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몸이 나서는 춤에는 물론 성(性)이 수반된다. 박명숙의 춤 <윤무>는 성을 ‘의도적으로’ 겨냥한 점에서 남다르고, 성이 수반되는 춤 가운데서도 성을 생각게 하는 춤이다(3. 24. ~ 4. 3. 아르코 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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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무(輪舞)는 일반적으로 원무(圓舞)와 마찬가지로 둥글게 서서 추는 그런 춤으로 풀이되곤 한다. 이와는 좀 다르게, 이번 공연에서 윤무는 사슬처럼 연결되듯이 펼쳐지는 그런 과정을 의미한다. 릴레이에서 주고-받고-주고-받고 행위가 반복되듯이, <윤무>는 전혀 다른 남녀들이 성을 매개로 관계를 잇고 그것을 다시 반복하는 구조를 취한다. 여기서 인간들은 서로 성관계로 얽히고설켜서 성 속에서 헤매는 것이 매우 습관적인 그런 부류들이다.
<윤무>는 오스트리아 작가 A. 슈니츨러의 19세기말 희곡 <라이겐(Reigen; 윤무)>에서 제목을 따온 동시에 그 내용을 축으로 한다. 말하자면 <라이겐>이 춤 <윤무>의 원작인 셈이다. 슈니츨러의 <윤무>는 창녀와 군인, 그 군인과 어느 하녀, 그 하녀와 젊은 남자, 그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 그 젊은 여자와 남편, 그 남편과 귀여운 소녀, 그 귀여운 소녀와 작가, 그 작가와 여배우, 그 여배우와 백작, 그 백작과 창녀 관계를 차례차례 이어가며 10개의 대화로 구성하였다. 춤 <윤무>는 이 순서를 충실히 쫓으며 10개의 에피소드를 춤으로 해석하였다.
1897년 슈니츨러가 <윤무>를 발표할 당시 오스트리아 비엔나는 실제 내막은 성뿐만 아니라 생활 자체가 매우 방일(放逸)한 도시였다. 지금은 조그만 나라 오스트리아라지만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에 걸쳐 있던 합스부르크 대제국의 말기에, 말기의 제국들이 대개 그랬듯이, 대제국의 수도 비엔나에서는 퇴폐와 도피가 그득하였다. 그때 그 상황대로 성은 타락하였고, 그런 타락상을 슈니츨러는 <윤무>에서 적나라하게 묘사하였다. <윤무>는 당시 사회에서 포르노그래피로 낙인찍힌 희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불안감과 인간상을 날카롭게 들춘 수작(秀作)으로 평가받은 지 오래다. 세기말의 그 쇠퇴기에 일례로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 같은 화가들이 위선(僞善)의 속박을 뚫고 에로틱한 환상을 담았던 그림들은 공공 도덕과 불화를 일으켰으며 당시 부르주아들은 사회 안정을 해칠 도발이라 하여 억눌렀다. 프로이트가 성과 자아, 억압의 관계에 주목하고 정신분석학으로 이론화하던 것도 모두 그 시기의 일이다. 그의 정신분석학이 비엔나의 위선이 낳은 산물이라면 지나친 해석일까.
박명숙의 손에서 나온 춤 <윤무>는 슈니츨러의 희곡에 그려지는 퇴영적 풍속을 지금 우리 주변으로 옮겨놓는다. 시대 배경이 다른 대신 내용 흐름에서는 대동소이할지라도 두 작품은 희곡과 춤이라는 서로 다른 장르적 특성에 따라 전혀 다를 수 있다. 일례로 춤 <윤무>에서 수시로 등장해서 성행위를 암시한 움직임들이 연극에서 그렇게 형상화될 것 같지는 않다. 만일 연극에서 그렇게 형상화된다면 그 연극은 아마도 신체극으로 재명명되어야 할 것이다.
연극에서 성행위 장면은 암시될 수 있을 것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 실제 성행위의 그런 동작을 재현할 가능성이 춤에 비해 높다. 춤은 매체 자체가 움직임이고 또 움직임 즉 동작의 폭이 넓기 때문에 그렇게 재현하는 방식이 대개는 배제된다. 아니면 이번처럼 한 쌍의 춤꾼들이 바닥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엉켜드는 것이나 몸이 밀착하는 것처럼 활용될 수 있겠지만, 이에 안주할 경우 춤이 가질 특성은 상당히 위축되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 춤 <윤무>는 성행위를 재현하기보다는 다양하게 암시하기 때문에 성을 매개로 관계를 맺는 남녀 한 쌍의 움직임 가운데 어디까지가 성행위인지 선을 그을 수 없는 움직임들이 다수 형상화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곧 연극에서의 재현과 춤에서의 추상 사이의 차이가 드러난다. 게다가 성행위와 성관계를 구현하는 측면에서 춤은 이번처럼 온몸을 매우 물질적으로 동시에 감각적으로 내세울 수 있으므로 춤은 희곡을 능가하는 어떤 지점으로 나아가게 된다.
