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예술이 사실적이기 위해서는 인간의 시각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하나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자체가 허상이다. 누구나 자신이 속해 있는 문화권의 풍토, 성향, 가치관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지 않는가? 작품을 만드는 이도, 그 작품을 보는 이도 작품에서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제거하기란 어떤 의미로든 불가능에 가깝다. 춤을 만드는 것이란 마음을 생각하고 관찰하고 관객에게 전달하는 작업이다. 추상적인 춤으로 형상화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본다? 불가능하다. 인간은 보는 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대로 본다. 이것이 진리다.
무대(라고 상정한)의 춤이 반드시 객석에서 다 보여야 되는 것은 아니다. 춤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이 있으면 된다. 움직임이 다 보이지는 않지만 공간 어디엔가는 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안다. 지나가버렸다고, 지금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않았던) 것은 아니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그려보는 것. 예술이 가진 힘이다.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 추상적인 춤이 아니라 서로 공유하는 언어로, 그 언어라는 것도 살다 보면 도저히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때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춤이 필요하다. 춤으로도 말로도 안 되면 노래를 하기도 한다. 피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가 그것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잃어버렸거나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해 그리워하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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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숙&현대무용단 사포(예술감독 김화숙)가 전주 한옥마을 공간 ‘봄’에서 ‘사포, 말·을·걸·다’라는 큰 제목으로 5월부터 9월까지 관객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봄'에서, 5월 26일 『오월, 어느 날』을 시작으로 6월 30일 『누구신가요?』, 7월 21일 『아! 거기 당신』, 8월 25일 『등을 기대요』에 이어 마지막 9월 22일에 『바람결 그대』로 마무리되는 옴니버스 공연이다.
오월 어느 날 거기 있었던 당신의 얼굴은 보지 못한 채 『등을 기대요』(8월 25일)를 보러 갔다.
먼저, 공연이 이루어진 카페 ‘봄’의 공간을 설명한다. ‘봄’은 일제강점기 때의 적산가옥을 개조한 공간으로 그리 크지 않은 네모난 두 채의 크고 작은 공간이 서로 비스듬하게 마주 보게 배치되어 있다. 그 두 채의 홀을 이어주는 나무 바닥 작은 테라스, 테라스 끝의 나무로 세워진 벽, 큰 홀을 끼고 카페로 들어오는 좁은 풀꽃 길과 작은 나무가 서 있는 정원, 두 공간을 이어주는 세로로 긴 유리 문틀은 춤추기에는 좀 좁아 보였으나 막상 공연이 시작되자 춤과 어울려 그 자체로 근사한 무대장치가 되었다.
오후 7시, 공연이 시작되자 음악과 함께 물컵을 얹은 쟁반을 든 무용수들이 미소를 띤 채 관객들이 앉아 있는 탁자 사이를 마치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듯 걸어 다닌다. 이어 큰 홀과 작은 홀에서 무용수들이 한 줄로 서서 가슴께로 접어 올린 팔과 엉덩이를 가볍게 흔들면서 관객들의 사이를 지나 작은 정원과 테라스로 나가 춤을 춘다. 페르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영화 '그녀에게'의 엔딩에 삽입한 피나 바우쉬의『마주르카 포고』의 파두와 춤, 흥겨우면서도 묘한 슬픔이 일던 영상이 떠오른다. 상체와 팔을 크고 깊게 쓰는 춤동작들이 나무 테라스와 흙과 작은 돌이 놓인 정원의 공간과 잘 어울린다. 무용수들의 민소매 흰색 상의와 파스텔 톤의 진하고 연한 핑크, 청록색의 하늘거리는 치마, 화장기 없는 얼굴, 손으로 대충 빗어 묶거나 핀으로 고정시킨 머리칼이 주는 자연스러움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관객이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탁자 옆, 유리문을 하나 넘은 바로 코앞에서 춤을 추는데 짙은 화장이 왜 필요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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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 안에서 본 창밖의 춤은 그 일렁임이 마치 어항 속의 풍경 같다. 강정현의 춤이 일순간 그 일렁임을 춤의 이야기로 엮어낸다. 