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12 솔로이스트’는 한국공연예술센터(한팩)가 작년에 이어 올해로 두 번째 기획한 프로그램이다. 솔로이스트는 굳이 풀이하면 홀로 춤추는 사람 즉 독무가(獨舞家)인데, 독무가 흔한 터에 독무만 모아 기획전을 열 이유가 있을까. 알고 보면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독무는 기존의 레퍼토리를 임의로 선택해서 추거나 아니면 춤추는 사람이 스스로 안무해서 추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솔로이스트’ 프로그램에서도 혼자서 독무를 추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여기서 독무는 일반적 독무와 비교하여 특히 과정이 같지 않다. ‘솔로이스트’는 무용수 한 사람마다 안무가 한 사람을 짝을 지어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춤을 무용수가 독무로 추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번에 모두 9쌍의 무용수-안무가가 참여하였다.(6. 8~9., 15~16.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이 프로그램에서는 안무가와 무용수가 시종일관 다이알로그(대화) 형태의 소통을 통해 창작을 진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말하자면 ‘솔로이스트’ 무대는 협력 작업의 소산이다. 이로 미루어 안무가와 무용수의 관계는 일단 수평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춤추는 사람이 무용수이므로, 프로그램 소개에서 앞세워지는 쪽은 오히려 무용수이다. 다시 말해 무용수는 안무가의 제안을 고분고분 받아들이는 입장을 탈피하여 춤의 대등한 동반자로 승격된다. 지난 세기말 이래 현대춤에서 빠르게 확산되어온 무용수-안무가의 새로운 관계가 여기서 선명하게 짚어진다.
대체로 안무자가 작품을 주도하면서 무용수를 출연진으로 기용할 경우에 무용수의 능동성은 한정되기 마련이다. 반면에 ‘솔로이스트’처럼 무용수가 안무자를 안무 측면의 동반자로 ‘점지’한다면, 이후 무용수-안무자의 관계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될 수 없을 만큼 가짓수가 뻗어나갈 것이다. 안무자는 단편적 조언자로부터 안무 역할자까지 다양한 입장에 설 것이고, 이에 상응하여 무용수의 입장도 달라진다. 이처럼 무용수-안무가가 협력하며 무용수의 능동성을 살리는 ‘솔로이스트’는 상상의 향연으로 치달을 수 있으며, 이 프로그램이 가질 매력의 진원지는 이 지점일 것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김용걸과 예효승은 같은 작품을 다시 출품하였다. 두 작품 모두 이전과 동일한 흐름으로 진행되었고 비평에서도 다뤄진 줄로 알기 때문에 재론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고 여겨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두 작품은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여 ‘솔로이스트’ 프로그램의 지향점과 합치하는 바가 크고 시사점이 많아 오히려 강조되어야 한다.
김용걸이 춤추고 김보람이 안무자로 나선 ‘그 무엇을 위하여...’에서 발레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꿈꾸고 있음을 누구든 직감할 법하다. 이 작품을 두고 이미 필자는 발레를 탈색시킨 작업으로 주목한 바 있다. 조폭이나 수행 경호원의 트레이드 마크로 여겨지는 검정 정장과 검정 티, 선글래스를 착용한 김용걸은 발레에 그리고 우리 춤에 아주 생소한 마초 세계를 불러들였다. 그런 차림의 그가 객석 사이로 등장할 때부터 마초 세계가 예감된 것은 아니었다. 검정 정장과 검정 티, 선글래스의 차림일지라도 알랭 들롱 류의 센티멘털한 세계에서 놀 수 있는데 비하여, 이 작품이 물론 남성의 솔로이기도 해서 그렇긴 하겠지만, 김용걸이 택한 것은 일테면 마약이 거래됨직한 어떤 암흑가에 인접한 세계이다.
그런 복장의 김용걸이 무대 가장자리에 걸터 앉으면 반쯤 깎아 밀은 요상한 헤어스타일에 스타일리쉬한 정장 패션을 한 김보람이 불쑥 나타나 병맥주(지난해는 테이크아웃 커피였다)를 건네고 둘은 맥주를 들이키며 너스레를 몸으로 연출한다. 무대에 오른 둘은 마치 두 복서가 시합전 링 위에서 파이팅을 다지듯 주먹을 탁 마주치고 김보람은 퇴장한다. 남은 김용걸은 낮게 들리다가 점차 고조되는 ‘볼레로’ 선율과 리듬을 쫓아 발레의 3번 자세로 몸 균형을 취해보거나 롱 드 장브와 시손, 발로네 같은 동작 위주로 가볍되 노련한 뜀뛰기를 셀 수도 없이 거듭한다. 하얀 원반 조명 위에서, 그리고 원반이 이동하는 공간을 따라 이들 동작으로 시종일관 허둥지둥하는 김용걸은 자기도취가 유난스럽다. 가팔라져가는 ‘볼레로’ 절정부에서 자기도취가 과도한 김용걸에게 갑자기 김보람이 저격 자세로 일격을 가한다.
