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현대미술관 〈무브〉전
정체불명의 안무자들
김채현_춤비평가

 유난스런 폭염으로 지치게 기억될 이번 여름, 국립현대미술관은 어쩌면 여름 한철 내내 유난스런 ‘춤판’을 연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번 여름 이 미술관이 열은 전시회 <무브(MOVE)>는 전시회 이상이었고 전시회에 맞섰으며 전시회 아닌 전시회였다(과천 국립현대미술관. 6. 6. ~ 8. 12.).
 그동안 현대미술을 움직여온 미술품, 조각, 설치, 퍼포먼스, 해프닝 같은 갖가지 장치들이 <무브>에서도 작동한다. 전시회는 해설 같은 부제를 달아 <무브(MOVE): 1960년대 이후의 미술과 무용>이라 이름 하였다. 그런 점에서 이 전시회도 여느 전시회나 엇비슷한 현대미술 전시회로 여겨질 것 같다. 5년전 안무가 윌리엄 포사이드가 로댕미술관(서울 태평로)에서 공중에 부유하는 무수한 공들과 함께 사람들이 즐겁게 흩어지도록 만들었던 ‘흩어진 군중’처럼 오늘날 미술과 무용이 뒤섞이는 것은 다반사여서 ‘1960년대 이후의 미술과 무용’은 무슨 흐름전이나 자리매김전과 유사한 듯하고, 심지어는 일반적인 전시회 같아 보일 수 있다.
 <무브(MOVE): 1960년대 이후의 미술과 무용>은 2010년 가을부터 3달 동안 런던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열렸다. 그리고 독일로 옮겨 뮌헨과 뒤셀도르프의 미술관에서 또 3달간씩 열렸다. 전시회에서 으레 발간되는 팜플렛은 이번에도 매우 두툼한 도록(圖錄)인데,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발간한 영문 도록에 붙여진 제목은 ‘움직이기: 너를 안무하기’이다.(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발간한 팜플렛은 제목이 <무브(MOVE): 1960년대 이후의 미술과 무용>이고, 영문 도록 가운데 한국 전시작 관련만 수록하였다.) 춤의 시각에서 호기심을 꽤 촉발하는 제목임에 분명하지만, 이보다 더 나에게 자극적이었던 사실은 미술과 무용을 연결하는 전시회임에도 ‘안무’ 개념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이다.
 그 도록이 표면적으로 지시하는 너(당신)는 누구인가? 전시회를 방문한 관람객을 가리킬 것이다. 실제 전시회 현장에서도 그러하였다. 아이들과 청소년들은 이를 테면 설치미술들과 어울려 놀았고 청년층이 약간 참여하였으며, 젊은 부모 어른들은 아이들의 모습에 덩달아 즐거워하거나 돌보느라 애썼지만 내심 자기들도 놀고 싶었을 것이다. 눈짐작으로 각 200평, 100평 얼추 되는 넓은 공간에 설치미술들이 배치된 두 전시실에서 안무를 지시하는 안무자를 찾으려면 허탕 치기 마련이다. 거기에 일반적인 개념의 안무자는 없었다. 이를 눈치챈다면, 너를 안무하는 쪽은 안무자 아닌 그 누구 혹은 그 무엇일 것으로 짐작하게 된다.
 국내 <무브>에 참여한 해외 작가는 모두 20명이다. 윌리엄 포사이드, 트리샤 브라운, 사이몬 포티, 자비에 르 루아, 보리스 샤르마츠, 크리스티안 얀코프스키, 마이크 켈리 등이 그 면면들이다. 도록의 내용을 기준으로 한다면 한국판 <무브>의 참여 작가 수는 약간 준 것 같다. 작품을 출품했을 뿐 한국에 오지는 않았을(굳이 올 필요도 없었을 것!) 이들 작가는 일찍이는 1960년대부터 활동한 사람들이다. 크게 보아 퍼포먼스를 도입하거나 퍼포먼스와 결합하는 식으로 미술의 변화를 모색해온 이들이고, 그 중에서 사이몬 포티, 트리샤 브라운, 윌리엄 포사이드의 경우는 대체로 춤에서 그 유사한 작업을 시도한 당사자들이다.
 사이몬 포티의 ‘매달린 것들’에서 아이들은 매달렸다. 윌리엄 포사이드의 ‘사태의 진상’에서 아이들은 조금 위험한 듯했어도 매달렸다. 트리샤 브라운의 ‘숲의 바닥’에서 어떤 무용수들은 좀 무미건조해 보이는 가운데 애써 조심스레 이동하며 매달렸다. 공교롭게도 이 세 작품에서는 매달리는 일이 주로 진행되었다. 여기서 매달리지 않으면 기껏 보는 것이 전부 다일 텐데, 보기만 하는 것은 거의 무의미한 태도이다. 따라서 우선 다짜고짜 매달려보는 것이 작품에 대한 최선의 성의일 것이다. 이 사람들의 작품을 비롯하여 <무브>의 작품들에서 몸으로 참여하는 관람자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몸과 환경, 몸과 의식, 몸과 중력 및 균형에 대해 나름 느낌을 가질 것이다. 그런 느낌이 더 진지해진다면 바람직스러울 테고, 미술관의 새 역할에 대해서도 고마워할 것 같다. 물론 아이들에게서까지 그런 진중함을 기대하는 것은 교조적이겠지만.