홀을 연결하는 입구 문틀을 잡은 채 문밖을 내다보는가 하면 하면 문기둥에 등을 대고 돌아서는 등의 단순한 동작으로 그는 춤의 주제를 가볍게 그려낸다. 바위같이 성실하게 춤을 추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을 강인한 춤의 에너지를 강정현은 가지고 있다. 어둠이 내리는 테라스에서 나무 벽을 이용하며 춘 박진경의 솔로는 아름답고 슬펐고, 비제의 오페라 『진주조개잡이』에 나오는 「귀에 익은 그대 음성」에 춤을 실은 김자영과 강정현의 듀엣은 절절하고 깊었다. 박진경의 춤에서 고인이 된 신용숙을 본다. 머리칼과 등, 긴 팔의 움직임으로 슬픔을 잘 추던 그녀. 몇 년 사이 김자영의 춤은 편안하고 단단해졌다. 사포 단원들의 풋풋한 춤과 공간 ‘봄’이 서로 잘 스며들어 인상적인 작품이 된 것은 공간에 맞게 선정한 음악의 역할과 공간 시간 동선 등을 촘촘하게 계산하여 연출한 예술감독의 힘이 크다. 차를 마시며 자유롭게 감상한다는 카페라는 특수한 공간에서의 작업은 자칫 가볍고 싱거운 해프닝이 되기 쉽다. 안달루시아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유대인들의 민요 「목동 소녀를 사랑했네(Una Pastora Yo Ami)」를 춘 박진경의 춤은 음악이, 음악은 춤이 되었다. 쇼팽의 「6월에는」, 비발디의 『4계』중 「여름」,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 그리고 에디트 피아프의 「아니야, 나는 전혀 후회하지 않아」 가 흐르는 해질녘 카페에서의 춤을, 거기에다 음악이 조용하게 잦아들면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무대를 상상해보라. 아마 지난 7월 『아! 거기 당신』이 공연될 때쯤엔 붉은 노을이 테라스에 조명처럼 걸렸을 것이다. 9월 『바람결 그대』는 어떤 얼굴인지 궁금하지만 필자가 사는 곳에서 전주는 너무 멀다. 카페 ‘봄’이든 그 유명한 ‘다다’의 산실 카바레 ‘볼테르’든 의미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람이다.
카페 안의 조명이 작은 테라스와 정원을 밝히고 있다. 정원에서 등을 마주 대고 앉아 있는 두 무용수. 극적인 동작보다 깊은 여운을 남긴다. 춤을 보고 있자니 슬퍼졌다. 홀과 작은 정원과 테라스에서의 춤이 이어지고 있다. 정원에서의 춤을 보느라 두 홀 안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몸과 머리를 돌려 정원 쪽을 보는가 하면, 테라스의 춤을 보느라 또 몸들을 돌린다. 테라스와 정원, 홀에서 동시에 춤이 이루어지면 자신이 보고 싶은 춤을 본다. 필자가 앉아 있는 큰 홀 안쪽 가장자리에서 건너편 홀을 바라본다. 춤을 보고 있는 관객들의 모습을 보는 이쪽 홀 안의 관객들 모습이 창에 어린다. 다시 정원 쪽으로 난 창, 홀의 조명으로 인해 관객들의 모습들과 무용수의 춤이 중첩되어 창에 겹쳐 뜨는 그림은 잠시 현실 같지 않다. 누가 춤을 추는지, 누가 보고 있는 이들인지. 춤 공연에서 처음 보는 그림이다. 관객들이 풍경이 되어 피어난 공간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보는 나와 보이는 춤이 분리되지 않는다. 오직 보는 과정만이 있다. 무심하게 보고 있을 때 나는 없다. 내가 없으니 춤도 없다. 순수한 에너지의 흐름, 전일한 과정만이 존재한다. 삼매(三昧)의 과정이다. 보이지 않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더 잘 보기 위해 일어서거나, 목을 길게 뺀다거나 그들 춤의 의미를 알려고 애쓴다면 이 전일(全一)의 평화는 깨어지리라. 그리고 분별이 생기리라.
혹, 춤을 보고 있던 내가 잠시 나비의 꿈을 꾸었나.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장자는 어느 날 기이한 꿈을 꾸었다.
어느 날 내가 꿈을 꾸었다. 나비가 되어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로이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그러다 문득 깨어보니 아하! 꿈이라. 가만있자. 그것이 꿈이었던가. 혹 모르지. 내가 조금 전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는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지금 내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나와 나비는 자연이 마련한 분수 안에 있다. 그 사이의 걸림 없는 이동을 만물의 영원한 회귀 물화(物化)라 이른다.
세계가 지금과 다르게 될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예술인 것처럼 예술은 구체적일 수 없음을, 현실을 부정하는 차원에 머무를 수도, 또 현실을 그대로 예술과 섞어 보여주는 통로이기도 하다. 나는 춤이 세상을 바꿔놓지는 않더라도 감동과 재미 정도는 무장하고 관객에게 손을 내밀기를 바란다. 예술의 올바른 감상법(올바른 감상법이라는 게 있기는 하는지)과 그 효용성에 대해, 혹은 세상과의 화해, 유토피아를 구현하는 것은 오직 예술이라는 데 대해 애써 가르치지 않아도 예술만이 현실에 존재하되 현실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춤이 사람들에게 보여주길 바란다.
가만, 그날 테라스에서 울던 풀벌레가 꾼 꿈속 인간이 지금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나인지도 모를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