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23 모다페(MODAFE, 국제현대무용제)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과 아르코예술극장에서 9월 20일 ~ 10월 15일 열렸다. 해외 단체, 국내 단체를 함께 초빙하는 관례는 국제현대무용제의 창설 이래의 전통이었다. 올해 초빙된 해외 단체는 3단체에 머물러 적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올해 초빙된 단체들이 나름 무게감이 있어서 그런 인상을 얼마간 상쇄해 주었지만 향후 보완할 점이 아닌가 한다. 최근 몇 해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모다페에서 해외 초빙 규모의 축소가 더욱 굳어진 듯하다. 해외 초빙 단체의 건수가 행사의 품질을 좌우할 절대 요인도 아니고 해외 초빙에의 지나친 의존이 부를 부작용도 감안되어야 할 것이다. 해외 초빙 규모에 치중하여 부실한 단체들을 초빙하느니 이번처럼 소수 정예로 내실을 기하는 것도 중요해 보인다. 좀 먼 과거에 비해 해외 초빙 건수가 줄어드는 추세를 행사의 자립 면에서 긍정시할 면도 있다. 특히 해외 초빙 건은 예산 문제와 크게 연동되므로 내부 사정에 밝지 않은 터에 과도한 언급은 금물일 것이다.
상대적으로 최근 몇 해 국내 단체들에 많은 기회가 부여된 것은 당연히 바람직하다. 2022년도에 비해 국내 참가 단체들은 더욱 늘었다. 이들 단체들을 여러 프로그램 이름으로 묶어 소개하는 방식은 일단 수긍되는 데 비하여, 프로그램마다 해당 명칭에 따른 차별성을 선명하게 담지하는 변화가 필요해 보인다. 프로그램 간의 차별성이 덜하거나 막연할 경우 산만하거나 혼돈감을 촉발하여 관심도를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국내 단체들을 배려하여 문호를 활짝 열고 참가 수를 늘인 것은 국내 현대춤 활성화 면에서 긍정적이고, 이를 위해 기획에 매진하는 주최 측의 노고 또한 새겨볼 점이다. 지난해 시도된 전통 측면에서 현대춤을 시도한 프로그램이 무슨 연유인지 올해 보이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올해 참가한 국내 개별 단체들의 공연이 국내 모던댄스·컨템퍼러리댄스 계열을 아우르며 오늘의 경향을 전반적으로 전시하는 가운데서도 평자의 시각에서는 실험성 면에서 강세를 보이는 단체들이 더 망라될 필요는 있어 보였다.
인발 핀토 〈거실〉(Living Room) ⓒEdouard Serra |
2023 모다페에서 평자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주었던 작품으로는 이스라엘 안무가 인발 핀토의 2인무 〈거실〉(Living Room,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1시간)을 꼽으려고 한다. 인발 핀토는 이 공연에서 관객에게 어필하기 위해 기를 쓰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유별난 발상을 동원하지도 않았다. 평범한 전개인 듯싶은 속에서도 여성을 내밀하게 파고드는 안무 전략 그리고 객석이 담담하게 작품에 동조하도록 하는 서정적 구성은 주목할 만하였고 국내 안무자들도 참조점을 시사받을 공연이 아닌가 한다.
〈거실〉은 표제 그대로 거실에서 어느 여성이 행하는 거동(擧動)이 주를 이룬다. 남녀 2인무의 공연에서 남성이 등장하여 여성과 관계를 형성하는 대목이 일부 있긴 하지만 여성 역의 모런 뮬러의 독무작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지 싶다. 실내에는 나무 덤불들이 널린 들판이 그려진 붉은색 배경 그림 앞에 작은 검정색 테이블과 의자, 벽에 붙은 축음기 장롱, 벽등 들이 놓여 있다. 혼자뿐인 실내에서 치마 차림의 여성이 벽에 등을 대고 기대어 선 채로 몸을 조용히 이동시키는 것이 작품의 시작점이다. 두리번대다 바닥에 걸레질을 하다 자신을 응시하듯 자기 침잠에 빠진 여성은 치마를 벗고서 짧은 팬츠의 속옷 차림으로 행동을 펼쳐나간다. 이후 여성의 거동은 벽에 기댄 상태에서의 이동, 테이블과 의자에서의 동작, 축음기 장롱을 만지작대기, 축음기 장롱에서 기어나온 남성과의 관계 등으로 구성된다.
