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08년 5월 17일 서강대 메리홀에서 조기숙의 <백조의 호수․사랑에 반(反)하다>를 관람했을 때 그 한편으로 끝인 줄 알았지 그것이 그 후 매년 이어지는 장정의 서곡일 줄은 짐작치 못했다. 2009년 5월 <백조의 호수 II․사랑에 취(醉,取)하다>, 2010년 역시 5월 <백조의 호수 III․사랑에 빈(貧,彬)하다>에 이어 올해 <백조의 호수 IV․사랑에 통(痛․通)하다>(2011.5.12-13 이화여대 ECC 내 삼성홀)는 1년에 한 막 씩 올려 4년간에 걸쳐 완성한 길고 긴 4막의 발레극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간 풍성한 화제를 나으며 관객들에게도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고 그 자체가 한국 발레사, 나아가 무용사에 한 사건이었다.
부제에서 보듯 지난 네 편의 작품 모두가 일관되게 추구한 주제는 사랑이었다. 안무자 조기숙이 피력한대로 I편에선 공주 오데트와 왕자 지그프리트가 서로에게 반함을, II편에선 그들이 사랑에 취함을, III편에선 마왕들과 마녀의 훼방으로 그들의 사랑이 빈해짐을 그렸다. “인간은 결국 고통을 통해 성숙한다”는 그녀의 지론대로 IV편에선 고통을 통해 영혼이 통함을 그렸다. 그런 상태란 마음과 몸이 통합되고 나와 네가 합일되어 그 어떤 것도 포용할 수 있는 무한의 경지를 이름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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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자는 각 편의 내용을 더욱 축약해 한 단어로 I편에선 물질(Matter/Physical World), II편에선 생명(Life), III편에선 마음(Mind), IV편에선 영혼(Spirit/Soul)을 그리고자 했음을 밝혔다. 4년간에 걸친 조기숙의 <백조의 호수>는 본인이 해석하는 사랑의 진화 과정이었다.
이번 작품은 그녀가 선언한대로 완결편이고 또한 이화여대 개교 125주년 기념공연이어서인지 연출과 안무, 출연자들의 춤에 더 깊은 정성을 들였고 <백조의 호수>가 갖는 환상성(Fantasticality)과 몽환성(Dreams and Phantasms)의 미학을 더욱 짙게 살렸다. 예로 아름답고 신비스럽게 조각된 천수관음(千手觀音)을 연상케 하는 도입부 11명 군무의 환상성이 독무, 프리마 발레리나(Prima Ballerina)와 남자주연무용수(Danseur Noble)의 2인무, 또한 군무에도 같은 맥락으로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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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IV편은 특별한 이벤트를 삽입하고 소도구를 사용했던 전편들과는 달리 춤에 승부를 건 탓인지 출연자들은 60분 내내 춤에 몰입했다. 이번 공연에서 유일하게 사용된 무대 장식인, 천장에서 길게 드리워진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조정희와 정이와가 춘 2인무, 정이와의 독무가 돋보였고 조금 길다는 느낌을 주었으나 일본녀인 시도 히또미의 독무 또한 정겨웠다.
역시 압권은 노련함을 갖고 자신감 있는 춤을 보여준 중견 조정희(전 유니버설발레단 주역무용수)와 정주영(전 국립발레단 주역무용수)의 계속 이어진 2인무로 둘이 이루어내는 앙상블이 관객들의 숨이 멎을 것 같은 아름다운 장면들을 연출했다. 지난 세 편에서 간판 역할을 한 한혜주는 이번 공연에서 마왕의 딸 오딜 역으로 출연해 흑조로서 정주영과 2인무를 추었다. 한혜주는 성품이 특히 착하기에 그녀의 이번 춤에 대해 흑조로서는 다소 약하고 어색하다는 느낌을 가졌으나 다른 관람객들의 생각은 달라 그녀의 춤이 단연 돋보였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았다.
