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한국무용제전
신화, 예술적 해석으로 창작자의 시각 담아야
김채현_춤비평가

지도를 펼치고 한반도에서 서북쪽 몽골로 가서 멈춘 채 시선을 더 북쪽으로 이동해보면면 바이칼호수가 있다. 샤먼 신화 연구가들은 그 바이칼호수를 한민족의 시원지(始原地)로 지목하는 가설을 내놓곤 한다. 바이칼호수 심저부에서 뜨거운 온천이 흘러 그 옛날 빙하기에도 사람들이 살았고, 해빙기에 어마어마한 홍수가 범람하여 그곳 사람들이 동남진해서 일부가 한반도로 이주하였다는 설이다.

 이를 방증(傍證)하는 것으로는 무엇보다 한반도의 샤머니즘이 들어지고 다른 유사한 민속도 덧붙여진다. 바이칼 낱말에서 ‘바이’가 샤먼을 지칭하는 시베리아 말이며, ‘칼’이 ‘골’과 인접한 말로서 넓은 계곡이나 호수를 뜻한다고 해서, 바이칼을 샤먼의 호수라 풀이하는 것도 매우 납득이 가는 설명이다.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최근 연구 성과들을 대하다 보면 일례로 풍수지리를 비롯하여 우리 문화와 관념에서 뿌리와도 같은 샤머니즘과 신화를 새 각도로 보게 된다.

 한국무용연구회의 한국무용제전은 올해 주제를 ‘춤 신화(神話)전’으로 하여 모두 아홉 작품을 올렸다(4. 19~25. 아르코예술극장).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의 이 행사 외에도 올해 제전은 한국무용연구회의 30주년 기념전과 소극장 프로그램으로 젊은 안무가의 아홉 작품을 선보인 ‘댄스 초이스 셀렉션’을 함께 열었다. 이들 행사 가운데 올해 제전의 초점이었던 것은 신화를 주제로 한 대극장 프로그램이며, 특히 한국무용제전은 2008년부터 이를 주제로 해서 열어왔다.

 샤머니즘을 비롯하여 설화나 신화 시대의 흔적이 우리의 전래 춤에 유전자처럼 각인되어 있다는 설명은 오늘날 한국춤에도 그런 성질이 배어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러므로 샤머니즘이나 설화 어디서 출발하든 간에 ‘춤 신화전’처럼 우리 춤의 유래를 원초적 시공간에서 재발견하려는 체계적 시도는 의미 있는 기획이다.

 올해 ‘춤 신화전’에서는 판도라의 상자, 그리스의 페르세포네나 카오스 신화, 가락국의 구지가(龜旨歌), 신라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 바벨탑 등을 소재로 중견 안무가들이 창작품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소재들이 우리 춤들에서 드물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이를 춤 제전의 주제로 삼고 여러 안무가들이 집중 조명하는 점에서는 일반적인 춤 행사와 다른 의미를 갖는다. 게다가 평상시 담론들에서 춤과 민족성 내지 민족 체질의 상관관계룰 더러 강조하는 한국무용 입장에서는 흥미를 재촉할 행사임이 분명하다.

 설화(說話)는 신화와 전설, 민담을 포괄하며, 이번 제전은 신화뿐 아니라 설화의 범주에 속하는 것을 모두 망라한 가운데 신화를 주제로 내세웠다. 그러므로 이번 제전의 주제가 설화로 내세워지는 것이 더 합당하다는 감도 들지만, 어느 쪽을 취해도 신화 그리고 설화에 함축된 어떤 원형질을 한국춤으로 해석해서 창작한다는 제전의 취지는 그대로 통한다.

 문화 원형질은 생리물리적 측면과 관념적 측면으로 나누어 개념화될 수 있을 터인데, 이번 제전의 작품들에 비추어 안무자들은 관념 측면에서 신화소(神話素)를 춤으로 해석해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미영의 <뿌리 없는 나무 그늘>이 제주 설문대할망 이야기를 소재로 오늘날 자식들의 극단적 이기심에 메스를 들이대는 것이나 한윤희가 페르세포네의 처지를 어루만진 <동(冬) 살푸리>를 비롯하여 ‘춤 신화전’은 우리들을 다양한 신화 세계와 접속시킨다.

