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아마추어' - 안무가의 안내로 극장으로 들어오다
춤의 아마추어들인 그들의 직업적 면면은 이렇다. 약제 보조자, 무역회사 관리팀, IT 컨설턴트, 고등학교 역사교사, 한국영상자료원 연구원, 증권사 브로커, 엔지니어링 정유사업본부, 청소년지도사 등이 춤과 별 관련없는 직종이라면 경기민요 전공자, 미술가, 전통 타악기 연주자, 방송영화, 심리치료학, 성악, 문화학, 문화컨텐츠학 전공 대학원생과 배우, 명상가, 작가, 방송작가 등은 춤과 그리 멀지 않은 영역에 살고 있는 이들이다. 지난 3월 28일 이들 23명이 LG아트센터 무대를 채운 공연(전석 초대)을 보고 왔다. LG상주단체로 있는 두 댄스 씨어터의 안무자 정영두가 안무한 <먼저 생각한 자 – 프로메테우스의 불(이하 프로메테우스)>은 이렇게 춤을 전공하지 않은 아마추어들을 무용수로 출연시킨 작품으로 기존의 여러 관행을 흔드는 신선한 시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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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매우 낯선, 새로 등장한 ‘아마추어-대극장-춤공연’이라는 꾸러미에 호기심이 생기는 건 당연하고 그 꾸러미가 매우 흥미롭다. 일반 아마추어들이 ‘춤 공연’이라는 형식을 갖추고 무대에 오르는 일은 그 자체로는 그리 낯선 일은 아니다. 그 일은 유치원부터 매 교육과정에서 이뤄지는 학예발표회 형식이 그러하며 교회 등 종교적 배경 속에서 이뤄지는 예배춤들도 대부분 아마추어에 의해 행해진다. 그러면 아마추어-춤공연은 무대라는 공간이 있기 전부터 전문무용수가 등장하기 전에는 오히려 대다수를 차지 했던 일반인들이 춤을 즐기던 자연스런 결과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공연이 심히 낯설었던 부분은 아마추어-춤공연이라는 춤공연의 주체와 관련된 문제는 아니며, 오히려 아마추어-춤공연이 보여주는 것을 전문적으로 하는 대극장에서 벌어졌다는 것에서 파생된 것이 된다. 여기서의 대극장은 물론 극장의 사이즈, 객석의 수를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극장의 이미지와 관련된 것이며 물론 그간 LG아트센터가 어떤 다른 아마추어 단체에게 대관을 해주고 그들의 친지와 동호인들이 어떤 춤공연을 즐겼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번 공연은 기존 춤공연의 일반적인 홍보 방식을 굳이 피하지 않은 듯 싶고 그간 정영두 작품을 제작하거나 그의 무용단과 공동제작을 해 온 흐름 속에서 정영두라는 안무가의 새로운 시도에 무용수가 아마추어인 것 뿐으로 정영두라는 안무가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제작과정을 가져갔기에 탄생하게 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마추어-대극장-춤공연’은 아마추어들이 그간 전문무용공연을 주로 하던 극장을 유명 안무가들의 안무를 타고 침입한 사건으로 한 꺼풀을 더 들추자면 ‘아마추어-대극장-안무가 안무-춤공연’으로 정리할 수 있다. 여기서 또 하나 짚어야 할 지점이 있다. 공연이 무료인지, 유료인지 이다. 아마추어들은 바로 그 행위로 생계를 영위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프로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순전히 자신들의 기호와 행복, 취미와 성취를 위해 자비와 후원으로 공연을 만들며 그 공연은 그래서 무료로 대부분 그들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 주 관객이 된다. 이번 <프로메테우스>는 서울문화재단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에 힘입어 전석 초대로 진행된 무료공연이었다. 출연자에 전문적인 무용수는 없었으며 두 댄스 씨어터 단원 3명이 안무자의 곁에서 작품개발과 출연자 트레이닝을 맡았다. 이 부분은 지난 2월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안은미컴퍼니의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2011. 