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현대춤 안무가 안성수의 안무적 특성은 적어도 두 가지라 하겠다. 하나는 음악에 대한 절대 존중과, 그 둘은 발레를 연상시키는 매끄러운 동작을 균형감을 갖고 반복시키는 미니멀적 감성이 그것이다. 따라서 어떤 측면 그는 우리의 많은 안무가들 중 컨템포러리 춤에 대한 매우 순수하고 추상적 접근을 꾀하고 있는 이라고 하겠는데, 이것은 동시대의 다수의 안무가들이 가령 연극적 표현기법을 이용하거나 시각매체나 퍼포먼스성을 곁들여 춤의 혼합성을 추구하는 것과 크게 구별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안성수의 음악에 대한 절대 존중과 동작의 매끄러움은 종종 내게 작고한 G. 발란쉰이나 생존하고 있는 이로서 네덜란드 댄스시어터를 오래 이끌었던 지리 킬리언과 같은 안무가를 떠올리게 한다. G. 발란쉰은 자신의 안무에 있어서의 음악사용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또 킬리언은 현대무용과 발레 동작의 흠 없는 유기적 절충성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번 바흐의 클래식 음악과 쇼스타코비치의 현대적 감성의 음악을 주로 사용하면서 재즈 음악 등도 쓴 안성수 안무의 국립발레단 144회 정기공연 〈포이즈(Poise)〉(국립발레단 창단 50주년 기념 ‘창작 프로젝트 1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6월 29~7월 1일)는 이 안무자의 그 같은 안무미학을 국립발레단원과의 협업을 통해 확장시키면서, 디자이너 정구호의 미니멀적 장치를 이용, 발레와 현대춤이 혼합되거나 절충되는 하나의 ‘놀이터’로 만들었다.
1980년대 뉴욕 BAM 극장의 실험적 협업(collaboration) 무대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미니멀적 장치는 이번 공연의 경우 일면 고딕적 위압성을 가지면서 무대를 지배했다. 나로서는 무대중앙을 점했던 수직의 신전(神殿)과 같은 그러한 위압적 장치가 왜 이번 공연에 필요했는지 모르겠지만, 춤과 시각적 효과(미술)가 일으키는 어떤 순수한 조형적(造形的) 이벤트성의 측면에서는 호기심을 일으킬 만한 여지는 있었다.(그 장치는 비인간적 현대문명성을 상징한 것일까. 이런 ‘이벤트성’에 투명하고 선명한 색채감을 보여준 이보만의 조명이 한 몫 했다.)
안무가가 제명(〈포이즈〉)에서 제기한 ‘균형’이란 주제성은 비단 이번 공연에서뿐만 아니라, 안성수의 적지 않은 작품 속에 고루 내재해 있는 일관된 미적 관점이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에는 이 주제성을 스타일이 다른 두 춤―김지영·김리회·이동훈·이영철·정혜란·이재우 등의 여러 국립발레단원들과 김보람·박수인·장경민·최소영과 같은 젊은 현대무용인이 섞이면서 보여주는―이 한 무대에 공존하면서 상호 그 스타일과 움직임의 다름을 어떻게 조화시켜갈 것인가 하는 점에서, 더불어 춤과 음악 안에 있어서도 바흐의 고전성, 쇼스타코비치의 현대성, 재즈의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흥취감을 어떻게 한 작품 안에서 용해시켜 갈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 더 깊게 또 더 공개적으로 생각해볼 가치가 있었던 것 같다. 바꿔 말해 카니발적 축제성이나 혼란(우리의 문화적 개념으로는 ‘난장’) 속에 그 혼란의 중심을 어떻게 잡고, 어떻게 운용해 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안무가의 심미적 화두(審美的 話頭)가 되었다고 보겠는데, 나로서는 안무가가 이번의 경우 그 과제를 만족스럽게 푼 것 같지는 않다. 연결성이 부족한 옴니버스적 구성 속에 선별된 음악은 장면마다 혹은 한 장면 안에서도 그 빛깔과 톤이 너무 다르게 자주 변화했고, 춤의 흐름은 혼란된 유희성 속에서 어떤 줄기를 형성해가는 힘이나 매력을 잘 보여 주질 않았다.
안무자가 평소 춤의 스타일이나 기법을 존중하기 때문에 작품 속에 문학성(혹은 내용)은 거의 없는 편이지만, 그러나 그런 중에 어떤 주제적 상징성을 띨 수 있었던 춤의 장면들은 다소 더 필요했었다고 본다.
그런 중에 나로서 눈에 들어왔던 곳은 두 부분으로 첫날(29일) 1부(막)에서 김지영·이동훈, 이영철·김리회 두 커플의 듀엣이 수평으로 흰 줄무늬가 그어진 붉은 조명 속에서 객석에서 볼 때 무대 중앙에서 좌편으로 약간씩 이동·오버랩 되면서 어떤 삶의 회상과 노스탤지어적인 감성을 차분하게 뿜어내던 장면과, 2부(막)에서 김보람·박수인·장경민·최소영과 같은 현대춤꾼이 어깨를 찌그러뜨리며 다소 코믹하게 무대 중앙으로 이동해 가면서 그 주변의 발레적 움직임과 한데 뒤섞여 유머러스한 서민적 축제의 분위기를 춤으로 보여주었던 장면이었다. 특히 전자는 안성수의 안무적 특성이 짙게 배이진 않았어도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들의 춤의 기량이 과감한 가운데 유연하게 발휘되면서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음악(「콘체르토 2번 중 아다지오」)과 세련되게 어울리고 있었고, 후자의 경우는 현대무용수들이 보여주는 서민적 흥취감이 별 이탈감을 주지 않으면서, 일견 포스트모던적 감성을 지니며 발레 속으로 잘 스며들어갔다. (전자의 ‘듀엣 부분’은 이번 공연의 숨은 소득으로 국립발레단의 독립된 작품으로 공연될 수 있을 것 같다.) 그 외 장면들은 현대발레를 소화해낼 수 있는 국립발레단원들의 평소의 기량과 전문 무용인적 의지를 집단적으로 보여주는데 그쳤다. 정구호가 디자인한 흑백의 의상은 댄서들의 신체에 현대적 감성을 더했지만, 의상이 줄 수 있는 댄서들 신체의 확장감에도 신경 썼어야만 했었다.
그런 한편, 프로그램에 적힌 작품의 구성과 전개는 물론 춤으로 그대로 다 나타난 것은 아니겠지만, 내게 너무 자유스럽거나 산만해 보였다.
이종(異種)의 충돌감과 혼란 속에, 또 희로애락의 잦은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우리들 삶의 굴곡 속에서 어떻게 중심과 균형을 잡아야 할 것인가. 이것은 비단 현대인 삶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예술적 작업의 문제이기도 하다. 안성수는 그 점을 일단 잘 착안하였으나, 이번 공연에서 그 문제에 대해 시간을 갖고 깊게 착근(着根)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로서 그런 가운데 최근 일취월장하고 있는 국립발레단원들이 국내 안무가의 현대발레적 작업에도 흔쾌히 동참했던 것, 또 안무자와 발레단이 디자이너 정구호를 끌어들여 미니멀리즘에 기반한 컨템포러리 발레가 보여줄 수 있는 현대적 시각성을 보다 대중적 관점에서 보여주었던 것을 이번 공연의 가치로 보고 싶다.
사족으로 국립발레단과 같은 정통 클래시컬 발레단으로서는 한 번의 공연은 휴식 시간을 포함해 적어도 95분 정도는 되어야 한다. 80분 남짓의 이번 공연은 좀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