 

 

 


 어느 전시물 앞에서 사람들은 대형 화면의 지시대로 움직인다. 아마 그것을 다 해내려면 10단계 30분이 걸린다니 수월한 일이 아닐 성싶다. 어느 전시물 앞에선 사람들은 대형 화면에 영어 해설과 장면이 펼쳐지는 대로 바닥에 널린 훌라후프를 화면에 맞춰, 아니면 화면과는 다르게 허리춤에 꿰차고 돌려대었다. 영어를 알아듣건 못 알아듣건 문제되지 않는다. 퍽 민주적인 것 같다, 우리 몸이. 볼 만한 물체도 없어서 전시물이라 불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매한 어느 전시물에서는 미술관의 조신한 안내원 차림의 여성이 부르는 단편적인 선율을 들어야 하였다. 그레고리안 챈트처럼 간략 명료하되 그보다는 조금 감칠 맛 나는 선율 때문에 그런지 어쩌면 관람자에 따라서는 가장 기억에 남을 순간이 아니었을까.
 <무브: 너를 안무하기>에서 아이들은 작품들과 열렬히 놀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신사숙녀 어른들은 별로 놀지 않았다. 어른들이 어떡하든 작품들은 아랑곳 않을 것이다. 원래 예술은 강요하지 않는 법이니까. 아무튼 아이들의 즉발성에 비해 왜 어른들은 그렇지 않았을까. 매달리기가 쑥스러워서 아니면 뻔해서 아니면 아이들에게 양보하려고 아니면 허리 디스크가 있어서 아니면 어떤 속사정 때문이었을 것 같다. 누가 봐도 관람자의 참여를 전제로 하는 이 전시회에서는 참여가 저조할수록 전제가 충족되지 않을 터이고 전시회로서 명분도 떨어진다. 그렇다면 <무브: 너를 안무하기>는 (한국의) 어른들에게서는 실패한 전시회였을까? 

 1950년대 말 미술 분야에서 퍼포먼스가 출현할 때부터 <무브>의 씨앗은 뿌려지고 있었다. 그 10년 전에 잭슨 폴록이 드리핑으로 캔버스를 칠해나갈 때 미술과 춤은 근접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이 시점에서 퍼포먼스나 춤이 미술과 서로 접근하는 현상은 보편적이지는 않으나 일반적이고도 상식적이다. 이를 주제로 한 전시회들이 더러 있었겠지만, <무브>는 이를 집중 조망하는 선에서 훨씬 더 나아가 <무브: 너를 안무하기>에서 보듯이 현대미술에서 안무가 갖는 정체성 그리고 현대미술에서 안무가 갖는 파급력을 통찰한 데서 명백한 차별성이 있다. 

 현대미술에서 극소화하는 미술품의 물성(物性)을, 이번 <무브>에서도 보다시피 티노 세갈 같은 작가들은 가뿐히 넘어서 버렸다. 그의 ‘이것은 프로파간다’에서 사람들은 볼 만한 물체도 없는 전시 상황에서 미술관의 조신한 안내원 차림의 여성이 주기적으로 부르는 단편적인 선율을 그냥 들어야 하였다. 관람자 눈에 보이는 것은 행위뿐이었지만, 그것이 미술관 내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물질이 행위로 대체되었다고 해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음악 행위나 춤 행위 어느 쪽으로 분류되어야 하는지 애매하기도 하려니와 그렇다고 미술 행위로 봐야 하는지 여부도 사실상 불투명하다. 미술관에서 진행되었으므로 미술품(?)이라 해야 한다면, 무대에서 진행되었더라면 틀림없이 공연물일 것이다. <무브: 너를 안무하기> 도록에서 그의 소개란은 이름과 해설만 발견될 뿐 사실상 비워졌다. 그것만으로는 해설집이지 도록도 아닌 편이다. 이번 전시장 벽에 검정색으로 실크스크린 인쇄된 여러 경구들 속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의미를 찾지 말고 용도를 찾아라’고 하였다.