2. 18 ~ 20)와 올해 <사심없는 땐스>(2012. 2. 24 ~ 26)에서도 할머니들과 학생들 등 아마추어들이 대거 등장했음에도 안은미컴퍼니들의 단원들이 아마추어들과 함께 출연하였고 유료로 진행된 것과는 다른 지점이다. 그렇다면 요즈음 춤계에 새로 등장한 공연 방식의 외양은 ‘아마추어-극장-안무가 안무-유(무)료-춤공연’으로 압축해 볼 수 있다. (유료 티켓 판매 여부와 관련된 또 하나의 문제는 아마추어 출연자에게 출연료를 지급하는가 하지 않는가의 문제이다. 이 부분은 공연 내적인 부분으로 외부에 잘 공개되지 않은 부분이므로 논외로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건은 아마추어가 프로들이 전유(專有)하던 극장무대에 프로무용수를 끼지 않고 그들만의 무대를 만들었다는 것이고, 어쨌든 그들만이 출연하는 아마추어 무대를 공적 문예기금이 지원했으며, 주요 극장들이 공간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런 공연들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예술에 있어서 공공성의 대두가 미술에서부터 논의 되기 시작하여 퍼블릭 아트, 연극에서 시민 연극(community theater), 춤에서 커뮤니티 댄스(community dance, 아직 국내에서 적절한 용어를 찾지 못했다)에 대한 논의가 작년부터 부쩍 활발해져 일반인들이 예술과 가까워진환경이 있으며, 또 한 축에는 지원금과 극장공간 지원을 가능하게 하여 춤공연의 형태를 갖출 수 있는 물적기반이 극장지원과 상주단체사업을 통해 이뤄지고, 극장을 기반으로 상주단체로 지정된 무용단과 안무자가 지역기여 사업의 일환으로 아카데미 등을 통한 일반인 강좌 뿐 아니라 한단계 더 나아가 일반인과 함께 하는 공연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정영두와 안은미의 경우가 위의 경우라면 이런 배경과는 좀 다른 태생의 ‘아마추어-극장-안무가 안무-유(무)료-춤공연’이 있다. 이 경우는 춤공연을 표방하기 보다는 ‘댄스 프로젝트’라고 스스로 칭하는 데 일반인들과 수주간에 걸쳐 그들의 삶과 이야기를 춤으로 풀어내는 세션을 진행하여 그들이 스스로를 표현할 기회를 주고 관객과는 그것을 공유하고자 공연으로 마무리 되는 경우이다. 장은정, 김혜숙, 최지연이 춘천과 서울에서 약간의 형태는 달라도 댄스 프로젝트 ‘춤추는 여자들’이라는 제하에 아마추어들이 무대에서 완성된 공연을 펼친 <당신은 지금 봄내에 살고 있군요>(2011. 7. 7 부터 워크숍 진행, 8. 5 ~ 7. 공연, 춘천 어린이 회관)와 시낭송, 노래하기, 고백의 시간, 춤 파티 등으로 진행한 <당신은 바비레따에 살고 있군요>(2012. 1. 10 ~ 15. 아르코 예술극장 다락)가 있다. 이 댄스 프로젝트는 극장 공간을 보여주기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거나 그것에 국한 되지 않고 일반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놓고 공유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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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에서 무대로 가는 길 위에서
23명의 아마추어들의 공연 <프로메테우스>는 정영두가 그들을 위해 특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안무했다기 보다는 23명이 댄서들이 정영두의 안무 속으로 들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도 다양한 직업군과 이력, 무대에 서기까지의 과정을 <프로메테우스>에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관객으로서 그저 조금 서툰, 혹은 왕창 서툰 불안한 무용수를 보는 느낌을 갖게 되는 건 무대와 의상, 조명 뿐 아니라 그들이 취하는 춤 언어와 방식에서 일반 춤공연과 별반 다르지 않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프로 무용수들의 방식으로 춤공연을 만들기 위해 무릎이 까지고, 춤 동작이 가능한 몸으로 가는 과정에서 필수인 파스 냄새를 풍기고 다녀야 했으리라.