마왕으로 홍세희와 이번에도 역시 카메오 출연으로 정윤주(주․MetLifeinsurance 지점장), 정창권(주․휴넷 이사), 파트리스 파비스(Patrice Pavis/프랑스인. 연극학, 문화통섭학․Interculturalism의 석학)가 나와 오데트와 지그프리트의 사랑에 마구 훼방을 놀았다. 조기숙의 <백조의 호수>는 “사랑이란 장애와 시련을 극복하고 나서야 이룰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고 마왕이 장애와 시련을 상징하기에 마왕이 없으면 사랑의 본질을 알 수가 없고 작품이 성립될 수가 없다. 따라서 마왕들은 7-8분 등장하지만 그들 또한 주역이다.
마음 속 내면에선 그들 또한 공주 오데트를 은근히 갖고 싶어 하는 남자 마왕들은 공주와 왕자의 사랑을 질투하는 나머지 그녀를 고립시키고 여자 마왕들은 아예 왕자 지그프리트를 유혹하고 혼미케 한다. 시선과 스텝(Step)과 동선의 연기였지만 마왕들은 작품의 격을 높였다. 정윤주, 정창권은 2번째 출연이라 그러한지 튼실한 연기에 카리스마가 묻어났고 파트리스 파비스도 연극학자의 이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마지막 부분에서 수많은 고통과 시련을 통해 지고의 사랑에 통한 조정희가 초월적인 춤을 추다가 모든 출연자들이 나와 환희의 춤을 춘다. 이번에 출연한 발레리나들(장지혜, 김정은, 권현화, 정선미, 조한나, 봉우리, 서민영, 손예운, 이민경, 이정수, 정수민)은 이화여대 무용학과 석사과정 내지는 학부 재학생들로 모두가 빛나는 한 마리 백조였고 조기숙이 늘 주장하듯 출연 발레니나 모두는 주인공이자 공동작업자였다. 끝으로 사랑의 승화를 암시하는 정주영과 조정희의 리프트(Lift․Elevation)의 기량이 펼쳐지며 대단원의 막이 내렸다.
지난 4년 간 공연된 조기숙 뉴발레 <백조의 호수> 네 편에서 몇 가지 특징들을 찾아낼 수 있다.
첫째, 조기숙은 몸과 발레에 대한 나름의 확고한 신념과 철학을 갖고 있다. 그녀는 인간은 몸 자체이며 인간이 죽는 날까지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실체는 몸이라고 생각한다. 예술도 춤도 경영도 몸이 없으면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또한 몸에 대하여 몸이 맘이고 맘이 몸이라는 몸과 맘의 일원론을 신봉한다.
그녀는 발레에 대해 다음과 같은 믿음을 피력한다. “난 발레의 가벼움이 좋고 하늘 지향적인 것이 좋다. 몸과 마음을 비우고 가벼워서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는 초월적 개방성이 발레에 있다... 난 춤의 힘으로 세상을 좀 더 부드럽고 따스하게 만들고 싶다... 발레 자체를 온 몸으로 느끼시고 영혼으로 감상하시기 바란다.” 그녀는 발레에 대한 긍지를 넘어 발레지상주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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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이와 같은 일련의 발레 공연은 한국의 발레계에서는 큰 실험이었고 전위(Avant-garde)였다. <백조의 호수>의 재창작을 그녀 자신은 ‘다시 쓰기’라 표현하고 4 년간에 걸쳐 매 편 다시 쓰기를 했고 비보이를 등장시키는 과감성을 보이기도 했다.
필자는 I편의 공연 평에서 파격, 재창작,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표현을 쓰며 189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서 마리우스 프티파와 레프 이바노프에 의해 공연된 이래, 지금까지 내려오는 고전 <백조의 호수>도 당시로서는 파격이었고 그 이전 작품을 수정하여 재창작한 작품임을 환기시킨 바 있다. 또한 매튜 번(Mattew Bourne)의 <백조의 호수>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아무런 거부감 없이 수용됨을 말한 바 있다.