인발 핀토 〈거실〉(Living Room) ⓒEdouard Serra |
공연 내내 여성은 자기 응시의 자세를 취하면서 어떤 무엇을 갈구하는 기미를 보인다. 처음부터 벽에 기대어 이동하는 장면은 물론 테이블에 다가가 테이블을 기우뚱 세우는 장면, 테이블 건너편에 상대방이 없는 상태에서 의자에 앉아 이리저리 움직이며 수심에 젖는 장면, 축음기 장롱을 열어보며 만지작대고 실성한 웃음이나 흐느낌이 들리는 장면들에서 그런 기색이 뚜렷하다. 그러다 축음기 장롱을 비집고 건장한 남자가 등장한다. 남자가 테이블에 등을 대고 자기 내면에 침잠하다 바닥을 구르거나 도립을 거듭하자 무대가 밝아지며 두 남녀는 테이블에서 격정적인 움직임을 공유하다가 서로 간의 실랑이 끝에 포옹하며 물흐르듯 유연한 탱고음에 맞춰 즐거운 관계를 맺어낸다. 그러나 이 관계는 남자가 축음기 장롱 속으로 사라지면서 오래 가지 못한 채 끊기고 다시 여자 혼자 남는다. 이 대목에서 여성이 갈구하는 것이 무엇일지 누구든 짐작하게 될 것이다.
인발 핀토 〈거실〉(Living Room) ⓒEdouard Serra |
남자의 퇴장 후 여자가 비틀대다 벽에 몸과 머리를 부딪치고 다시 치마를 챙겨 입고 벽에 기대어 이동하며 퇴장하자 무대는 어둑해진다. 정면의 벽에는 여자가 들판에 주저앉아 혼자 곰작대는 영상과 의자, 벽등 이미지가 비치고 여자가 개울에서 나오는 이미지, 의자가 개울에 빠지는 이미지, 날아가는 새들의 이미지가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켜진 스탠드의 이미지가 무대를 지키는 가운데 암전된다. 〈거실〉은 여성의 고독을 잔잔하게 묘사하면서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가미하여 여성의 내면을 더 강하게 표현하였다. 공연 도중 의자가 몇 차례 바닥에서 저절로 움직이거나 커피 포트가 벽을 타고 움직이도록 해서 조용한 일상 저변에 감춰진 비일상적 불안감을 가시화하였다. 이 작품은 일반 관객의 눈높이에서 관객이 편안하게 수용하도록 구성되었으며, 앞서 말했듯 관객이 작품의 정서에 자연스럽게 동감하도록 하는 강점을 보여주었다.
호페쉬 셱터 〈광대〉(Clowns) ⓒTodd MacDonald |
올해 모다페에서 영국의 호페쉬 셱터는 〈광대〉(Clowns)와 〈해결책〉(The Fix)의 2편(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을 올렸다. 〈광대〉는 폭력을 소재로 하되 이 소재를 집단의 일사불란한 경쾌한 리듬감으로 펼쳐내는 여유가 돋보였다. 공연에 응용된 발목의 방울소리와 특히 박자를 맞추는 아이리쉬탭은 움직임에 순발력을 부여하면서 박진감을 높여주었다. 리듬이 경쾌하다고 해서 폭력에 동조하는 것은 아닐 것은 물론이되 폭력은 정색을 하고 접근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을 벗어나는 여유는 관심을 사기 마련이다. 〈광대〉에서 폭력에 가담하는 집단이 어떤 집단인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여기서 폭력들의 끝판은 수시로 자행되는 총기 폭력이며, 집단의 구성원들이 서로 미친 듯이 어울리는 듯하다가 그 누구를 향해 집게손가락을 내밀어 겨누면 총성이 나고 매번 암전된다. 이런 총기 폭력이 있기 전에 무대 오케스트라 피트 부근에서 누운 사람들을 사람들이 안은 모습(피에타상을 연상시킨다)이 잠시 등장한다. 폭력의 희생자인 듯한 사람들이 이후 내내 집단에 휩쓸려 폭력에 가담하고 총기 난사를 서슴지 않는 장면들에서 안무자가 앵글을 맞추려는 바가 강하게 읽혀진다. 즉, 폭력이 일상화되고 폭력에 무심해지며 폭력에 냉소적이게 되는 현대 문명의 세태 말이다. 살해와 폭력이 습성화되어 광대처럼 죽음 의식을 일삼는 문명의 반란을 그려내므로, 공연에서 폭력을 자행하는 집단이 굳이 어떤 집단인지 특정하지 않아도 무방할 것이다. 맨끝에 하얀 외투 차림의 집단의 우두머리인 듯한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서 총을 맞고 쓰러진다. 공연을 마무리하는 이 장면이 시사하는 것은 폭력의 종식, 아니면 새 폭력 집단의 시작, 어느 쪽일까?
