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60년대 대학가에서 시작된 탈춤운동 1세대들에 의해 1974년 창립된 ‘놀이패 한두레’가 대표작 〈칼노래 칼춤〉(1994), 〈밥꽃수레〉(2002) 이후 정말 오랜만에 공연을 했다. 물론 그간 〈물은 산을 넘지...〉(2008, 남기성 연출), 〈가장자리에 서면〉(2010, 김옥희 연출)등 꾸준한 공동창작을 해왔었으나 한두레의 이번 공연 〈풍편〉은 그간의 시간적 격조(隔阻)를 의식하듯 완성적인 한편의 창작마당극이 아니라 봉산탈춤에서 부터 수영야류와 고성오광대 그리고 고창농악과 한량춤, 거기에 창작탈춤과 자유로운 형식의 허튼춤까지를 아우르는 ‘탈춤 갈라쇼’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탈춤 2세대로 ‘놀이패 한두레’를 지금까지 이끌고 있는 남기성, 김옥희, 전현철, 최승집과 더불어 전공춤과 소속은 달라도 그들과 함께 탈춤과 농악으로 활동을 해온 김영희, 강동옥, 배현열, 김수보 등이 각자의 개인춤을 선보여 얼마전 까지만 해도 1세대의 후배였던 기억을 뒤로하고 어느덧 4-50대 춤꾼으로 무르익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가운 자리였다. 어찌보면 이들은 모든 영역에서의 1세대가 그러하듯 화려하고 패기 넘치는 선배의 그늘에 가려 오랫동안 스스로의 입지와 위상을 고민할 수 밖에 없었던 세대적 고민을 갖고 있었다. 또한 시대적인 배경 역시 탈춤을 새롭게 론칭하고, 뜨거웠던 열기를 담아내는 역할 만으로도 그 의미를 부여받은 1세대에 비해 이미 탈춤운동의 열기와 관심이 서서히 사라지던 90년대를 통과해야 했던 시간들을 돌아본다면 그들이 2012년 다시 갈라쇼 형식이나마 공연을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반가운 일이다.
성균소극장의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선 극장의 열기는 뜨거웠다. 무대의 한쪽까지 점령한 방석 관객은 어느 공연보다 함께 놀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자유분방하다. 해설자(김영희)가 나와 진행될 2-3개의 춤을 간단하게 소개하며 춤과 관객의 벽을 자연스럽게 허문다. 무대 다른 쪽엔 악사(앙상블 뒷돌, 구재연, 고안나)들이 앉아 춤의 시작을 알린다. 봉산탈춤 ‘팔목중춤’으로 춤판을 열어 젖히고 ‘노장소무춤’으로 이어진 춤들은 요일별 연목(演目)을 바꾸어 금요일엔 한량춤(강동옥)과 토요일엔 통영오광대놀이 ‘문둥북춤’(이강용)이 번갈아 들어오고, 창작탈춤을 춘 김옥희 역시 ‘복자씨’(금,일요일)와 ‘소매’(토요일) 두 작품을 번갈아 공연하였다.