정영두 작품에서 무용수만 바뀐 것 같은 이런 상황은 공연이 전개되면서 급속히 지루함과 무의미에 시달리게 만든다. 그들의 일가친척도 아닌 관객들은 혹은 정영두의 춤세계에 기대를 걸고 온 정말 순수 관객들은 어느 것에서도 충족받지 못하게 되고 만다. 춤춘 이들은 그 춤언어를 스스로의 몸에서 끌어 내고, 느끼면서 춤을 추는 과정을 배웠겠지만 그것은 무대에서 드러나는 종류의 것으로 숙성되지 못하였다. 바로 그것을 무대에서 관객이 소통할 정도의 것으로 표현해내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전문 무용수들인 것이다. 아마추어들이 표현기교에서 모자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이 작품의 예술세계를 어느 정도 참여해서 만들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으며, 자신의 인생관을 부합시켰는지에서 공감과 감동이 올 수 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들의 연습과 고민의 흔적에서 이 주제에 대한 춤 춘 이들의 철학은 춤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이 심오한 문명과 인류에 대한 성찰적 작품은 정영두의 특성 상 매우 정교하고 투명하게 드러나는 바 아마추어들이 이어가는 호흡과 에너지로는 표현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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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명의 그들이 춤과 만나 경이로운 체험을 하고 몸의 원시성과 생명력으로 잠들어 있던 DNA속 춤 인자를 깨우고, 그것을 공유하고 춤으로 연대하면서 느꼈을 황홀감은 너무 소중하다. 이 부분은 특히 정영두의 안내가 아니었다면 인류와 춤에 대해, 문명과 우리의 현재에 대해 몸으로 느끼고, 진지함과 차분함으로 춤에 다가가는 법을 그들이 만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과정이 만들어 낸 작품의 집중력 역시 그들이 무리지어 몸을 서로 접촉하거나 같은 동작을 만들어 낼 때 고요하나 지혜롭게 보이는 그런 춤을 만들어 큰 무대에서도 압도 당하지 않고 살아 나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것을 작품의 내용으로 까지 수렴시키지 못했으며, 그건 안무가와 작품개발자가 놓친 지점일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무료(無料)였음에도 아이가 몹시 진지하게 나비 넥타이를 매고 그랜드 피아노를 바이엘 악보를 놓고 치고 있는 것을 10분 이상 봐야 하는 것과 같은 상황에 노출되고 말았다. 공연을 하는 주체와 공연의 형식, 주제가 서로 남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 부적합한 조화에 정신과 몸이 모두 불편한 공연이었다. <프로메테우스>가 객석에서 무대로 가는 와중에 잃어 버린 것은 아마추어가 춤춘다는 가장 큰 의미를 놓치고 쉽게 형식에 몸을 맡겨버려 생긴 주체의 상실이다. 이 상실은 주체가 주체의 상실을 예측하지 못한 상실로 또 하나의 몽매(夢寐)가 되었다.
춤의 발화점
춤은 다양한 지점에서 발화된다. 정영두가 주로 사용하는 방법인 인식에서 출발하여 인식으로 몸을 바라보고, 몸의 느낌과 구조를 끈질기게 인식 반경에서 수렴해내는 것이다. 의식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이 경로는 표면 의식에서 일어나는 의식적 성찰력이 강한 안무가들이 사용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춤은 몸의 반경에서 일어나나 몸의 흐름에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다. 그들의 춤에선 몸의 생기는 느낄 수 없으나 춤이 끝난 뒤에 꼿꼿이 살아있는 투명한 의식을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의식에서 출발한 유형 중에 보다 호기심 많은 안무가들은 무의식의 세계를 느끼게 되고 그 무궁한 어둠의 세계를 탐색한다. 그들의 작품에선 그 의식의 아래 층에 있는 의식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세계가 노출되고 단지 몸은 그런 세계를 드러내는 장치 일 뿐이다.