 

 

 


 <무브>에서 다시 눈여겨볼 점은 ‘너를 안무하기’이다. 다시 말해 <무브: 너를 안무하기>에서 강조점은 ‘무브’가 아니라 ‘너를 안무하기’라 생각된다. 현대미술가들이 보편적으로 추구하진 않는다 하더라도 현대미술에서 무브는 상식이다. 반면에, 현대미술의 무브를 ‘안무’ 개념과 직결시켜 현대미술-안무-춤을 연결시키는 관점은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무브>에서 안무자의 신원은 오리무중이다. 앞서 말했듯, 거기에 일반적인 개념의 안무자는 없었다. 너를 안무하는 것은 너 자신이거나 설치미술이거나 아니면 미술관 공간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안무가 사이몬 포티, 트리샤 브라운, 윌리엄 포사이드도 여기서는 안무자가 아니라 설치미술의 제공자일 뿐이다. 다만 그들의 특장은 관람자가 움직이도록 하는 정도에서 다른 미술가(?)들보다 적극적인 데서 발견된다. 이 안무자들 각자가 출품한 설치물들에서 그들의 이름을 익명 처리한다면 그 설치물들은 어느 설치미술가들의 작업 결과로 여겨질 것이고, 그래서 그것들을 출품한 익명의 사람들은 자연히 설치미술가로 수용될 법하다.
 그래서 이 시점에 이르러 안무의 개념과 범위가 엄청나게 확장되었음을 다시금 피부로 느끼게 된다. 말하자면 움직임을 구조화시키는 모든 것을 안무라 해야 할 판이므로, 이러한 안무 개념은 안무를 무화시키거나 무기력에 빠뜨려 궁극에는 안무의 소멸을 불러들일지도 모른다. 그럴지라도 움직임의 구조화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상 속에서도 움직임의 구조화는 필연적이니까.
 아서 댄토가 미술의 종말에서 강조한 브릴로 상자 시대에 안무는 매우 일상적이게 되고 그리하여 보편적이게 되었다. 들판에서 그네 타는 사람들은 이미 일상적으로 자신을 안무하고 있다. 그런 줄을 모르고 있다가 마침내 <무브>에서처럼 미술관에서 그네를 타니까 자신들이 일상 속에서 이미 안무하고 있은 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미술관에서의 그네타기와 들판에서의 그네타기는 맥락이 다르므로 나름의 구실과 가치도 다르다.
 현대미술-안무-춤을 연결시켜 보도록 하는 <무브>에서 핵심은 무브이며 설치물들은 무브의 단서들이다. 미술관에서 그렇게 움직일 합당한 동기를 부여하는 점에서 설치물들과 퍼포먼스는 절대 비중을 갖는다. 다시 말해 자극-반응의 기제로서 설치물·퍼포먼스-무브가 성립하며, 그것을 매개하는 것은 광의의 안무 개념이다.
 <무브> 현장에서 꽤나 즉발적인 아이들에 비해 하던 짓도 멍석 깔면 하지 않는다는 것인지 어른들은 덜 원초적이었고 매우 사회적이었다. 이런 사실은 아이들이 자신들을 안무해내는 원동력이 매우 감성적임을 재확인해준다. 아이들의 즉발성은 그만큼 작품의 존재에 상응하는 의의를 갖는다. 아이가 어른 되기는 어렵지만, 어른이 아이 되기도 쉽지 않은 것이다. 이것을 뇌 구조의 차이에서 연유하는 현상이라 지적할지 모르겠는데, 이보다는 사회적 관념이나 각자 몸의 형편에서 그런 차이가 비롯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편이 훨씬 설득력 있다. 하물며 <무브>는 뇌를 주제로 한 전시도 아니었다.
 그 동안의 흐름이 확인해주듯이 현대미술과 몸은 상보적(相補的) 방향으로 진척되어왔다. 무용가가 설치미술가인 듯이 보이는 그 만큼 미술가도 안무가로 나설 만한 것이다. 이를 경계와 장르 넘나들기라 하는 것은 이제 와서 식상한 동시에 싱거운 명명법에 지나지 않는다. 퍼포먼스가 개입하는 그 시점부터 그러니까 잭슨 폴록이나 앨런 카프로우가 그런 ‘짓’들을 할 때부터 미술은 안무 차원을 동경하였고 급기야 윌리엄 포사이드 세대에 이르러 도처에서 발화하였다. 몸이 미술을 확장시키는 것 못지않게 미술이 몸을 확장시켜왔다. 미술이 몸에 접근하는 것은 물론 의도성이 매우 다분한 전략이었으며, 미술의 혁신을 겨냥한 조치들이었다. 전시 공간이 복합 공간이 되고 미술적 관념이 거래되고 머리(곧 내면) 속의 추억 형태로 미술품이 보존되므로, 저작권도 계속 동요한다. 말하자면 몸이 관여함으로써 미술의 자본재적(資本財的) 지위에 균열이 생기고 급기야 수집가들도 딜레마에 봉착한다.