셰익스피어 연극의 경우는 수많은 개작과 번안, 현대적 해석과 실험이 시도되는 것에 사람들은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조기숙이 고전 발레의 다시 쓰기를 시작하자 처음엔 반발하는 발레무용계 인사도 있었고 심지어 비난까지 일었으나 4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사고의 지평을 넓혀주며 우리 발레무용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고 이제는 고전 발레 다시 쓰기가 일반화하고 있다.
셋째, 마왕으로 I편에 4명, II편에 6명, III편에 3명, 이번 IV편에 3명의 경영인을 출연시켰다. III편과 IV편에는 여자 마왕도 등장시키는 파격을 보여줬다. 공연예술과 기업경영에 있어 궁극적인 핵심은 창조활동이다. 공연예술에 있어 작품을 선택하고 연출, 안무, 홍보를 포함한 마케팅, 관객의 창출과 확보는 경영에 있어 제품의 선정, 상품 마케팅, 고객 창출과 이치가 같다. 기업경영에서도 기존의 가장 안전한 방법을 따르는 것이 무난하지만 결국은 혁신과 재창조가 필요하다. 공연예술도 마찬가지다. 참가한 경영인들은 공연예술을 실제 체험하며 많은 것을 얻고 공감하였다고 술회한다. 특히 정윤주는 큰 보람과 함께 여러 가지 도움 되는 효과를 얻었다고 했고 정창권은 작품의 스토리텔링까지 쓰면서 발레 <백조의 호수> 사랑에 깊게 빠졌다.
넷째, 국제화시대에 걸맞게 외국인들을 출연시켰다. I편에는 트리니다드 토바고 태생의 런던 거주 음악무용 인류학자 안드레아 헥터 왓킨스(Andrea Hector-Watkins)에게 음악감독을 맡기면서 또한 역을 주어 출연시켰고 III편에는 지그프리트 역의 발레리노로 전 유니버설 발레단의 무용수였던 조슈아 루크 퓨(Joshua Luke Peugh)를 내세웠다. 이번 IV편에선 프랑스인 파트리스 파비스와 함께 안무자가 가르치는 학부 재학생인 일본인 유학생을 출연시켜 독무의 역을 주었다. 한국에서 조기숙으로부터 배운 일본인 제자에게는 귀중한 경험이 되었을 것이며 한국의 무대에 섰던 일은 훗날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간직되리라.
다섯째, 조기숙은 <백조의 호수> I편에서 III편까지 경영인들을 마왕으로 출연시킨 경험과 결과를 토대로 ‘향상되는 창의성-무용체험이 경영인의 창의성 향상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대한무용학회 학술지 제66호>) 발표했다. 경영인이 발레무용예술을 체험한 것이 그들의 창의성을 향상시키는 데 실제로 효과적이었음을 밝히는 연구 논문이다. 그녀가 구술사 연구방법론에 의해 논문을 작성했다는 얘기를 했을 때 요즘 통계학적 계량분석에 의한 실증연구(Empirical Study)에 익숙한 주변의 학자들은 의문을 가졌었다. 그러나 막상 그녀의 논문을 읽어보면 여타 논문에 못지않게 연구 방법과 이론의 전개가 탄탄하고 내용과 기술이 논리정연함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늘 공연하기 전 무대에 올라 관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작품에 대해 설명을 했던 일이나, 매 작품 제목에 한글로는 한 글자이지만 이중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동음이어(同音異語)의 한자 두 자를 사용했던 점도 특이했음을 지적할 수 있겠다. 늘 우리가 접하던 한정된 무용 관객과는 달리 폭 넓은 연령대, 여러 계층, 다양한 부류의 관객이 극장을 가득 메워 춤비평가들이 놀라곤 했던 점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