 연오랑 세오녀 설화는 신라인들의 태양 찾기 이야기이면서 일본의 태양 신화와 결부하여 최근에는 고대 한일 문화교류 측면에서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설화로는 익히 알려졌던 데 비해 그것이 춤에서 형상화된 경우는 아마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김미숙이 <하늘 섬>에서 빛을 잃은 상황을 화두로 빛을 찾아 생명을 회복하는 세상을 그릴 적에 바탕을 둔 것은 연오랑 세오녀 설화였다. 말하자면 고대 설화를 오늘의 문명을 진단하는 방향으로 확대해서 이를 춤에 대입시켰다. 이미영이 앞서 언급된 대로 메스를 들이댄 것 역시 유사한 맥락의 접근법이다. 설화를 오늘의 상황에 대입하는 일은 다반사이고, 두 가지 예가 잘 드러내듯이 설화는 이야기 형태의 고전으로서 새로운 이야기로 재탄생될 소지를 안고 있는 그런 것이다. 설화를 갖고 구체적 역사나 현실을 되짚어내는 작업은 역으로 설화의 깊이를 상징한다.

 제우스가 그토록 열지 말라고 한 상자를 열어버린 판도라의 경솔한 호기심은 인간 불행과 재앙의 근원이었다. 과학의 논리를 넘어서버리는 신화와 전설은 삶에 대한 깊은 은유 덕분인데, 판도라의 상자가 삶에 대한 교훈으로서 보편성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임현선의 <시크릿 박스(비밀의 상자)>가 열어 보인 판도라의 상자 역시 욕망의 덩어리였다. 사람들의 그림자가 뒤엉킨 실루엣이 비춰지는 사각 박스를 열어젖히자 인간 군상들이 쏟아지고 그들의 움직임은 욕망의 그것처럼 메마른 몸부림의 연속이었다.

 한윤희의 <동(冬) 살푸리>는 페르세포네를 위한 진혼무였다.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를 도와 꽃을 피우는 역할을 하는 페르세포네의 미모에 반한 하데스가 그녀를 저승으로 납치한다. 제우스의 명으로 하데스가 다시 페르세포네를 이승으로 데려주게 되자 기쁨에 들떤 그녀가 석류알을 먹은 탓에 1년에 석 달은 저승에 있어야 한다는 페르세포네의 운명은 겨울에 식물이 자라지 않는 자연의 이치를 상징한다. 이와 같이 과학의 논리를 인간의 행위 논리로 대체하는 것은 신화가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요소가 된다. <동(冬) 살푸리>에 설정된 사각의 조명 박스는 지하 세계를 암시하고 그 속의 연기자들은 저승의 혼령들에 해당한다. 그들의 절규하는 칼바람 같은 몸짓들은 페르세포네의 그것이면서 혼령들의 다물어지지 않은 숨결로 남는다. 그래야 다시 봄이 오지 않겠는가.

 전남 화순에 소재한 운주사(雲住寺)는 불상과 불탑이 각각 1천기나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사찰이다. 한 사찰에 천불천탑(千佛千塔)이 모여 있었다는 이야기부터 상식을 넘어서는 호기심을 촉발하고 운주사의 신심을 신비스럽게 여기도록 한다. 그래서 대규모 사찰이지만 창건 기록부터 모호해서 운주사가 언제 어떻게 왜 창건되었는지 추론들이 분분하다. 지금 불상과 불상이 100기정도 남아 있는데, 이만한 규모라도 천불천탑의 신비를 뒷받침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김선미의 <월영 2011: 이공이선(異空異善)>은 운주사 설화 속에서 노니는 춤이다. ‘또 다른 비움과 또 다른 착함’으로 풀이될 부제에서 시사받는 것처럼 <월영 2011>은 운주사 설화에서 자기대로의 자유로움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김재철 등의 고즈넉하며 편안한 현장 타악과 관악 반주에 맞춰 하얀 색의 넉넉한 바지저고리를 걸친 김선미가 독무를 추는 가운데 세 사람의 연기자가 보조를 맞춘다. 이 춤은 김선미가 1998년 <천불탑 월영> 이후 천불탑을 소재로 한 아홉 번째 작품이듯이 김선미는 오래 전부터 천불탑 설화에 마음을 두었다. 지금의 100기 불탑들이 놓인 분위기처럼 천불천탑이 운주사 계곡 곳곳에 흐드러지게 배치된 것에서 상상될 숱한 상념 가운데 김선미가 착안한 것은 자신의 불탑이다.

