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춤은 그것을 보는 사람의 적극적인 상상력과 공감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저 음악에 맞춘 동작만 있는 움직임의 나열일 뿐이다. 따라서 춤공연의 운명은 관객과의 만남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들은 꽃이 아름다운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기도 한다. 벌과 나비 등 곤충의 도움의 받아 번식하는 꽃들이기에, 곤충을 어떻게 유혹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벌은 노란색과 흰 색을 좋아한단다. 그러나 벌이 꿀을 필요로 하다 보니 꽃 색깔을 좋아하게 된 것인지, 꽃이 벌을 필요로 하기에 그들의 취향에 맞는 색을 갖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벌의 취향과 꽃의 모양새가 서로 맞으면, 그 결과 성공적으로 서로 원하는 것을 얻고 있다는 정도 아닐까. 따라서 춤이 아름답다면. 춤은 보는 이들에게 아름답게 혹은 의도한 대로 보이기를 시도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이가 나의 춤 이야기를 듣고 갈 것인가. 어떤 춤이 나의 마음을 흔들어놓을 것인가. 설레지 않는가!
지난해 12월이 다 갈 즈음 〈help...ing〉(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12월 17일)을 봤다. 해를 넘긴 늦은 리뷰에 대한 이유를 굳이 들자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도, 더 나아가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길러 나라에 이바지하고자 함도 아니다(나는 국민교육헌장을 맹렬하게 외운 세대다). 다만 춤에 관한 글을 쓰는 자로 주목할 만한 독립안무가들의 작업을 자세히 알리고자 하는 책무 혹은 그들에 대한 주체 못할 애정의 발로라고 해두자.
공연이 시작되자 일본에서 공연한 박홍기의 이전 안무작인 ‘Ice or water’를 편집한 동영상이 무대 위 화면을 채운다. 마치 영화의 예고편 같은 영상 속의 춤이 독특하고 인상적이었다. 이 작품은 2008년 요코하마 댄스 컬렉션 R에서 미래로 뻗어가는 요코하마상 그룹 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help...ing〉 무대 또한 기대해도 좋을 것이라고 마치 관객한테 귓속말로 소곤거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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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천장에 높게 매달린 그네 위에서 한 여자가 아슬아슬하게 앉아 있고(서해영), 무대 바닥에는 남자 넷(권승원, 권준철, 허욱, 박준영)이 벗은 채 돌아앉아 있다. 이 무대를 여자(김소영)가 발을 끌며 무겁게 사선으로 가로지른다. 이들에게 배치된 무대의 공간은 '현대라는 인간의 사막'. 이어서 입속에 엄지를 넣은 남자(이제성) 무용수가 솔로를 추기 시작한다. 우울하고 어두운 춤, 침묵을 끌고 가는 힘이 있다. 무대 위로 내리꽂히는 깨끗한 두 줄기의 조명은 마치 철창처럼 보인다. 그들은 어디에 갇힌 걸까. 6명이 추는 군무 움직임과는 서로 비껴서는 공간에서 외따로 춤을 추는 이제성의 움직임. 이들이 발산하는 에너지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중앙을 차지하며 6명의 무용수가 추는 군무와 무대 왼쪽 앞 가장가리에서 혼자 추는 춤은 하나의 무대 공간에 있지만 각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두 형태의 춤이다.
장이 바뀌지만 여전히 차분하고 절제된 움직임으로 군무가 이루어진다. 무대의 삼 분의 일쯤 되는 가장자리에서만 낮게 출렁이며 머물러 있는 포그. 그 속에서 무용수들은 뒷짐을 진 채 춤을 추는가 하면 엉거주춤 일어서다 앉는 등 간결하고 단순한 동작을 반복한다. 마치 서로에게 다가가고자 하나 주된 방향과 엇갈리고 있어,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동시에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듯한 느낌이다.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다가는 머무르게 하는 그런 것. 조명에 의해 그려지는 춤은 보이는 것 이상의 이야기를 가능하게 한다. 이 두 형태의 춤은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중 어느 한쪽이 전체를 압도적으로 지배하지는 않는다. 관객이 상상하는 이야기가 제자리를 잃고 너무 멀리 가버리면, 조명이 춤 속으로 다시 불러들인다. 그리고 조명의 효과가 시들하게 보일 때쯤이면, 다시 춤이 주는 서사의 가능성이 제자리를 주장하며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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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장, 남자들 사이의 묘한 긴장감(힘의 우열에 따른)이 흐른다. 한 남자(권승원과 박준영)의 움직임을 그림자놀이 하듯 또 다른 남자가 따라 한다. 객석에서 웃음이 터지면서 극장 안의 공기가 한순간 풀어진다. 권승원이 객석의 중앙을 가리키며 누구에겐가 일어서라는 손짓을 한다. 조명이 밝아진 그곳에서 관객들이 서로를 쳐다보던 중 한 사람이 일어서더니 남자가 하는 손동작을 엉겁결에 따라 한다. 대화상대자를 꼭 겨냥한 것은 아닌 듯(설혹 미리 정해놨어도 상관없다). 관객이야말로 무용수들의 기본적인 대화 상대자이다.
다시 무대를 본다. 남자와 남자의 춤, 남자와 여자의 춤들이 이어진다. 남자가 여자를 도와주고 그 여자는 다시 남자를 도와주고 남자가 남자를 도와주고 그 남자는 또 다른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춤으로 이어진다. 이들이 춤으로 여는 문은 단순히 안과 밖을 이어주는 통로가 아니다. 그들이 존재하고 있는 무대라는 공간이 안이며 밖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9명의 젊은 무용수들이 시종일관 유지하는 열정적이고 진지한 태도는 칭찬할 만했다. 아쉬웠다면 안무자의 작품 의도를 잘 파악한 바탕에서 나오는 자신만의 춤 언어 표출에는 다소 미흡했다는 점. 작품을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뒤에라야 무대를 즐길 수 있다. 무용수가 자신 있게 즐기는 무대는 관객에게 감동으로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나에게서 충성심과 감동 심지어 비장함을 끌어 낸 적지 않은 사례가 '유사 파시즘'은 아니었을까. 각자의 개성과 차이조차 논할 수 없고, 더 이상 개인은 없는. 바라건대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는다는 터무니없이 비장한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않고 자란(다행이지 않은가), 안무자와 무용수들은 자유로운 정신으로 창작 활동을 하길 바란다. 쫄지 말고.
안무자 박홍기는 부산 출신으로 대구시립무용단에서 춤췄었다(차석). 현재는 독립안무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