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눈만 뜨면 새로운 상품과 그에 대한 소비욕망이 모든 매체를 동원한 의식, 무의식, 초의식의 영역에서 공략당한다. 오로지 소비로 정향된 자극 또는 고삐가 풀려버린 자극의 회오리들은 감각을 가능한 한 다양하고 빠르고 많은 것들을 원하는 것으로 단련시킨다. 이렇듯 세상에 다양한 욕망들이 화려한 문양을 그리면 그릴수록 춤에 대한 욕망도 증가하여 춤의 모양새도 다양해져 갈 것이다. 방송춤과 노골적 오락춤을 제외하고는 대중의 놀이터와 멀리 떨어져 있는 덕에 그나마 춤에서 감각적 욕망을 실현시키는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아 다행이지만 극장춤에서도 극장이라는 공간이 가진 다종다양한 감각적 자극을 다룰 수 있는 구조 안에서 그것은 열려 있다.
아이가 장난감을 다루면서 재미를 느껴가듯이 극장에서 놀아야 하는 예술가가 극장적 특성을 잘 다루고 재미있게 다루는 것을 관객에게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한 덕목이지만 연예와 오락에서와는 달리 현대의 예술춤 영역에서는 단지 감각적 자극만을 겨냥하는 것 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중소비사회의 물결은 거세 예술이 고고하게 자리를 지키는 것이 먼 얘기가 되어버린 지금 극장에서 역시 춤의 보여지는 측면의 감각적 내용들은 춤을 이루는 근저(根底), 즉 창조의 동력이 되는 ‘주제의식’과 분리되기 일쑤다.
말하자면 현대의 춤예술가들의 갈등은 ‘주제의식’으로부터 시작하여도 춤 자체가 가진 형식적 측면과 극장춤을 탄생시키는 시, 청각적(음악, 조명, 의상, 무대장치 등) 측면을 다뤄야 하는 작업과정 속에서 두 측면을 통합시키는 한 지점을 찾아내는 일이 간단치 않다는 데 있다.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를 놓치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한 것을 보아 알 듯 말이다.
그러나 춤을 관람하는 입장에서는 어쨌든 주제의식과 형식이 하나의 작품으로 직조되어 있는 통합체를 대상으로 함으로써 마지막까지 창작자가 조절하고자 했던 그 갈등의 긴장도가 담겨 있는 어떤 실체의 현전을 만나게 된다. 나는 춤에 대한 이 경험속에서 마치 시간이 지나도 휘발되지 않는 어떤 뿌리의 느낌을 주는 지점을 만나게 되는데, 이 지점은 그 깊이감과 파장의 강도에서 표면에 있기보다는 저 깊숙이 거처를 가진 ‘춤의 근저’라 부를 만하다. 이 ‘춤의 근저’는 나의 ‘살’에 닿아 이미 정의된 어떤 것이 아니라 낯설고 생생한 그러면서 어떤 암시를 포함한 것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반성적 사고만을 통해서 얻어 질 수 없는 아주 감정적이며 원초적인 어떤 의미이다.
‘전쟁, 치유, 평화’ 대전시립무용단 정기공연
기사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하는 안무가 에리카 정은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수잔 그리핀의 동명 소설에 기반하여 안무한 <춤, 돌들의 합창>(안무-에리카정 슈)은 한반도의 분단에 관한 이야기이다(2011. 5. 13-14, 대전문화예술의전당). 자신의 뿌리와 역사에 대한 의식으로부터 출발한 분단문제는 냉정할 수 없는 문제라는 측면에서 뜨겁게 자신의 이야기로 풀어져 나왔고 철저하게 그 역사의 세례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stones)’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었다. 다수의 사람들이 평상복을 입고 무대에 서있다. 그들은 예리한 선으로 서로 대립하거나 넘고 싶어도 넘을 수 없는 손발이 허우적 걸려도 통과할 수 없는 선으로 막혀있다. 그래서 그들은 소리치고 뒹굴고 ‘날 봐, 나 여깄어!’를 외치며 존재를 드러낸다.
에리카의 안무는 집단을 주인으로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들은 모여 있어도 개성없는 덩어리가 아니며 그렇다고 역사 속에서의 공동운명체를 개인을 통해 조명하려는 의도도 없다. 조명의 음영으로 무대의 앞과 뒤를 빛의 다소로 조절하여 역사적 깊이감을 드러내는 가 하면 그런 조명 속에서 그들이 가만히 서있는 것만으로 그들의 역사속의 삶을 잘 스케치 한다. 등퇴장과 장면 전환이 빠르고 자연스러워 무대를 깔끔하게 정돈하여 관객이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대전시립단원들이 현대무용적인 동작들을 어색하지 않게 보여준 것은 그간 그들이 쌓은 현대화의 노력과 에리카 정의 단순한 동작을 변주했지만 동작의 스타일에 매이지 않는 자연스런 춤움직임에 대한 접근이 빚어낸 성과였다.
<높새바람>(안무-최지연) 역시 같은 책을 기반으로 한 다른 작품이다. <높새바람>은 작년 창무국제예술제에 포함되어 극장로비에서 진행했던 작품을 가다듬어, 다시 올린 작품이다. 최지연은 어쩌면 창작춤에서 제의성의 진수를 별 오염이나 변경없이 보여줄 마지막 안무가일지 모르겠다. 이는 최지연이 한국창작춤이 잉태될 당시에 모태로 삼았던 제의에 대한 생각을 교과서처럼, 모범생처럼 간직하고 있기에 그렇다. 그녀는 마치 신념처럼 우리춤이, 창작춤이 그 제의성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거 같다.