‘그 무엇을 위하여...’는 간략히 말해 자기도취를 패러디하였다. 여기서 마지막 저격 장면은 작품에 찍힌 마지막 눈망울(畵龍點睛)로서 매우 시사적이며 매우 다양한 해석을 유발하는 대목이다. 앞서 말했듯 마약 거래나 마초 세계도 그러한 해석의 일환일 텐데, 이로써 이 작품을 분위기상 발레 누아르 혹은 액션 발레라 지칭하고 싶다.
꼬질꼬질 구겨진 바지와 셔츠, 운동화를 걸친 남자가 누런 식품 봉지를 구겨 들고 으슬렁거린다면, 노숙자를 연상하기 마련이다. 예효승의 ‘발자국’에서는 아마도 노숙자 같은 사람의 내면이 폭발한다. 그가 짓는 웃음은 야릇하며 그가 쭈그려 앉아 봉지에서 꺼내는 샌드위치, 생수도 노숙자의 그런 것 아닌가. 입 속으로 우겨넣은 샌드위치와 생수로 양쪽 볼은 터질 듯하다. 그가 입 속의 것을 숨넘어가듯 다시 뱉어내는 행동이 전하려는 상황은 짐작될 만하다.
‘발자국’의 전반부인 이 부분은 마치 퍼포먼스처럼 진행된다. 후반부에서 셔츠를 벗은 사람에게서 단단한 근육질이 숨겨져 있었고, 그것은 그의 인생 이력을 말하는 듯하다. 근육질이 단단한 만큼 내면도 단단할 터이다. 그는 흐느끼다가 몸부림친다. 지난해 필자가 소개했듯이, 남자는 몸을 삐딱하게 세우거나 비비꼬고 접치는 모습, 비틀대거나 물구나무를 서는 모습들에서 그는 각 부위의 관절을 분절시키는 방법으로 몸을 운용하였다. 그 사람의 내면은 몸으로 표현되는 이상으로 몸과 함께 파열하였다.
제풀에 폭발한 그는 정신을 추슬러 등장했던 무대를 뒤돌아 어디론가를 향해 맥없이 퇴장한다. 이 부분에 이르러 소외된 귀향자가 맞닥뜨려야 하는 한계 혹은 심지어 갖지 못한 자들의 비감(悲感)이 연상된다. 아마 이 사람은 별다른 삶의 대책을 갖지도 못한 채 그 발자국을 계속 할 것 같다. ‘발자국’에서 우리가 만나는 감정의 농도는 매우 짙으며, 그 사람의 몸과 감정을 응시하는 객석의 감정 이입은 매우 자연스럽다. 후반부에서 몸이 그렇게 파열한 덕분에 감정 이입은 고조될 수 있었다. ‘발자국’의 몸은 소외 계층의 비감을 대변하였고, 춤과 춤꾼의 진정성 역시 다듬어진 몸 때문이었다는 점은 강조되어야 한다.
안영준의 ‘중력’은 칠흑 같은 어두움을 적절히 활용하며 춤에서 몸의 위상을 생각케 하는 작품이다. 관객이 식별하지 못할 만큼 섬세하게 투사되는 조명 빛이 물에 닿아 무대 정면 벽으로 반사되는 장치 속에 누운 사람의 미세한 움직임이 벽에 반사된다. 물이 매우 얕게 깔린 바닥에서 출렁이는 몸은 느리게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며 우리에게 어떤 환각이나 환상을 제공한다. 어두움 속에서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체험한 환상은 각자 나름일 것이다. ‘중력’은 춤 무대에서 경험하기가 쉽지 않은 빛과 몸의 관계를 일테면 디자인 개념으로 제시하였다. 몸의 역할을 극소화하는 한편 몸이 용해되거나 변형되는 모습으로 환각을 만들어가는 예사롭지 않은 작업이었다.
고개 숙인 남자, 김설진의 ‘아빠’가 아프게 그려내는 남자는 그런 모습으로 시작한다.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여 몸을 일렁대다가 아이들이 좋아할 차임벨 소리에 조용히 미소를 짓는 남자는 점차 우거지상을 짓는 모습이다. 소프라노의 독창이 고독하게 느껴지는 이 부분에서 그의 몸은 매우 위축되었다. 여자가 무대에 안고 올라온 아이를 아빠가 안고 어르다 휘청대며 아이와 여자가 사라진 무대에서 그의 몸은 뒤틀리고 비비꼬인다. 다시 올라온 아이를 상면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여자는 아이를 데려가 버린다. 이런 틀거리로써 ‘아빠’가 묘사한 것은 이혼 가족일 텐데, 이 작품은 몸을 수축시키거나 비틀고 특히 얼굴 표정을 매우 의도적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활용하여 표현성을 높였는데, 몸 전신이 구겨지거나 꼽쳐지거나 이지러지는 그런 비일상적 이미지들이 빠르고 가파르게 연결되는 이 부분은 매우 탁월한 처리로 받아들여졌다.