누워서 시작하는 세계적으로 모기 드문 춤 형식을 갖고 있는 ‘첫목’(남기성)을 시작으로 2목(강학수), 3목(전현철), 8목(최승집)을 꼽아 보여준 ‘팔목중춤’은 극장의 낮은 천정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활기차게 한삼을 펼쳐보였다. 한두레를 끝까지 지키며 젊은 시절을 보냈던 전현철, 최승집이 리더인 남기성과 함께 그들이 탈춤을 놓치지 않으며 통과해 온 그 세월의 뚝심을 어쩌면 탈춤의 기본춤이라 할 수 있는 춤으로 보여줌으로서 다시금 새로운 의지를 다지는 듯 했다. 오래 추어 온 춤인 만큼 춤은 안정되고 매끄러웠으며 정직했다. ‘노장과소무춤’ 역시 한두레의 홍일점 김옥희(소무)와 전현철(노장)이 탈춤에서 대표적인 이야기춤으로 인정되는 노장과 소무의 사랑춤을 능청스런 탈 연기와 춤사위로 또렷하게 잘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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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수영야류 이수자로 활동하고 있는 배현열은 ‘말뚝이춤’을 추어 부산에서는 유명한 그의 춤을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신선한 무대를 선보였는데, 명성만큼이나 유려하게 말채놀임을 하는 솜씨와 춤사위가 봉산과는 사뭇 다르게 이완되어 있다. 손끝과 발디딤에 과장이 없으며 초탈한 듯한 춤이 사뿐하다. 한두레의 성원은 아니나 ‘문둥북춤’을 춘 김수보는 악과 춤과 극을 함께 하고 있는 배우이다. 문둥이로 분(扮)하여 어렵게 이미 손가락이 잘려나간 손으로 소고를 잡아 올려야 하는 연기의 몸짓이 절대적인 문둥춤과 그는 몹시 잘 맞아 떨어진다. ‘고깔소고춤’을 보여준 김영희는 초기 한두레 성원이었으나 이후 춤연구가로 활동하는 동시에 고창농악 보존회 회원으로 고창을 오가며 소고춤을 전수받았다. 얼마전 고창농악 고깔소고춤 공연 <풍무>를 올리며 공연활동까지 겸하고 있는 춤꾼이다. 상당히 발달한 기교가 농악이라고 보기 힘들만한 이 춤은 다양한 장단 구성과 춤꾼에 따라 재조(재주)를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는 열린 구조를 갖고 있으며 장고반주와 댓거리를 하거나 관객과 놀이성이 강한 농악 놀이춤의 형식으로 관객과 어우러졌다.
공연의 후반부는 창작탈춤 ‘복자씨’(김옥희)와 ‘덧배기 허튼춤’(남기성)으로 이어졌다. 김옥희의 창작탈춤은 한두레의 창작탈춤을 기다려온 관객의 갈증에 마치 앞으로의 공연을 기약하는 위로의 예고편 같은 의미를 가졌다. 고은의 시 ‘응달나무’를 모티브로 한 이 작품에 대한 설명은 안타깝게도 해설이 불충분하였고, 브로셔에서도 빈약하여 거의 설명없이 봐야 하는 불운을 맞았다. 특히 이런 느낌이 드는 이유는 그 시가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아는 것도 아닌 것인데다 춤 역시 한 여자가 남자로부터 능욕을 당하고 그 능욕의 크기 만큼 칼을 들고 복수심을 드러내나 감당하기 힘들어 서서히 실성해 간 대략의 정황은 파악할 수 있으나 익숙치 않은 창작탈춤이 전통탈춤이 이어지다 등장한 상황속에서 형식적 낯설음까지 더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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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어두운 정조 속에서 탈을 쓰고 갈래갈래 찢어진 남루한 긴 치마를 입고 바구니와 그 안에 담긴 흰 바지, 식칼 등 소도구를 들고 추어진 이 춤은 흰 바지를 입었거나, 바닥에 깔아 놓고 응대함으로써 등장하지 않으면서 강하게 드러내는 상징의 효과를 잘 활용하였다. 거기에 옷으로 상징되는 남자와 바닥에서의 능욕장면의 춤과 그 후 여자의 심경을 대변하는 식칼춤은 “춤적 마임”에 대한 고민을 놓치지 않고 이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잠시 보이는 흥미로운 해학은 복수의 칼끝에 비장함만이 서려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중국무술 영화에서 젓가락이라 주방용 칼을 들고 노는 것 처럼 칼을 이리저리 돌려 잠시 자신의 옆구리를 긁는 동작에서 반짝하고 나타났다.
