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기가 직접 만든 사물은 상품이 아니다. 또 남에게 공짜로 주기 위해 만든 사물 또한 상품이 아니다. 어떤 사물이 상품이 되는 것이 자기가 갖고 있는 성질이나 본질에 근거하거나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른바 하나의 사물은 사고파는 관계 속에서만 상품이 된다. “쌀은 쌀이다, 특정한 조건 아래서만 그것은 상품이 된다.” 요컨대 사물에 바코드(bar code)가 찍혀 자본주의적 생산과 유통, 소비 관계 안으로 들어감으로써만 상품이 된다. 그리고 이 관계 안에서 탐욕과 소유욕, 소비 욕구 등 인간의 온갖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대상이 되는 상품은 물신주의를 낳고, 그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람들마저 소외시킨다. 2023 MODAFE(국제현대무용제) Collection 무대에 오른 TOP GROUP의 〈BARCODE(바코드)〉(10월 6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는 자본주의적 상품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불상사와 노동 소외, 착취 등과 소비사회에 만연해 있는 상품 물신주의를 재기발랄한 상상력으로 명징하게 주제화한 공연이었다.
TOP GROUP 〈BARCODE〉 ⓒhanfilm |
조명 빛이 들어오면 창고처럼 보이는 공간이 드러난다. 무대 중앙 뒤쪽에 포장용 상자를 가지런하게 쌓아 만든 제법 높고 긴 벽이 세워져 있고, 그 앞 사선 방향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한 춤꾼이 영사기와 서류 같은 물건이 놓인 책상을 앞에 놓고 앉아 있다. 물류 센터에 쌓여 있을 법한 상품 더미와 그것을 지키는 관리인처럼 보인다. 그는 영사기로 상자 벽에 뭔가를 투사한다. 단체 이름과 공연 제목이 나타나고, 이어서 인류의 진화 과정이 담긴 이미지가 투영돼 보인다. 그리고 작업복 차림을 한 춤꾼 한 명이 그 이미지의 연속 동작을 흉내 내며 벽처럼 길게 쌓여 있는 상자 더미 앞으로 등장한다. 아마도 그는 동물에서 호모 파베르(Homo Faber] 곧 노동하는 인간으로 진화한 인류를 상징하는 인물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 쌓여 있는 상품 더미를 마치 자신이 일을 해 직접 생산한 것이기라도 한 듯 열심히 운동한다. 무언가를 만들고, 만든 것을 짊어지고, 또 서류를 뒤척이며 그것을 관리하는 듯한 동작을 하다가, 달리던 자동차가 급브레이크를 밟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 쓰러진다. 아마도 상품 더미, 곧 축적은 잉여가치의 축적이며, 이는 곧 노동 착취의 산물일 것이다. 또 자본주의는 축적을 통해 탄생했고, 자본가계급은 그것을 통해 형성되었다. 축적으로 정의되는 이러한 노동의 역사를 간략하게 스케치하듯 보여주는 명쾌한 도입부 장면이다.
TOP GROUP 〈BARCODE〉 ⓒhanfilm |
잠시 꺼졌다 다시 켜진 조명 빛이 한동안 상자 벽을 비추고 있으면, 벽 뒤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와 상자를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어서 빠른 템포의 음악이 흘러나오면 춤꾼들이 상자 벽을 빙빙 돌기 시작한다. 또 상자를 이리저리 옮기고, 상자 벽에 개구멍을 내 거기를 통해 벽 뒤로 들어가고, 상자를 높이 들었다가 던지기도 한다. 상자 벽 주위를 급하게 돌며 이리저리 뛰고 몸을 날려 뒹굴고 바쁘게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이 흡사 잠시도 쉴 틈 없이 일에만 매진하는 노동자 같다. 상자 벽 앞뒤로 오가며 펼치는 그들의 몸놀림이 잽싸면서도 경쾌하고, 아기자기하게 짜진 안무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 보이지만, 그러한 움직임이 전하는 메시지는 사뭇 진지하다. 곧 〈바코드〉를 안무한 김민은 이러한 춤적 형상화를 통해 과잉 노동과 착취를 꼬집고 풍자하고 있지만, 다소 묵직하게 여겨지는 이런 주제를 심각하거나 진지하기보다는 발랄하면서도 활기찬 몸짓으로 명랑하게 풀어내고 있다.