도플갱어, 자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보이는 어떤 환영(幻影)을 뜻한다. 최진욱의 ‘이몽(異夢)’은 이 현상을 소재로 인간 속의 도플갱어를 추적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안무자 김윤수와 함께 초록색의 레이저 장치를 동원하였는데, 어느 춤 무대에서보다도 충실한 대형 삼각형의 레이저 가상체는 정면에서 피라미드처럼 투사되고 벽으로도 투사되었다. 이 레이저 장치는 도플갱어 현상을 충실히 뒷받침한 것으로 보였다. 그 속에서 최진욱이 허우적대는 레이저 광선은 포그와 함께 효과를 내며 작품 제목처럼 꿈의 세계라 불러도 좋은 그런 세계를 연출하였다.
호머의 율리시스가 귀향하지 못하는 상황을 이우재는 ‘현행범’에서 독특한 문제 의식으로 수용하였다. 한국무용, 현대무용 등으로 나뉜 장르들에 안주하지 못하고 자신의 장르를 찾아가야 하는 춤꾼의 내면은 율리시스의 심정에 비유된다. 이를 풀려고 이우재는 무대 가장자리를 따라 4각의 조명 바닥을 설정하고 철모를 품에 안고 수그린 자세로 두리번대며 4각형 주변을 직선으로 썩썩 배회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반복한다. 사이 사이 끼어드는 단말마의 대사는 어딘가 자기 세상에 가야 하겠다는 말이며 곁들여지는 강렬한 힙합은 내적 갈등의 표출로 보인다.
‘솔로이스트’ 프로그램은 유능한 무용수를 전제로 한다. 여기서 무용수란 물론 기량을 갖춘 사람이겠지만, 여기서 머문다면 그건 너무 단편적이다. 기량을 넘어, 안무자와의 다이알로그가 협업의 전과정을 이루므로 안무를 드러내는 표현력이 관건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솔로이스트’는 상당한 무대 경력 또는 안무 참여 경력이 없으면 소화하기 힘든 프로그램이다.
이번 무대에서 ‘그 무엇을 위하여...’의 경우 제목의 그 무엇이 너무 추상적이라는 생각이다. 그 무엇의 폭은 사실상 무제한적이다. 물론 작품 내에서 그 무엇의 폭이 상당히 제한되겠으나 관객에게 해석을 모두 맡기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두 가지 존재를 다룬 ‘이몽’에서는 존재가 레이저와 포그 속에서 상충하고 만나는 모습을 더 형상화하여 작품의 밀도를 높일 필요가 있었다. ‘아빠’에서는 움직임이 보다 다양해져서 작품의 단조로움을 상쇄하고, ‘현행범’에서는 사각형의 박스 내에서 힙합이 아닌 춤으로써 춤적 처리를 보완하여 심적 갈등을 더 구체화하는 방법을 고려하고 싶다. 김미애의 ‘야행’은 새로운 의미의 산조 같은 작품으로서 특히 고혹적인 몸태와 현대적 움직임과 분위기로 풀어나가 관객을 침잠하게 하는 품새가 맛깔스럽다. 반면에 작품이 단조로운 점은 풍부한 해석을 위해 재고되어야 하겠다. 대사를 섞어 대화체의 춤판을 모색한 이은경의 ‘나쁘지 않은 기억들’의 춤 방식은 상당히 진취적이다. 4부로 나뉜 작품에서 전반부의 관심을 끌 춤들이 후반부와 연계되지 않고 특히 4부가 가요와 막걸리 퍼포먼스만으로 진행된 탓에 전반부와 연결되지 못하여 작품의 밀도가 떨어졌다.
그 진행 방식에 비추어 ‘솔로이스트’ 프로그램은 춤계의 작가 등용문으로 발돋움할 공산이 크다. 그러자면 ‘솔로이스트’는 우선 무용수에 대한 관객의 기대치와 합치하거나 그 이상이어야 한다. 이를 위한 해법은 물론 무용수-안무자에게 달렸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무용수의 표현 결과가 다면적인 해석을 유발하도록 안무자-무용수의 적극적인 협업이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전재_ 한팩 리뷰 2012.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