또 하나 춤을 생성시키는 지점은 감정(emotion)이다. 감정은 단어에 그대로 드러나 있듯이 e(out) + motion(움직임)으로 반드시 몸의 행위로 또는 몸의 반응으로 드러난다. 감정을 가장 빠르게 생성시키는 것은 ‘자신’과 관련 있는 ‘이야기’ 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야기에 가장 강렬하게 감정을 일으키고 반응한다. 그래서 일반인들을 춤으로 끌어 낼 때 가장 강력한 방법이 자신의 이야기와 그와 관련된 감정에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춤은 최소한 카타르시스로 귀결되거나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해 동감을 형성하고 춤추는 자의 내적인 의식 변형을 일으켜 춤추기 전과는 다른 자아가 되었음을 체험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춤에서 느끼는 강렬하고 오래 지속되는 황홀경은 주로 이런 과정에 몸의 메커니즘까지 동반될 때 일어난다.
또 하나 구분해 낼 수 있는 지점은 몸으로부터 시작되는 춤이다. 별 내적인 동기 없이 단순한 움직임의 반복이나 약간의 의식적, 감정적 도움을 받아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움직임과 몸의 메커니즘에 의해 계속적으로 춤 움직임이 계속되어 발전해 나가는 경우이다. 그 이후에 의식을 개입시켜 이 과정에서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몸의 흐름과 반응을 통해 자신의 의식, 무의식, 감정의 덩어리들을 발견하게 되는 경로로 치유와 수행, 명상, 무용치료 등에서 쓰이는 몸을 통한, 동작을 통한 성찰 방법이다.
이 외에도 다양한 문화적 배경, 사회적 환경 속에서 춤은 발화한다. 물론 그 지점들을 단순 비교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성공적으로 춤이 추어지면 어디에서 시작되었든 간에 몸과 정신이, 의식과 무의식이, 감정과 이성이 조우하고 통합된다. 그 통합의 지점에서 ‘우주와 하나 된 듯한 극치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인간을 소우주라고 말하는 것이 자신 안에서의 통합감, 타인과의 일치감을 우리는 우주와 하나되었다고 느낄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춤은 그렇게 인간 그 자체이다.
나는 이제 춤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 외의 일반인들이 춤을 직접 경험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직감한다. 그러나 이는 초유의 일은 절대 아니다. 그저 너무 오래 우리는 바빴고, 춤출 여력이 없었으며, 춤을 뺏기거나 잊고 우리와 무관한 것이라고 믿었던 것뿐이다. 이런 시점에 난 일반인들에게 춤을 겉핥기가 아니라 깊은 마력과 매력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 경험 안에 인생을 푸는, 문제를 통찰하는 새로운 힘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어디에서 춤이 출발했든, 어느 성향을 가진 안무가를 만나 인도되었든 의식에서만, 몸에서만, 감정에서만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에서 한 걸음씩 더 들어가 춤의 세계에 깊이 나를 맡겨보는 경험을 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그 과정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형식화된, 양식화된 춤이다. 그저 춤동작을 행하는 것을 춤을 춘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전문 댄서는 이런 과정에서도 깊은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들은 밥먹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춤을 추니까 그 절대적인 투여량 때문에 몰입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인 들은 그것이 춤인 줄 알고 접하게 되면 자칫 영영 그 형식에 갇혀 진정한 춤 경험은 못할 수 있다. 이 부분이 일반인들에게 춤을 소개할 때 사려 깊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춤 형식 안에 춤의 세계가 있진 않다. 형식은 그저 춤을 접할 수 있는 입구이며, 춤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것이다.
여태껏 춤을 춰 온 무용가들이 일반인이 춤과 함께 하는 과정을 돕게 될 것이다. 그들의 풍부한 경험과 깊은 체험들이 많은 이들을 춤출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용가들은 그저 형식뿐인, 기교뿐 인 춤이 일반인들과 맞지 않는 다는 것을 느낄 것이며, 그것만으로 전일적인 체험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씩 경험해가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가는 그런 생생한 순간을 맞이 하고 있다. 또 하나의 덤은 그 과정을 함께하면서 안무가 스스로 깨우치게 될 춤의 지혜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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