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안무가 이인수는 새로운 움직임의 조합, 소재를 풀어나가고 메시지를 담아내는 방식 면에서, 기존의 국내 안무가들이 보여주는 정형화된 스타일을 조금씩 비켜갔다.
이인수 안무의 신작 <벽>(12월 9-10일, 문래예술공장 박스씨어터, 평자 10일 공연 관람)은 작품 전편을 통해 움직임과 움직임 사이에 절묘한 타이밍으로 맞물리는 또 다른 움직임의 조합과 연극적, 퍼포먼스적 구성으로 색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안무가는 두 명의 여성 무용수와 자신을 포함한 5명의 남성 무용수를 등장시켜 그들 각자가 갖고 있는 마음 속의 벽들, 개개의 사연들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엮어냈다. 친구에게 애인을 빼앗긴 여자, 친구의 애인을 뺏고 싶은 여자 그리고 바람둥이 남자, 우연히 마주친 헤어진 여자 친구에 화난 청년, 수수방관하며 모든 상황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남자, 무용을 공부하기 위해 한국으로 유학 온 외국인 댄서 등등 그들 각자의 사연에 따라 무대는 거리에서 클럽으로, 카페에서 공원으로 시시각각 변화된다.
안무가는 무용수에게 각각의 캐릭터를 부과하고, 그들의 사연을 풀어내는 방법으로 독백, 대사, 연기, 때론 춤을 차용했다. 중심 개릭터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과정에서 안무가는 2인무나 솔로, 군무 등 어떤 장면에서는 춤을 통해 어떤 장면에서는 내뱉는 대사에 내재된 단어의 의미를 통해. 어떤 장면에서는 퍼포먼스에 가까운 집단적인 행위 등을 통해 관객들과 소통한다.
이 같은 시도는 올 가을 내한공연을 가진 안무가 콘스탄자 마크라스가 <메갈로폴리스: 거대한 도시>에서 보여준 무용-음악-언어-비디오-연기의 혼합을 통해 춤과 연극적 구도가 혼재하면서 강렬한 메시지를 담아내는 구도와 어느 면에서 유사하기도 하다. <벽>에서 이인수가 시도한 팝음악과 가요, 연극과 마임, 힙합 등 다양한 장르의 복합적 연계 시도, 그리고 이를 통해 작품 속에 내재시킨 메시지 등이 그런 예들이다.
안무가는 특유의 접촉에 의한 움직임과 다음 연결 동작사이에 삽입시킨 예기치 않은 정지, 그리고 빠르게 다음 장면으로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마임과 춤의 조합 등 템포감과 이미지 조합에서 발군의 감각을 보여준다. 관객들은 50분이 넘게 웃거나 때론 사유하면서 그렇게 정신없이 작품 속에 빠져든다.
무용수들이 군집 대형으로 무대를 채우고, 곧 이어 좌우 벽쪽에 위치한 의자에 홀로 앉도록 하는 장치를 통해 한 공간 안에서 빠른 변환을 시도한 것도 관객들의 몰입을 가능케 한 요인이 되었다. 다만 적지 않은 분량의 무용수들의 독백과 짧은 대사 주고받기, 인성(人聲)의 고저나 움직임과의 연계 등은 더 세밀하게 다듬어질 필요가 있다.
출연 무용수들에게 각각의 캐릭터를 설정, 이를 중심으로 작품을 풀어나가며 순도 높은 새로운 움직임의 개발과 여기에 힙합, 아크로바틱한 움직임을 접합시키고, 유머까지 결합, 작은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이인수의 안무 스타일은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두 남자의 인간관계를 다양한 움직임으로 풀어낸 <현대식 감정>, 교복 입은 여학생, 철부지 소년, 동네 백수 형 등 어린 시절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등장시켜 ‘가상의 공놀이’를 통해 상상과 현실의 세계를 담아낸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그런 예들이다.
이인수는 올해 발표한 두 편의 신작 모두 평균점 이상의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그가 안무한 <모던 필링>은 2010년 Kore-A-Moves를 통해 유럽 7개 도시의 유명 춤 전용극장에서 호평을 받았었고, 올해 베이징 국제 발레 & 안무대회에서 1등상을, 전년도에는 독일 노발레 국제안무대회에서 3등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뛰어난 기량의 무용수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데 반해 상대적으로 국제무대에서 경쟁할만한 유능한 안무가가 부재한 한국 춤계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기대주인 이인수의 향후 작업은 이제 더욱 많은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지난해 처음 시작된 문래예술공장의 젊은 예술가지원 프로젝트 MAP 역시 지원 방식의 차별성과 함께 전년도 지원 대상 안무가들의 작업에 비해 올해 더욱 예술적 완성도가 높아진 결과물로 인해 젊은 예술인들을 위한 성공한 지원정책의 모델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농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