TOP GROUP 〈BARCODE〉 ⓒhanfilm |
과소비 욕구에 사로잡힌 현대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다음 장면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길게 늘어선 상자 벽 좌우로 신체 일부가 도출돼 나온다. 왼쪽으로는 상체가,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하체가 도출돼 나온다. 각각 다른 사람의 신체이다. 그리고 긴 상자 더미를 중간 두고 떨어진 두 몸은 마치 한 몸처럼 웨이브 동작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다른 두 몸체 사이에 쌓인 상자 더미를 몸통으로 치면, 다른 몸(body)들이 접속해서 한 몸을 이룬 이 신체는 마치 상품 더미를 자신의 뱃속에 집어삼키고 있는 듯한 기이한 거인처럼 보인다. 요컨대 춤 만든 이는 이러한 괴물 형상을 통해 현대인의 과소비 욕구를 한 컷의 풍자만화처럼 절묘하게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세계화하면서 급격하게 팽창한 소비사회의 병폐와 물질 숭배 현상을 단 한 장면에 압축해 보여주는, 춤 만든 이의 재치와 총명함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숨 가쁜 노동은 계속된다. 춤꾼들이 상자 벽을 빠르게 뛰어서 돌다가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 여기저기로 뛰어다니면, 상자 벽 뒤에서 춤꾼들이 마치 짐차에 던져 실리는 택배 상자처럼 높이 솟구쳐 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모든 행위를 돈이라는 양적 차원으로 환원해 버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기 위해 상품을 더 생산하고, 더 소비하고, 또 더 생산하기를 지속하는 듯, 춤꾼들은 상품 벽 둘레를 경주하듯 돌며 미친 듯이 질주한다. 그러다 그렇게 오가던 그들 중 둘이 상자 벽 양옆에 쓰러지면, 상자 벽 위에 쌓여 있던 상자 하나가 툭 떨어지고, 이어서 상자 벽이 다 무너지면서, 춤꾼들과 상자들이 무대 바닥 여기저기에 섞여 흩어져 널브러져 있다. 힘이 고갈돼 쓰러져 있는 몸, 즉 노동력을 상실한 몸과 소비되고 버려진 상품이 같은 처지로 보인다. 노동력도 자본가가 구매하여 사용할 수 있기 위해선 상품화되어야 한다. 상품 아닌 것이 상품화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돈을 받고 제공하는 노동력도 결국 상품일 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기실 상품은 욕망의 원천이다. 한 춤꾼이 상자를 열어 그 안에서 뭔가를 끄집어낸다. 그것 역시도 작은 상자이다. 그것을 든 그가 무대 오른쪽 앞에 세워진 마이크 앞에 선다. 그리고 신나게 랩을 불러제끼면 무대 양옆에서 긴 탁자와 작은 상자를 든 춤꾼들이 연이어 등장해 탁자 두 개를 무대 중앙에 놓고, 그 위에 작은 상자를 이런저런 모양으로 다르게 배열하는 퍼포먼스를 펼친다. 다섯 명의 춤꾼이 요란하고 시끌벅적하게 펼치는 퍼포먼스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실려 빠르게 지나가는 택배 상자를 정신없이 정리하는 노동자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생기가 있고 활기찬 음악과 대조적으로 마치 기계화된 육체노동처럼 도식적으로 운동하는 그들의 몸짓은 단순하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그들이 이리저리 옮겨 놓고 배열하기를 반복하는 상자들에는 글자가 적혀 있고, 이것들이 일시적으로 나란히 정렬되면, ‘EMPTY’라는 단어가 완성된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 한정 없는 소유욕과 과소비를 통해서도 채울 수 없는 텅 빈 듯한 허전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자본의 요구를 자신의 욕망으로 삼게 만드는 욕망의 배치를 작동시키는 원초적 조건을 암시하는 단어일 것이다.