‘덧배기 허튼춤’을 춘 남기성은 그간 익혀 온 영남의 덧배기춤을 재구성하여 추었다. 말하자면 이는 ‘재구성 탈춤’으로 탈을 쓰지는 않았으나 탈춤에서 극와 악과 재담과 버무려져있는 춤을 다른 것을 모두 제외하고 춤만을 드러내어 춤의 맛만을 깔끔히 보여주려는 혹은 덧배기 춤사위를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 구성한 춤이다. 탈춤이 전과장으로 공연되는 것이 보존회 차원의 공연이 아니라면 어렵기 때문에 시시때때로 탈춤은 이렇게 낱낱의 춤으로, 탈과 역할 벗고 춤만으로 일상공간에서 많이 추어진다. 특히 보존 차원의 탈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시대와 호흡하기를 원한 창작탈춤 작업을 해왔던 한두레로서는 오히려 춤사위 즉, 각각의 춤의 맛을 잘 살린 춤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이런 춤을 잘 추는 것은 춤꾼으로서 인정받는 관문과도 같은 역할을 하였기에 춤의 수련을 위해서도 중요하게 추었던 춤이라고 볼 수 있다. 남기성의 허튼 춤은 배기는 힘의 텁텁함은 떨어지나 마치 날카로운 바늘 끝처럼 예리하고 깊숙이 들어오는 힘을 가졌다. 적절하게 ‘배기고 풀고’, ‘놀고 배기고’를 배합하여 덧배기 춤의 무게감과 활달함의 교차적 축적의 맛을 잘 살린 구성은 점차로 흐드러지며 악과 함께 상승되어 갔다. 그러나 전반부와 중반까지 잘 쌓아 올린 축적의 힘은 후반의 풀어 젖히는 부분에서 여유를 갖지 못한 채 뭉텅하고 끝나버렸다. 50을 넘긴 나이답지 않게 머리는 백발이었으나 몸은 소년의 연약함과 수줍음, 그리고 힘을 갖고 있었으며, 팔은 흐트러지나 머리 사위는 야무져 춤의 맛은 깔금했다. 허튼춤의 맛은 각 개인의 춤의 맛을 살렸을 때 잘 드러난 것이라고 볼 때 남기성의 허튼춤은 일미(一味)를 갖추었다고 볼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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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으로 탈춤의 가장 큰 뿌리는 잘 알다시피 ‘제의’이다. 인류는 조상의 죽음을 맞아 그들과 영속적으로 살기 위해 그들의 머리가죽을 벗겨 뒤집어 쓰거나 그들의 두개골을 보관하고 있다가 제사의식에서 그것들을 조상의 대체물로 사용하곤 했다. 물론 그렇게 하므로써 죽은 조상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것을 쉽게 하기 위해서 였으며 그들의 가죽을 뒤집어 씀으로써 점차 자신을 잊는, 자신의 의식세계를 극복하는 전이(轉移)의 체험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제의적인 출발에서 점차 다른 인물로 분하게 되기 위해 탈은 유의했으며 바로 그런 목적부합성이 탈을 제의로부터 연행으로 이어지게 하여 지금까지도 우리가 탈춤을 즐길 수 있게된 것이다. 우리문화에서는 처용의 탈처럼 탈은 벽사(辟邪)의식에서 출발 하였으나 민간에서는 이를 놀이적으로 변화시켜 다양한 인물들의 탈로써 당시의 현실 풍자하고 해학하여 관객과 함께 즐기는 마당의 탈춤, 야류, 오광대가 된 것이다.
다시 탈춤의 의미와 장르로서의 힘을 복구시키고자 했던 탈춤 1세대의 활약으로 말미암아 역사적 탈춤의 단절은 창작마당극, 창작탈춤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고민하고 모색하는 것으로 명맥을 이어나갔다. 이런 배경 속에서 2012년 한두레의 <풍편>의 위상을 짚어보자면 앞 세대에서 미처 다다르지 못했던 춤의 관점으로 탈춤의 가치를 조망하는 것에 많이 몰두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탈춤안의 혼연되어 있는 악과 극과 춤과 놀이에서 춤을 벼러내어 춤의 관점으로 그 안의 춤성과 이야기성, 놀이성을 각각 해체하려는 작업에 주력한다. 그런 배경에서 다른 여러 조건이 있었겠지만 그들의 이번 공연은 해체작업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들이 다른 측면에서 추구 하고 있는 창작탈춤의 작업은 춤에만 속하기를 꺼려하며 춤의 모태적 형태인 악과 극와 놀이와 어우러져 있는 새로운 형태의 통합체를 구성하려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이 이렇게 통합과 해체의 양극적인 방향성 속에서 한동안 통합의 과정을 되돌아 보고 춤으로의 해체작업을 하는 것은 나름의 의의를 갖는 일이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도 드러나듯이 춤으로의 해체작업은 많은 위험한 함정이 있음을 볼 수 있다. <풍편>에서 관객은 7,80년대 탈춤의 신명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 경험을 다시 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 보인다. 80년대를 통과하며 형성된 탈춤의 재미는 여느 공연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악가무가 함께 하는 마당적 열기와 관객과 함께함을 통해 획득되는 일체됨이 주는 쾌감이었다. 거기에 시대적으로 공감을 자아내는 탈춤의 비판정신과 해학성이 전체를 아우르는 공연의 사회성을 보장해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시대적 환경은 사라졌고 탈춤의 비판정신이 발휘될 지점은 아직 발견되지 못하고 있다. 비판정신이 드러나고 있지 못하니 해학성도 무력해 지는 것은 당연하다. 깊은 아픔과 고뇌, 반성과 비판과 쌍을 이루지 않는 해학과 재미는 깊은 공감을 얻어내기는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게다가 통합체로서가 아니라 해체물로서의 춤이 형식적 측면 만으로 온전히 신명에 오르게 된다는 것은 거짓된 환상이다. 한두레의 <풍편>의 공연장에 느꼈던 관객의 호응 뒤의 허전함은 이런 지점에서 온 것일 것이다. 이는 ‘지금 여기서’ 새로운 신명을 생산하고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끝자락을 붙잡고 신명을 기억해내는 것이며 그 기억을 신명이라고 되새김질 하는 것외에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되고 만다.
