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인무 페스티벌'과 K-Arts 정기공연
차이는 또 다른 춤의 생성을 이끌고
권옥희_춤비평가

“이 길과 똑같은 길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세상의 길은 모두 다르니까.” 구스 반 산트의 영화 『아이다호』에서 마이크는 모든 길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람들의 얼굴처럼 모두 다르다고 말한다. 가만 생각해보면 길뿐만이 아니다. 춤공연도 마찬가지다. 무용수, 무대 등 언뜻 보면 같지만 늘 다른 얼굴을 하고 관객을 맞는다.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같지 않은 무수한 춤에서 나는 차이를 읽어내고 반응한다.

 최근에 ‘2인무’ 페스티벌(예술감독·김순정) 공연이 대학로에서 있었다. 춤공연으로는 꽤 긴 한 달여간(꿈꾸는 공작소, 10월 19일~11월 13일)의 공연을 기획한 이철진(한국춤예술센터 대표)은 팸플릿에 “대학로 소극장 공연계에서 소외되었던 춤을 활성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소극장이라는 무대에 춤이 어떻게 안착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기 위한 실험적인 시도”라 그 의도를 적고 있다. 하루에 세 팀이 5일간씩 공연. 모두 12개 팀의 모든 장르의 춤이 ‘2인무’의 형태로 무대에 올랐다.
 22일 공연. LDP무용단의 『Female』, 정우정연 무용단의 『진주교방굿거리춤, 구음검무』, 미타노리아키 무용단의 『나소리』, 그리고 프로그램에 없었던 생뚱맞은 가야금 병창까지 덤으로 봤다. 정우정연 무용단의 전통춤은 단아하고 진지했다. 하지만 협소하고 닫힌 공간에서의 생음악 반주음악은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개인적으로 극장 무대에서의 징과 꽹과리를 동반한 생음악 연주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전통 악기 중 징, 꽹과리, 태평소 등은 원래 야외에서 연주하던 악기이며 이 악기들은 넓게 트인 공간에서 그 소리가 공중으로 흩어질 때 진정 소리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미타노리아키 무용단의 『나소리』는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전래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음악을 통칭해 부르는 고려악의 일종으로 두 마리의 용이 즐겁게 노는 모습을 춤의 형식으로 나타낸 춤이라고 한다. 비교적 몸집이 큰 남자무용수가 손에 들고 추는 피리라는 것이 조그만 나뭇조각처럼 보이는, 그 상징성만 남아있는 춤은 간단한 걸음을 이리저리 옮겨놓는 정도의 움직임이다. 그리고 이미 일본의 문화가 많이 녹아든 일본화된 움직임으로 보였다. 학술적인 연구 가치는 있겠으나 ‘2인무’의 무대에는 적절한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다만 우리에게는 남아 있지 않은 춤을 연구,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춤은 무용수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 말하자면 일정한 크기의 자리 안에서만 추는 궁중정재 외의 모든 춤은 어느 정도 무용수의 자유로운 움직임이 가능할 정도의 공간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소극장 무대는 중·대극장과 달리 협소하다는 공간적 제약이 따른다. 당연히 소극장이라는 공간적 특성을 잘 고려한 작품을 안무하여 올려야 한다. 그런 이유로 ‘2인무’ 기획은 적절한 듯했다. 하지만 간극이 큰 장르가 두서없이 섞인 프로그램은 서로 충돌 요소로 작용, 작품 감상을 방해했다. 아쉬운 점이었다.


 LDP 무용단의(김희선 안무) 『Female』.

 결혼이란 경험은 설렘과 기대감, 세상에 대한 도전에서 오는 긴장감과 두려움 등 만 가지 감정을 갖게 한다. 그렇게 시작된 결혼. 쌓다 만 것 같은 허물어진 빨간 벽돌담을 배경으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자 두 여자의 춤이 시작된다. 파스텔 톤의 연두색 간결한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정혜민과 흰색 원피스를 입은 길진영은 서로의 치맛자락을 쥐어짜듯 잡고 당기고, 자신의 치맛자락을 움켜진 채 마치 빨래를 하듯 발로 무대 바닥을 아프게 밟아댄다. 그녀는 맘껏 춤출 수 없다. 누군가가 치맛자락을 잡아당기고, 아이는 울고, 빨래를 밟는 다리처럼 현실은 무겁고 아프고 버겁다. 안쓰러운 자신을 위로하듯 두 팔로 가슴을 꼭 안고는 가슴을 감싼 자신의 팔에다 무수히 입을 맞춘다. 아름다운 기억을,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리라. 여성으로 가장 사랑받고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며 조명 받던 그때를. ‘안녕이라고 말해야 할 시간(time to say goodbye)’이란 노랫말. 과거? 현재? 어느 때에다 안녕이라 고할 것인가의 선택은 보는 관객들의 몫이어도 괜찮다. 작품은 그런 것이다.

 

 

 


 빨랫줄이 걸리고 바구니에 가득 담긴 빨래를 털고 널기를 거듭한다. 젖은 빨래에서 튕겨져 나온 물방울들이 조명 아래 떠다니고 물을 털어내는 행위에서 무엇에 홀려 있는 것처럼 강박증이 묻어난다. 경직된 근육의 어눌한 움직임으로 치마를 잡아당기고 머리를 털고 팔을 털어낸다. 원하지 않은 상황에의 분노를 물 묻은 상황으로 풀었다. 빨래를 물건 분류하듯 넌다. 심장의 박동처럼 음악이 비트 있고 춤은 빠르게 전개된다. 흰 원피스의 길진영이 경련하듯 움직이면 정혜민이 눌러 진정시킨다. 이윽고 객석을 향하고 선채 눈을 감고는 흐르는 음악에 몸을 맡기고는 명상하듯 몸을 천천히 흔들며 같이 추는 춤의 힘과 주제 표현의 여운이 좋다. 정혜민은 춤의 선이 시원하고 힘이 있었다. 길진영 또한 감정선은 좋았으나 끝까지 끌고 가서 폭발시키는 춤의 에너지가 부족한 점이 살짝 부족했다.