TOP GROUP 〈BARCODE〉 ⓒhanfilm |
인간은 이 욕망의 배치안에서 자본이 요구하는 능력과 자질이 새겨진 신체로 노동에 매진한다. 한 명의 춤꾼이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합세해 이제 6명의 춤꾼이 각각 상자 하나씩 들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다 그들이 상자를 탁자 위에 일렬로 놓으면 이번에는 상자에 새겨진 글자들이 ‘BARCODE’가 되고, 또 이들이 다시 상자를 들고 움직이다가 놓으면 ‘PRODUCT’가 된다. 그리고 다시 글자들은 ‘PRODUCE’가 되고, 연이어서 이 단어들이 번갈아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즉 생산에만(PRODUCE) 몰두하듯 춤꾼들은 바쁘게 계속 움직이고, 그 과정을 통해 제품(PRODUCT)이 만들어지고, 거기에 바코드(BARCODE)가 새겨짐으로써 상품이 완성되는 과정을 여러 가지 동작이 옹기종기 어울려 보기가 좋은 안무와 몸짓으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그러다 다른 춤꾼들이 퇴장한 무대에 홀로 남은 이가 무대 여기저기 흩어진 상자를 주워 가지런하게 세우면 ‘EMPTY’라는 단어가 재차 보인다. 요컨대 생산하고 소비하기를 무한 반복하는 편집증적 추진력에 의해 작동하는 자본주의를 빠른 음악에 실린 기분이 좋을 정도로 시원하고 멋들어진 몸짓으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매우 역설적인 장면이다.
무대 뒤를 가리고 있던 막과 출입문이 열리고, 상자 벽이 양옆으로 치워지면, 무대 뒤에서 한 대의 소형 트럭이 무대로 진입해 들어온다. 트럭에는 몇 명의 춤꾼들이 타고 있다. 그들은 무대로 들어오는 트럭 위에서 빈 상자를 이리저리로 던진다. 소비된 상품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새 상품을 실으러 온 것으로 보인다. 트럭에 탄 이들이 일제히 내려 상자를 하나씩 든 채 무대 중앙 앞에 놓인 탁자 앞에 모이고, 그들은 다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퍼포먼스는 아주 바쁘고 세차게 펼쳐진다. 탁자를 집고 뛰어오르고, 탁자 위에서 놓인 상자를 빠르게 교환해 위치를 바꾸면서 노동에 몰두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러다 노동을 재촉하는 듯한 자동차 경적이 울리면, 움직임은 더 빨라지고, 허리를 숙인 채 원형을 이룬 그들이 회전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한다. 만들고, 유통하고, 소비하고 다시 만드는 상품의 순환 과정을 암시하는 퍼포먼스로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제품은 트럭에 가지런하게 실린다. 곧이어 수미상응하게 영사기가 놓인 탁자가 다시 등장해, 쌓인 상자 벽을 비추면, 거기에 ‘BARCODE’라는 글자가 새겨진다. 막 생산된 제품에 바코드가 새겨져 상품이 된 물건들이 이제 막 교환 관계로 들어가기 위해 트럭에 실린 것이다. 이어서 “우리가 소유하는 것들은 결국에 우리 자신마저 소유하게 된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자본주의는 거대한 상품의 집적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이고, 그런 만큼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상품화하려는 사회이다. 그리고 소비 지향의 사회가 되어가면서 인간이 자신이 생산한 이런 상품을 숭배하는 현상, 즉 물신주의에 이르게 되었다는 말이리라.
TOP GROUP 〈BARCODE〉 ⓒhanfilm |
〈바코드〉는 현존하는 사회체제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비 욕망을 거침없이 휘몰아치듯 전개되는 에피소드에 담아 생생하면서도 속도감 있게 그리고 있다. 또한 젊은 세대의 보수화 경향이 횡행하는 이 시대에 자본주의의 병폐와 사회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비판적 관점을 담아 예리하게 묘파하면서도, 이를 무겁기보다는 ‘쿨’하게 장면화하는 젊은 감각과 발칙함이 돋보이는 공연이다. 게다가 사회의 하부구조, 즉 경제를 구성하는 상품 관계에 주목하고, 유물론적인 관점으로 본 세계상을 담은 근래 보기 드문 춤 공연이다.
최찬열
한국춤과 현대춤, 전통춤과 탈춤을 추었다. 국립모스크바대학에서 인류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소속 민족인류학연구소에서 인류학 박사 과정을 마쳤으며, 다시 미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지금은 몸의 예술과 인문학에 기반한 통섭적 문화연구에 몰두하며, 춤문화연구소에서 미학과 춤 역사를 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