 운주사에는 좌불상은 물론 누운 부처도 있고 돌벽에 기대 세운 부처도 있다. 이 불상들은 모습에서 중후하되 자비로운 불상과는 아주 다르게 인체 비례도 제대로 맞지 않고 눈망울도 없이 눈금만 보이기가 흔하고 입금도 없이 콧날과 눈금만 새긴 부처도 있다. 말하자면 부처의 정형을 벗어난 이런 저런 모양의 불상들은 해학과 파격 속에서 어떤 순박한 인간미가 깊이 배어난다. <월영 2011>은 운주사에 얽힌 특정 전설을 단서로 한 것 같지는 않고 운주사 천불탑에서 유추됨직한 자유로운 초월을 김선미의 양식으로 형상화하였다. 바닥에 조명으로 그려지는 동그라미는 일차적으로 달을 연상시키며 춤이 진행될수록 삶 속의 초탈이 이뤄지는 공간으로 확대된다. 부드러움과 날렵함을 오가며 펼쳐지는 김선미의 춤사위는 동그라미 테두리 속에서 때로는 나비로, 때로는 불심으로 다가온다. 2011년 한국무용제전에서 <월영 2011>은 설화를 자전(自傳)의 춤으로 강조한 점에서 신화 해석의 시각이 두드러진 경우로 들어진다.

 신화는 핵심 신화소를 갖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이 분분하기 일쑤이다. 그러므로 진실 게임 같은 작업이 수반되는 것은 신화 해석에서 예사이며, 이 점에서 구지가도 예외는 아니다. 잡귀를 쫓거나 우두머리를 내놓아라 하는 집단 주문, 혹은 신맞이 굿의 희생 공물 노래 아니면 성적 욕구의 발로 등등으로 해석은 매우 엇갈린다. 이 모든 해석이 틀리거나 다 맞을 가능성을 갖는 것이 신화의 속성이기 때문에 지적인 탐색은 가중된다. 백현순의 <구지가>는 거북신을 전래의 삼신과 연결해서 오히려 오늘의 욕망을 비판하는 입장에 선다. 그 옛날 거북 제의를 벌이던 사람들이 욕망 덩어리로 돌변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삼신 사상을 축으로 굿춤을 벌이는 것은 <구지가>가 잡귀 쫓기에 해석의 초점을 맞추었음을 나타낸다.

 <구지가>를 비롯하여 <하늘 섬> <동 살푸리> <뿌리 없는 나무 그늘>은 집단무들에서 한국춤의 다양한 구도와 조형을 보여주었다. 또한 이들 작품은 이번 ‘춤 신화전’에서 옛 신화소를 작품 소재로 발굴해내는 한편 그것에 오늘의 시각을 투입하는 접근법을 보였다.

 전체적으로 올해 ‘춤 신화전’은 앞서 언급했듯이 신화를 관념의 측면에서 재조명하였다. 흔히 소개되는 바로서, 일례로 우리의 춤 동작에서 발 구르기나 어깨 들썩이기가 접신(接神)의 경지를 상징하며, 이 현상은 샤머니즘의 유전으로 수용됨직하다. 이와 같은 유전질 때문에 춤과 신화(예컨대 샤머니즘)는 그 연관성이 더 설득력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 춤의 정신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구체적인 답으로서 춤사위가 거론되고, 그것이 부분적으로 신화 세계와 연결된다는 논리가 통용된다. 일단 만들어져 양식으로 굳은 춤사위는 본래 연원을 떠나기 마련이지만, 그에 담긴 정신은 강조될 수 있다. 이번 제전에서 ‘우리 춤사위에 담겼을 신화적 관념’이 작품 소재로 간과된 것은 특히 아쉬운 점이며, 작품들이 신화에 대한 안무가의 해석보다 해설에 치중함으로써 제전의 의의가 제한되었던 점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전재: 한팩 리뷰, 2011. 6.)

2011. 06.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