 

 

 


안무자 김희선은 결혼은 경험하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는 비밀을 알아낸 것 같다. 일상의 움직임을 무심한 듯 능청스레 삽입하면서 끌고 간 춤의 심리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앞으로도 동일한 춤을 와해시킨 자신만의 춤의 세계를 상정하고 있길 바란다. 그것이 춤을 생산하되 파괴하는 창조의 힘이다. LDP 무용단의 창단멤버이기도 한 김희선은 현재 P&P 댄스프로젝트(PPDP) 대표이며 전북대에 출강하고 있다.


 제28회 K-Arts 정기공연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무용단(K-ARTS)의 28회 정기공연이 있었다(석관동 예술극장, 11월 4~ 6일). 한국무용은 김현자(한예종무용원 원장) 안무의 『매화를 바라보다』, 발레는 조주현(한예종 교수) 안무의 『비몽』, 그리고 현대무용으로는 전미숙(한예종 교수)안무의『결혼』이렇게 세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한국무용 『매화를 바라보다』. 김죽파의 가야금산조 가락에 춤추는 몸을 실은 무용수들,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매화 꽃잎 같았다. 분홍색의 홍매, 하얀 꽃의 백매, 분홍으로 수줍게 피는가 하면 무대를 휙 가로지르면서 다시 흰 꽃으로 우아하게 피는 매화꽃잎들. 다지듯 촘촘하게 추는 기본무가 아름다운 꽃(춤)과 향기를(무용수)를 피게 만든 흙과 바람일 것이다. 발레 작품『비몽』. 여자무용수의 솔로에 이어 힘겨루기처럼 보이는 남녀가 추는 춤의 긴장감이 아름다운 몸의 선을 만들어내 무겁지 않고 작품에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된다. 춤추는 몸의 선을 그대로 보여주는 흑백의 극히 간결한 의상. 조명이 만들어낸 좁은 선위에서 줄을 타듯 토슈즈를 신고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팔을 휘젓고, 2번 그랑 쁠리에 자세로 흔들리는 위태로운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면 무대를 힘껏 달린다. 위태로운 벼랑 위가 현실이고, 광대가 타야하는 줄이고 무대다. 언제나 등을 반듯하게 펴고 중심을 잡고 돌고 뛰어야 하는. 흥미로운 점은 안무자가 그 현실을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지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안무자는 춤을 믿고 있는 듯하다. 춤은 춤이어서 아름답다는 것을.



 전미숙 안무의 『결혼』

 전미숙의 『결혼』은 또 다르게 풀어낸 결혼 이야기로 유쾌하고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현대춤의 움직임으로 쇼팽의 발레음악 「레 실피드(Les sylphides)」를 새로이 해석한, 아니 그 음악과 현대춤의 조화를 시도한 작품이라는 게 맞겠다. 결혼식을 했다는 증거(?) 사진을 찍는 상황의 해프닝, 터무니없는 화려한 의상과 부산함은 패션쇼의 무대 뒤와 닮았다. 도미노처럼 밀려서 쓰러지고 자빠지는 아우성 뒤에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카메라 앞에서 다시 자세를 잡고 우아함을 과장하는 동작들을 느리게 돌아가는 필름처럼 재현해내는 무용수들. 호리존에 길게 새겨지는 그들의 그림자에서 결혼이 드리울 그늘을 읽는다. 발을 무대에(현실) 두지 않으려는 듯 남자 무용수의 등, 손, 어깨 등으로 올라선 신부를 엉뚱한 남자가 가로채서 사라지고, 다시 나타난 신부는 한쪽 발에만 하이힐을 신고 다른 하이힐 한쪽은 손에 들고 춤을 춘다. 절뚝이는 춤. 균형추를 잃어버린 수상한 결혼이다. 신부는 마이크를 들고 결혼에 대해 설파한다. 남자의 유능함을 선택해야 한다나 뭐라나. 어쨌든 남자들은 머리로 여자들을 밀고 다니고, 모든 관계는 가벼운 놀이처럼 자유로워 보이나 그 모든 것을 누군가가(피아노 다리에 묶인 빨간색 끈) 조종을 하고 있다. 원피스에 바지를 입은 남자 무용수의 모호한 성(性)처럼 그들 결혼에서의 성의 역할 또한 모호해지고 무너질 것이다. 전미숙의 결혼은 과장되고 위험하고 싸우고 지지고 볶는 유쾌한 수다로 풀었다. 거칠 것 없고 경계가 없는 무대의 활용으로 춤은 더 활기 있고 근사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대개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는 것처럼 우리는 생각에서도 동일함은 차이보다 훨씬 주목을 받는 것 같다. 하지만 춤작품을 보는 나는 동일함이 아닌 차이를 우위에 둔다. 차이야말로 어떤 것의 특이성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추구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이런 차이는 반복의 개념을 동반할 때에 더 의미가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에서 반복은 차이가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달리 말하면 반복은 차이의 반복이자, 이미 차이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것의 생성은 차이의 반복에서 온다. 이 말은 곧 차이로 인해 앞으로 생산될 춤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기대해볼 만하지 않을까? (전재: 공연과 리뷰,2011, 겨울호)

2012. 0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