춤과 동반되는 거친 숨소리는 이제 자연스런 음향이다. 춤꾼들은 신음이 새어 날 정도로 몸을 과도하게 던지고, 비틀고, 떨어뜨린다. 최지연의 군무는 에리카의 군무처럼 정교하게 정돈되어 있지 않다. 사람들은 되는대로 서있고, 되는 대로 움직이며, 되는 대로 뭉치거나 흩어진다. 한쪽에선 인형을 갖고 마음속의 앙금을 풀어내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그와 무관하게 미친 웃음을 웃거나 뛰어 다닌다. 이런 카오스는 마치 마음을 중심에 놓고, 상처받고 얼룩진 마음을 풀어내기 위한 제의적 짓거리에만 관심이 있지 그러는 동안 눈물, 콧물이, 내 팔다리가 어떻게 엉망으로 보이는지는 염두에 두지 않는 것처럼 무심하고 어지럽다.
이전까지의 최지연 작품에서 이런 미분화된 무질서 덩어리를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 무질서가 용인될 만큼의 감정적 정화가 일어나지 않았기에 마지막에 가서는 그 정체감(停滯感)을 감당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번 <높새바람> 후반부에서 모진 세월을 견뎌온 민초들의 어쩌지 못한 그 마음 그대로 인 듯, 굿 음악과 함께 모든 그간의 어설픈 짓을 초월한 어떤 ‘배김새’와 배김의 반동이 온몸으로 터져 나오는 ‘튕김’과 어떤 춤이라고 정형화시킬 수 없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나는 그간 한국춤에서 단편화되어 묘사될 뿐인 ‘한(恨)’은 보았으나 이렇게 날 것 그대로 마구 터져 나오는 이런 울림-굳이 恨이라고 이름 붙여도 무방한-을 경험한 적이 없다.
땅이 울리는 것처럼 진동에 어지럽다. 그 울림이 가슴을 쪼개며 머리로 터져 나온다. 마치 화산폭발과 같은 이 울림, 이 울음의 진원지는 무엇이란 말인가?
시인 이상 옛집 터 공연
기사 국민문화유산신탁이 첫 매입사업으로 ‘이상의 옛집터(종로구 통인동)’를 매입하여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이상이 3살부터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20여년 간 말하자면 생의 대부분을 보냈던 이 집을 기념관으로 개축하고 있는 와중에 이상을 기리는 프로젝트 매주 진행중이다. 지난 14일에는 연극 연출가 이지훈의 <오감도>가 공연되었다(2011. 5. 14. 통인동). 소박한 기와 지붕과 기둥만 남은 20여평의 옛집은 마당과 장독대로 올라가는 계단을 제외하면 몇 사람이 서서 담소를 나눌 정도로 협소하다. 우연히 구한 간이의자를 놓고 올라서 백열등이 켜진 가장 안쪽에 방이었던 듯한 공간과 마루, 겸손하게 덮힌 나지막한 기와와 그리고 문앞 도로에서 볼 수 밖에 없는 한 줌의 관객들을 바라보는 것이 새롭다.
첼로의 울림이 이 모든 낯설고 어수선한 광경을 부드럽게 감싼다. 5명의 배우들(1명의 무용수-오영훈)이 검은 색 옷을 입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가까이 있는 관객 사이를 유영하면서 ‘오감도’를 몸과 몸 사이에서 새롭게 불러낸다. 움직임은 점차 격렬해지고 엉키거나 겹치는 와중에 ‘오감도 시제 1호’가 음유되고 이상의 시가 지금의 배우들의 몸에서 터져 나와 어느새 멀쩡히 우리 곁에 있는 게 놀랍다.
가장 안쪽 공간인 방의 벽과 작은 창을 배경으로 터져 나온 몸짓은 어느새 과장된 실소(失笑)로 이제까지의 모든 행적을 태워 버린다. 詩가 흐르는 가운데 장독으로 향하는 마당길(임시적으로 철망구조로 터널처럼 뚫렸으나 막힌 구조를 갖고 있는)을 천천히 걸으며 춤을 추는 여린 듯 오영훈의 존재가 철망을 사이에 두고 환영처럼 잡히지 않는다. 아련히 계단을 낮게 오르는 몸짓이 사라져 가는 이상의 고독처럼 뜨겁다.
집이라는 공간이 갖는 존재에의 밀착력과 검은 몸짓들, 그 사이에 메워져 있는 첼로와 싯구가 우리의 지금으로 ‘오감도의 李想’을 만질 수 있는 것으로 보여준다. 제1의 아이든, 제 5의 아이든, 그것이 13명이든 33명이든, 그 아이들이 무섭다 그러든, 그 아이 자체가 무서운 아이든, 도로로 질주하려 하든, 막다른 골목에 갇히든 아무 상관 없었듯이 그저 검은 몸뚱이들의 질주와 무서움이 시와 소리와 더불어 서로 아무 상관없이 지붕에 얹힌 자, 모음 파편처럼 통인동 거리를 부유하였다.
움직임을 시와 적절히 융합한 이지훈의 솜씨는 작위적인 어색함이 없어 편안하게 관객을 몰입시킨다. 많은 춤이 이상의 시를 모티브 삼았지만 어찌보면 같은 원류를 가진 시와 춤이 의외로 이질적으로 겉돌거나 그저 난해하기만 했었다. 그러나 이지훈의 손길을 통하자 싯구와 같은 몸짓은 춤이 되기에 충분하고, 첼로의 음률은 시의 배열을 닮은 채 시인의 삶의 터에서 관객 가까이 따뜻하고 친절하게 부활하였다.(전재: 몸, 2011.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