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무대 위에 수직으로 서 있는 바다에 골 깊은 파도가 간단없이 출렁인다. 해일이 한 차례 일더니 바다는 잠잠해진다. 이어 다시 집채더미 같은 파도가 밀려온다. 쓰나미다. 해도(海濤)가 마을을 덮치며 온 산하를 휩쓸고 할퀸다.
바다는 변덕을 멈추고 언제 그랬냐싶게 정적 속에 평화스럽다. 작품의 대단원, 안무자 이나현이 홀로 수직의 바다를 향해 춤을 춘다. 춤은 포세이돈을 미혹시킬 만큼 유혹적이어야 하고 용왕의 진노를 잠재울 만큼 신기(神氣)가 서려 있어야 한다. 그녀는 혼신을 다해 춤을 추었다. 관객에게 호소할 필요는 없었다. 어떻게든 바다를 혼절시켜야만 했기에.
하지만 춤에는 현혹보다는 치성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끝내 돌아서지 않았다. 관객은 바다만을 바라보고 춤을 추는 그녀의 등과 뒷모습만을 보았을 뿐이다. 춤, 〈수직의 바다(Vertical Sea)〉는 만신(萬神) 아닌 춤꾼, 이나현이 무대에서 무복(巫服) 대신 소복(素服)이라할 하얀 드레스를 입고 현대춤으로 올리는 용신굿이었고 해신제(海神祭)였다.
〈수직의 바다〉라는 제목 자체가 시적인 상상을 불러온다. 수직의 바다를 상징하는 은빛 실 커튼을 뒤 배경으로 하는, 앞의 무대 공간은 바다 밖일 수도 있고, 안일 수도 있다. 무용수들은 끊임없이 춤을 추며 바다 안과 밖을 넘나든다. 어떤 때는 실 커튼 밖으로 손만을 내밀어 조형미에 변화를 주기도 했다. ('Ubin Dance'. 2012.6.2-3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60분. 1일 2회 총 4회 공연)
작품의 시작 부분에서 울려퍼지는 그레고리안 성가가 춤이 범상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며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임을 암시한다. 작품 중간에 전자음악을 사용하다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음악이 끊어지며 일순 정지되는 것이 예측불가능한 세계를 시사한다. 끝 부분에서 그레고리안 성가를 다시 사용하여 성스러운 분위기로 대미를 장식한다. 성가와 파열음 비슷한 전자음악의 불협화음적인 묘한 어울림이 관객들을 공연 내내 깨어 있는 상태에서 사유케 한다(음악: 하림).
대개의 춤 공연에선 각 무용수들의 역할과 동작이 정해져 있기 마련이지만 이 작품 〈수직의 바다〉에서는 역할분담도 중요치 않고, 남녀 즉 암수라는 구별도 초월한다. 무용수들끼리 상대를 대상화하거나 타자화하지도 않고 자연스런 흐름에 실리며 조화를 이룬다.
인간 존재에 대해 나름대로의 상상의 나래를 펴는 안무자 이나현은 인간에 대한 섣부른 정의 내리기를 거부하며 “무용의 움직임이라는 틀과, 더 나아가 인간의 몸에 대한 도식화한 인식을 끊임없이 깨부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녀 자신은 물론 무용수들의 몸짓이 인간의 일상적인 동작과는 거리가 멀며 춤동작으로서도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니다. 무용수들의 흔한 도약도 없다.
생명의 시원이 바다라는 설. 창조론 신봉자들에게는 큰 일 날 소리겠으나 인간이 어느 먼 옛날에는 물고기였었고 그로부터 양서류를 거쳐 인간으로 진화해 왔다지 않는가. 여자 다섯(신혜진, 강민정, 김희정, 김수진, 박성은), 남자 한 명(김성원), 여섯 무용수들의 춤은 마치 지느러미 달린 물고기들이 바다 속을 유영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어떤 때는 원시의 바다 속에 살던 양서류의 보행 같기도 했다. 옆으로 움직이고 손이 발이 되어 네 발, 나아가 네 발 이상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일 때면 갑각류 절지동물의 움직임을 연상케 하기도 했다. 상체를 뒤로 젖히거나 일정 방향으로 흔들릴 때는 일렁이는 파도를 타는 것 같았고, 쓰러지거나 누울 때는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과 삼라만상이 함께 삶과 죽음을 순환하며 우주의 큰 리듬에 순응하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이나현이 늘 주장하는 ‘신체와 움직임에 대한 독특한 시각’에 기인하는 걸까? 이나현이 안무하고 출연한 다른 작품들에서도 그녀는 다른 무용수들의 몇 배에 해당하는 탄력을 갖고 마치 몸동작에 강한 반동력이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신선한 춤동작으로 보는 이들을 매료시켰다. 숙련된 춤꾼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그녀는 관객을 의식하지 않고 그녀 춤에 완전히 몰입한다. 관객의 비위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아 오히려 관객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이지적인 춤꾼이다. 그 모든 것들이 그녀의 무용수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춤 동작의 프랙탈(Fractal) 효과라 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작년 6월 조형예술가 최종운의 설치작업 ‘수직의 바다’를 본 후 올 2월부터 4개월 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한다. 설치작업 ‘수직의 바다’는 무대 전체에 벽을 형성할 만큼 무수히 많은 가는 은빛 실오라기를 천정으로부터 수직으로 내려뜨려 바다를 형상화하고 조명과 바람으로 파도와 쓰나미의 효과를 내어 대자연의 신비스러움과 예측불가능한 거대한 힘을 표현했다. 이 설치작업은 그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조형예술이기에 더할 나위 없는 무대 장식이 되었다. 인체의 부분을 클로즈업한 서지연의 사진 영상들도 춤 중간에 앙상블을 이루며 색다른 춤동작의 작품을 살리는 역할을 했다.
이나현은 1997년 이대 무용과 졸업 후, 국내에서 2년 간 활동하다 1999년 유럽으로 건너갔다. 2005년 귀국할 때까지 처음 3개월 간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댄스 아카데미에서 3개월 연수를 받은 것을 필두로 오스트리아 린츠발레단에서 1년, 스위스 벤투라무용단에서 1년 반, 독일 자르부르켄무용단에서 2년을 보냈다. 독일에서 두 작품을 발표했고 2003년 슈투트가르트 솔로탄츠페스티벌에서는 최우수무용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나현은 현대춤을 추는 춤꾼으로서 선천적인 혜택을 받았다. 서구의 무용수를 능가하는 시원스런 큰 키에 동서양이 어우러지는 용모와 깊은 눈망울을 갖고 있다. 유럽에서 6년을 보내면서 안무와 연출 스타일에 국제적인 안목을 길렀고 그들과 경쟁하여 수상한 경력도 갖고 있다. 춤에 관한 그녀의 모든 것은 국제적 수준에 손색이 없어, 앞으로 세계무대에서의 역할이 기대되는 유망주이다.
근래에 관객이 별로 없는 우리나라 컨템퍼러리 댄스계에서 이나현은 팬을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무용가 중의 한 명이다. 관객이 많든 적든, 반응이 요란하든 조용하든, 객석에 그녀의 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이해하는 팬이 앉아 있다는 것은 그녀의 춤이 갖고 있는 신비스러움과 특이한 개성 때문이리라.
이번 공연에서도 이나현의 춤은 새로운 기호의 연결이 되어 관객과 교감을 이루었다. 〈수직의 바다〉는 관객으로 하여금 많은 연상과 상상을 하면서 여러 해석을 내리게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