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년 전이었던 것 같다. 서울 대학로에서 지방 시립무용단의 예술감독이라는 과묵한 편의 점잖은 무용가와 우연히 자리를 같이 했다. 지방에서 이루어지는 춤 공연을 원활히 갈 수 없는 형편인지라 별다른 관심 없이 헤어졌는데 그 후로 잊을 만하면 구미시립무용단의 정기공연 프로그램이 우편으로 배달되어 오곤 했다. 2010년 〈라스트 프린세스 덕혜옹주〉, 2011년 〈흥부 환타지〉, 2012년 〈미녀에게〉.
시립무용단이 갖는 성격상 전통과 창조의 조화를 표방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으나 프로그램을 받을 때마다 제목에서 강한 호기심이 일곤 했다. 연극이나 뮤지컬에나 어울릴 덕혜옹주의 기구하고 한 많은 삶을 어떻게 춤으로 표현했을까, 동화적으로 마음씨 착한 흥부를 과연 어떻게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춤으로 구현했을까 하는……
처용설화를 갖고 춤 작품을 만들었다는 이번의 경우 〈미녀에게〉라고 붙인 제목 자체가 도발적이고 수상하게 느껴져, 프로그램을 우송받고는 꼭 관람해야겠다는 의욕에, 의무감 같은 것이 일어 지난 6월, 구미행을 결행했다.
우선, 서울의 아르코극장과 비슷한 느낌을 주면서 규모면에서 더 커 보이는 구미시문화예술회관에 압도당했다. 이어, 시민들에게 관람이 무료인지라 서울의 그때그때 고정된 관객과는 달리 남녀노소 각양각층의 관객들이 극장을 메우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리 되면 안무자나 연출자가 작품의 스펙트럼을 넓게 해야 하는 부담감을 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의 1부에서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섣달 그믐날의 나례(儺禮) 때 추었다던 정재(呈才)인 장엄하고 호화로운 의식무인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을 대전시립연정국악원의 반주와 함께 재현해 전통춤 공연을 품격 있게 보여주었다.
본래 독무로서의 학무(鶴舞)가 존재했었고, 학무와 연화대무(蓮花臺舞)가 어우러지는 학연화대합설무(鶴蓮花臺合設舞)가 연희되다가 언제 처용무와 종합되어졌는지는 정확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세조 때 성현(成俔1439~1504)이 지은 용재총화(慵齋叢話)와 악학궤범에 의해 조선시대에는 분명히 그 모두가 합쳐진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이 연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구미시 공연으로 “처용무를 먼저 추고, 다음으로 두 마리의 학이 나와 춤추다가 연꽃을 쪼아 두 동녀(童女)가 나오면 두 학이 놀라 나가고, 연화대무를 춘 후에 다시 처용무를 추는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을 보는 소중한 기회를 가져 정재 중에서도 장식성과 연출성이 가장 농후한 학무, 연화대무, 처용무를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안복(眼福)을 누릴 수 있었다.
제1부 처용무가 들어간 전통춤에 이어, 제2부에서는 안무자이자 연출자인 노현식이 처용설화를 자기 나름으로 해석하여 만든 창작춤인 〈미녀에게〉가 무대에 올려졌다.
구스타프 융은 “집단무의식이란 개인적 경험을 초월하여 옛 조상들이 경험했던 의식이 무의식의 저변에 쌓여 유전된 것으로, 종족 구성원 전체에게 공통되는 정신의 바탕이며 경향이다. 따라서 무의식의 기저에서 구성원 전체의 인격을 지배한다”고 했다. 처용설화는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의 표출이고 처용가면은 한국인 집단무의식의 페르소나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긴 세월 동안, 친근감과 함께 생명을 이어 왔으리라.
노현식은 처용설화에 대해 관용과 화해라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해석과는 달리 주관을 갖고 직선적으로 접근했다. ‘미녀에게’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듯, 제목에서부터 도전과 반항, 어떤 한(恨)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인간이 살면서 끊임없이 겪게 되는 배반의 감정을 삭이지 않고 정면으로 그렸다.