 너를 안무하기가, 적어도 <무브: 너를 안무하기>에서는, 너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미술관의 독특한 분위기를 뒷받침하는 환경적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며, 너와 설치와 환경 사이의 공동 소산이다. 다시 말해 미술관이라는 맥락이 이처럼 의미 있는 상호 관계를 가능케 한다. 게다가 미술관의 아우라를 배경으로 미술품 아닌 미술품이 생성되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다. 미술뿐만 아니라 작품 행위 및 작품 실체와 관객 간의 경계가 희석되는 곳 역시 일차적으로는 예술 공간 안이며, 오늘날 일상 공간은 유사 작품 행위와 실체를 담으려 애쓴다. 궁극적으로 어느 측면 예술이 가질 힘은 이러할 것이다.
 트리샤 브라운이나 사이몬 포티나 모던 댄스를 이탈하는 데 방점을 찍었다. 관객을 향해 가상의(illusory) 감정을 표출하는 데 중점을 둔 모던 댄스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알다시피, 포스트모던 댄스는 감정과 움직임의 주체로서 관람자를 등장시켰다. <무브: 너를 안무하기>에서 아이들은 열렬히 뛰어논다. 어른들도 재미있어 한다. 이런 사실들은 일정한 상황 속의 놀이 형식을 띠는 현대미술과 현대춤에서 사람들은 관람하기보다 즐긴다는 것을 나타낸다. 관객을 향해 감정을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 스스로에게서 감정이 우러나오는 것으로 감정의 생성 방향이 역전된다. 즉 감정의 주체는 관객이 되고, 이번에도 사람들 특히 아이들은 참여해야만 느낄 것을 즐겼다. 참여와 감정의 기저에 언제나 몸(the corporeal)이 있는 것은 퍽 의미심장한 일이다.
 <무브>는 1960년대 이후 미술과 춤이 움직임을 매개로 어떻게 동반자 관계를 구축해 왔는지 정리하고 환기하는 전시회였다. 특히 함께 제공된 아카이브는 전시회보다 훨씬 값진 이 방면의 사료를 제공하였는데, 그 방대한 사료들을 소화해내는 데도 상당한 인내를 필요로 하였다.

 

 

 


 어느 부목(浮木)을 미술가가 건져올려 화랑으로 옮겨두면 미술품으로 ‘발견된’(found, trouvé) 물체가 된다. 현대춤의 움직임들도 ‘발견된’ 것들이 흔하다. 포스트모던 댄스 이래 미술과 춤은 발견된 움직임을 환기하는 데 보조를 맞춰왔다. 동시에 현대미술은 전시장을 춤판으로 발견하였고 현대춤은 전시장에 움직임을 더 발견해주었다. 현대의 미술과 춤이 매체를 확장함으로써 세계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데 있어 발견된 움직임들은 돌파구 구실을 하였다. 현대 예술에서 몸성(the corporeality)이 강조되는 것은 이 때문이며, 춤과 미술이 근접하면서 엄청난 확장성을 갖는 것도 몸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현대의 미술과 춤이 움직임을 발견함으로써 안무를 발견하고 또 그럼으로써 춤을 발견해온 추이를 개념 있게 소개한 <무브>는 어떤 경향을 알리는 전시회에 머물지 않고 그 자체로 돋보인 춤판이었다.

2012. 08.
사진제공_김채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