다. 일반 사람들이 자기의 이야기를 무대 위의 보여주는 춤으로 담아낸다는 것은 수많은 공정을 필요로 하는 섬세한 작업이다. 대부분 그들은 춤을 너무 좋아하고 사랑하기에 출발할 수는 있었으나 적절한 방법을 아는 가이드가 없다면 춤이 있는 무대에 도착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꼭 해내야 하는 동기가 사실은 별로 없다. 그래서 무대로 올라오는 일반인들은 대부분 춤에 대한 열린 자세로 안무가의 요청에 의해 마음을 내는 정도로 주도적일 수 없는 위치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에게 무대경험, 자신의 표현하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무대에서 펼쳐보이는 경험은 일생에 아주 중요한 경험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을 보는 일반관객의 공감을 끌어내게 되는 역할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지만 무대로 들어오는 일반인들의 춤, 그것도 유료관객을 앉혀 놓고 행하는 공연으로서의 무대에서 그들이 주도할 수 없는 상황은 참여자의 특별한(혹 인생의 방향성까지 바꾸게 될지도 모른 폭탄 같은) 경험의 차원을 넘어서는 일이기는 어렵다. 이런 명확한 한계 속에서 안무가들이 길을 잃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그런 작품은 재롱잔치를 가미한 그저그런 공연이 되기 쉽지만 안무가는 그것에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는 착각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예술춤의 춤언어, 무용가들이 쓰는 그 언어를 변형없이 그들이 사용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기에 그들을 춤과 어떻게 만날 수 있게 해줄 것인가는 다른 차원에서 고민해야 할 주제라는 것이다. 최경실은 그것에서 ‘자신의 삶의 이야기’라는 분모를 찾아내고 그것을 관객과의 소통지점으로도 활용하려는 전략을 쓰고 있다. 일반인들의 춤이 이질감 없게 느껴진 부분은 그런 진솔한 자신의 삶의 얘기를 꺼내면서 춤이 시작되었다는 것에 힘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춘 춤이 과연 그런 이야기를 담기에 적절했느냐는 것은 다시 판단해야 할 부분이다. 앞의 싸이의 경우에서 대중이 스스로 춤을 받아들이고 추게 된 경위는 일단 연예인이 대중을 고려해 춤을 만들고 그 춤이 적절한 대중매체를 통해 유통되면서 대중이 그 춤을 선호하게 되면 대중은 스스로 그 춤을 모방하거나 패러디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면서 그 춤을 즐긴다. 또 다른 관객은 싸이의 것이 아니라 그 춤을 즐기는 자신과 같은 다양한 대중들의 모습을 다시 즐기는 무한 반복의 보고 즐기는 관계가 복제된다. 이렇게 이어져 나가는 춤의 자발적 확산과정은 바로 대중을 작용이 일어나는 공간으로 끌어 들이는 여러가지 조건들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조건은 다르지만 현대의 예술춤이 대중에게 다가가고자 할 때 역시 대중이 춤을 즐길 수 있도록, 자신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매력적인 춤의 방법들을 나누고 그들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춤에 빠져들도록 하는 것이 첫 단계가 되는 것은 중요하다. 그 첫 단추가 잘 꿰어져야 그 다음 춤을 즐기는 일과 춤을 발산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싸이의 흥이 터져 나오는 막춤에서 보듯이 춤의 생명력을 발산할 어떤 순간을 함께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가 춤예술가의 전문적인 역할이 필요한 지점이고 전문가라 함은 춤의 이런 전체의 길을 훤히 알고, 그것이 어떤 경로를 통해 고지에 다다를 수 있는지를 잘 안내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춤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출발점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열고, 자신을 알고, 자신의 생명력과 만나고, 거기서 삶의 근원과 우주의 근원이 하나임을 체험하여 그 혼연(渾然)과 순일(純一)을 드러내어 신나는 충만함으로 튀어 오르는 그런 것, 나는 그런 것을 춤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런 춤이 대중이건 예술가건 누구라도 춰야 할 건강한 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