작품은 바람을 상징하는 피리 소리와 함께 원귀가 된 처용의 혼이 등장하며 시작된다. 처용의 원혼(冤魂)이 그 옛날을 회상하여 당시의 모든 상황을 재현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한동안 계속되는 생음악의 피리 소리는 무대가 혼령의 가상공간임을 암시한다.
“나의 생김새와 행실이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한 걸까, 도대체 무슨 잘못이 아내를 불만케 한 걸까?” 작품은 처용의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여과 없이 폭발시킴으로서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기한다. 안무자 자신이 작품의 많은 부분을 무용수로 출연하여 비애와 분노의 감정을 남성적이고 박진감 넘치는 춤으로 춰, 무대에 전율과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관객은 헐렁한 옷에 사위가 유난히 큰 그의 춤과 함께 한 바탕 대리 카타르시스를 경험했다.
처용설화를 대변하는 향가인 처용가, “서울 밝은 달밤에 / 밤 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 들어와 자리를 보니 / 다리가 넷이로구나 / 둘은 내 것이지만 / 둘은 누구의 것인고? / 본디 내 것이다만 /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를 무대 앞 댓돌 위에 두 켤레의 남녀 신발을 놓음으로서 상징적으로 처리했다. 또한 노현식이 격정의 춤을 출 때 놓여 있던 신발을 손에 움켜쥐고 춤으로서 신발이 효과적인 오브제로 기능하며 처용의 울분을 공감하게 했다.
사람들에겐 금지된 유혹을 받아들이려는 감추어진 욕망과 피핑 탐의 심리(Peeping Tom), 관음증의 욕구가 있다. 예술은 향수자로 하여금 그러한 욕망들을 간접적으로 체험케 해, 해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역신 역의 남자 무용수(김태건)는 원시적이고 야성적인 춤과 연기로 원형적인 리비도를 표현했으며, 특히 처용의 아내 역인 여자 무용수(김주희)의 농염한 춤과 연기는 정사를 상징적으로 그렸다. 그러면서도 저속하지 않게 춤의 미학을 구현했다.
몸에 달라붙는 검은 옷을 입고 무의식의 환영으로, 또는 그때그때 요긴한 역할을 자연스레 수행하는 네 명의 무용수는 때로는 탈춤 비슷한 춤을 추면서 작품에 극적 효과를 증폭시켰다. 1부 서지민의 특별지도로 재현에 성공한 전통춤이나 2부 한국춤과 현대무용이 가미된 창작춤의 기대를 넘는 공연도 단원들의 실력과 노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작품의 마지막에서 다시 처용무를 춤으로서 역신을 보내고 학무를 춘 것은 우리 전통굿의 마지막 거리인 열두 거리에서 굿에 청했던 신(神)들을 보내는 과정인 뒷전풀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연출자가 우리 전통연희의 큰 그림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구성했음을 짐작케 했다.
나무 문짝 하나를 이용하여 실내 공간으로, 병풍으로, 또 테이블로 전환하는 능란한 연출력과 무대장식 능력을 보여주었다. 처용 아내 역의 여자 무용수가 문짝에 타고, 무대 중앙으로 높이 올라가 누웠을 때는 마술의 공중부양을 상상케 해 작품의 판타지성을 배가시키며 관객의 시선을 무대로 몰입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다양한 춤과 연희에 더불어 변환되는 무대장식과 오브제의 효과적인 활용은 9명이라는 많지 않은 인원의 출연으로 큰 경제적 부담 없이 변화 있고 스펙터클한 분위기를 연출해 계층이 다양한 관객을 지루하지 않게 했다.
현장무용가이면서 학구적인 면을 갖추고 있는 노현식은 연출에, 안무에, 춤까지 일인삼역을 소화해 냈다. 시립무용단 예술감독이라는 직책은 일반대중에게 우리 전통춤과 오늘날의 현대춤을 동시에 보여주며, 춤 공연의 깊이와 재미를 느끼게 해주면서, 저예산으로 최대효과를 기해야 하는 어려운 자리이다. 〈미녀에게〉는 그런 고민과 노력이 함축되어 있는 전형적인 작품이었다.
아름다운 구미시문화예술회관에서 우리 춤계의 올곧은 금강송 한 그루와 적지 않은 수의 상록수들이 자라고 있었다. (제47회 정기공연. 2012.6.15 구미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1회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