호페쉬 셱터 〈해결책〉(The Fix) ⓒTom Visser |
〈해결책〉(The Fix)은 〈광대〉에 비해 분위기가 가라앉은 편이다. 집단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일으켜 세우며 어떤 길을 함께 가는 모습을 보이는 공연이다. 가부좌 자세로 명상을 취하고 서로 짙게 포옹하여 위무하는 분위기가 짙다. 비교적 느린 동작들이 강한 힘으로 표출되면서 각자 그리고 집단의 균형을 되찾으려고 진지하게 가담하는 의지가 굳세게 가시화된다. 공연 말미에 어느 출연자를 부축하고서는 객석으로 데려가서 앉혀서 포옹하면 여러 출연자들이 객석으로 내려와 관객들과 임의로 포옹하는 순간이 이어진다. 그 순간, 인간의 연약한 처지를 포기할 수 없는 인간성의 힘이 전달된다. 프리 허그가 자주 등장하는 시대를 은유한 공연으로 보인다.
NDT2 〈구조(救助)를 주제로 한 10편의 듀엣〉 ⓒRahi Rezvani |
2023 모다페에 NDT2가 5년만에 다시 왔다. NDT에 비해 덜 알려진 NDT2는 나름의 무게감이 충분한 단체이다. NDT2는 신진예술가들을 발굴하는 통로이며, 그들의 참신함은 NDT에도 모종의 자극을 줄 것이 틀림없고, 모다페에도 그런 자극이 전달되기를 기대한다. 이번에 NDT2가 공연한 3편 가운데 크리스털 파이트 안무의 〈구조(救助)를 주제로 한 10편의 듀엣〉은 소품으로서는 구성이 알찼다. 이 작품은 구조에 관한 10가지 해석을 담았는데, 구조의 다양한 방법, 구조를 위해 서로 만나 지탱하고 흩어지는 장면들은 빠르게 연결되며 변화를 보이는 매끈한 동작을 기반으로 간결하면서도 명료한 메시지를 담았다. 노련한 공연작이다. 에드워드 클럭이 안무한 〈무리〉(Cluster)는 역시 매끈한 동작에서 아주 유연하게 뿜어지는 에너지에 힘입어 집단의 관계를 말 그대로 다양한 도형과 기하학적 이미지를 뒤섞어 그려낸다. 나다브 젤너가 안무한 〈잠든 시간 이야기〉는 뱀이 자주 나타나는 꿈 이야기를 춤으로 가시화하였다. 튀니지 출신의 안무자답게 북아프리카 풍의 빠른 음악과 노래를 반주로 사용했고 출연자들은 반주의 비교적 불규칙스런 리듬을 타면서 꿈의 무정형적인 양상들을 민첨하게 번갈아가며 제시하였다.
NDT2 〈무리〉(Cluster) ⓒRahi Rezvani |
NDT2 〈잠든 시간 이야기〉 ⓒRahi Rezvani |
2023 모다페에 초청된 해외 3단체를 보면 관객 눈높이에 맞춰 현대춤의 장기를 규모 있게 구사하는 것이 발견된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침체했던 국내 일반인들의 춤 관심이 최근 들어 조금씩 살아나는 것이 감지된다. 그들의 관심을 키워 피워내려면, 반복되는 말이겠지만, 관객 눈높이에 맞춘 현대성 내지 현대춤적 감각을 갖춘 작품이 훨씬 늘어야 한다는 것이 평자의 판단이다. 이런 동향을 고려하여 모다페의 해외작 초빙 전략과 국내작 발굴 전략이 세밀하게, 그리고 중장기적으로 세워졌으면 한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