춤적 해체의 결과물인 춤들은 탈춤에서 왔으나 극과 이야기, 놀이를 떼어내며 분리된 춤으로의 압박이 당연히 생길 수 밖에 없다. 탈춤 안에서의 춤은 다른 요소들과 얼마든지 부담을 나눠가질 수 있으나 떨어져 나온 춤은 잘춰야 하다는 날카로운 눈초리에 노출되고 만다. 이번 공연에서도 춤을 자신의 삶과 역사, 자신의 현재적 몸에서부터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춤이라는 관념에서 끌어내는 것이 여기저기서 노출된다. 그런 춤들은 배에서 가슴으로 올라와 보는 이의 뱃속과 가슴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뻣뻣한 몸통, 굳어 있는 몸통으로 몸의 가장자리인 손과 발에서 깔딱거린다. 그래서 춤의 재주가 마치 손과 발의 재주인양 손짓과 발짓에만 멋이 머물고 마는 공허한 춤이 되고 만다. 또는 매끈한 사위이기는 하나 공허한 사위가 되기 일쑤다.
탈춤이 부활했을 때의 상황과 이미 달라져 버린 지금의 상황은 탈춤에게 성장을 촉구할 좋은 기회이다. 아이가 태어나 살아있다면 환경에 따라 변화하고 적응하는 것은 당연한 생명활동이기 때문이다. 나는 탈춤이 현재에 당면한 과제는 춤적 해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과정은 그저 하나의 수련과정으로 족하다. 해체과정을 경험해 봐야 수렴과정을 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춤의 본원적인 존재근거를 망각하고 춤에만 매달린다면 허상에 대해 집착하는 것이고, 끝도 없이 춤을 수련의 도구로 삼아야 한다는 춤에 대한 왜곡된 관념을 재생산하는 일이 될 것이다. 춤이란 춤의 형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춤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한두레의 춤꾼들이 잘알고 있듯이 춤과 삶의 문제, 삶을 에워싸고 있는 인간사의 문제가 서로 유리될 수 없다. 삶의 틀 속에 존재하는 춤만이 우리를 병들지 않게 하고 삶에 깨어있는 춤꾼이 추는 춤이 명무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통합체로서의 탈춤에 대한 경험을 갖고 있는 유리함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이번 <풍편> 공연이 나는 그저 넌즛 탈춤이 다시 용트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몸풀이 공연으로 보고싶다. 그들이 탈춤으로 이 시간까지 살아왔듯이 지금에서의 탈춤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관객과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를 끈질기게 고민해 주리라 기대한다. 탈춤은 춤으로 해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삶속으로 해체되어 춤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가늘게 외로워져야하는 것이 아니라 진하게 두꺼워져야 하는 것이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노던 달아
녹수청산 깊은 골에 청룡황룡이 굼트러졌다
금강산은 좋다마는 풍편에 넌즛 듣고서
낙일이 욕몰현산서(欲沒峴山西) 하니
양양소아제박수(襄陽小兒齊拍手) 하니 관가쟁창백동제(關歌爭唱白銅鞮)라
절수 절수 지화자 절수
- 양주산대 1957년 본 ‘불림’ 구절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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