춤 <윤무>가 5쌍의 10가지 대화를 형상화하는 주 매체는 움직임과 대사였다. 연극 배우가 맡은 해설자는 부분 부분 대사를 간략하게 읊어 작품 진행을 도왔으며, 무대는 침상 구실을 함께 하는 테이블이 놓이고 가정집 현관을 암시하는 계단이 설치되었다. 전반적으로 작품을 주도한 것은 서서나 누워서나 현대춤의 격렬하거나 힘을 수반한 견고한 움직임들이다. 이런 움직임들은 그 특성상 퇴폐 내지 타락의 정도를 강하게 드러내면서 등장인물들이 충족되기를 갈구하는 욕구를 대변하였다.
정유라, 정재연, 이수윤, 강요섭, 진병철, 배준용 등 9명의 춤꾼들은 잘 다듬어진 움직임으로 성을 격식 있게 겨냥해보였고, 정유라․정재연․이수윤의 에로티즘에 근접한 춤 연기는 <윤무>를 이끄는 활력소였다. 그렇더라도 <윤무>는 에로티즘에 맴돌지 않고, 성이라는 본능적 욕구를 에로티즘으로 표현해나가는 한편으로, 그것을 섹슈얼리티 해석의 시각으로까지 진전시키는 점으로 다시 부각된다.
<윤무>에서 전개되는 10가지의 성관계는 사회적 관계인 동시에 인간적 관계이기도 하다. 안무자가 더 높은 비중을 둔 쪽은 사회적 관계이며, 신분을 나타내는 의상도 등장인물마다 다르다. 이런 관점에서 다시 생각하면, 10가지의 성관계에 유발되는 10가지의 에피소드가 춤 측면에서는 변별력이 크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10 가지의 에피소드는 전개 구조상 10개의 장에 해당하며, 그들 각 장을 구분하는 기본 방법은 장면(일테면 무대 배경)을 바꾸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수시로 장을 갈아치우는 것은 산만하고도 번거로울 것이 예상되어 굳이 그렇게 할 일이 아니라면 이번처럼 무대 배경과 구조가 거의 바뀌지 않는 상태에서 10개의 장을 구분해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각 에피소드마다 춤에서 변별성을 갖는 일이 아닐까 한다. 신분과 역할에 따라 성행위가 어떠해야 할 것이라 지정하긴 어렵지만, 신분과 역할에 따라 성관계 다시 말해 적어도 사회적 관계에서는 차별성이 있을 것이고 10가지의 에피소드가 설정될 만한 이유도 그런 차별성에서 기인할 것이다. 이런 뜻에서 <윤무>의 각 에피소드는 저마다 있을 수 있는 분위기나 성행위를 둘러싼 과정과 관계가 먼저 사회적 관계 측면에서 그리고 인간적 교감의 측면에서 여타 에피소드에 비해 다른 개성을 더 뚜렷하게 갖춰 작품 흐름에 기복 혹은 변화 있는 리듬감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
성욕과 식욕이 결부된다는 믿음은 정설(定說) 아닌 정설이다. 브리야 사바렝이 먹는 것을 알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듯이 대개들 식욕과 성욕은 닮은 데가 있고 심지어는 밀접하다고 믿는다. 춤 <윤무>는 춤으로서는 드물게 성을 음식에 관한 상식과 연관시킨다. 이러한 상식을 예술로 끌어들여 다시 담론으로 제시하는 것은 작품을 상대할 흥미를 재촉할 것이고 상상력을 자극할 가능성도 높아 보여 중요해 보인다. 안무자 박명숙은 사과를 선악과로서 붉은 토마토와 동일한 차원에서 색욕과 탐욕의 상징으로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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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 <윤무>에서 음식을 등장시킨 도입부도 그러한 취지로 설정되었을 테고, 하녀(정재연)가 입에 사과를 물고 병사(강요섭)와 농밀하게 벌이는 애정 행각은 그 같은 상징성이 매우 선명한 동시에 인상 깊게 처리되었다. 이에 비해 작품 도입부에서 해설자의 대사를 통해 특히 강조되었던 음식은 사과를 빼놓으면 도입부 이후 역할이 미약하다. 사과를 음식의 상징으로 여길 수 있어도 도입부 이후 <윤무>의 전반적 흐름에서 식욕과 성욕 사이의 알레고리는 잘 감지되지 않는다.
<윤무>의 말미에 백작의 자탄(自歎)에 빠진 독백에 이어 짙은 안개 속의 질풍이 몰아치며 접시가 휘날리고 성 행각들이 벌어진 무대는 갑자기 어지러운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작품 서두의 만찬장에서 뷔페 공간의 그것처럼 잠깐 등장했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휘날려지는 접시들은 사과와 함께 성욕을 반영한 오브제이다. 처음에 등장한 접시가 작품 끝에서는 어떤 단죄에 대한 표식으로 돌변하는 것은 숨은 그림 찾기 같은 유희로 받아들여진다. 최후의 심판을 연상케 하는 이 부분이 <윤무>에서 벌어진 갖가지 퇴폐와 일탈, 즉 사랑이 소비되는 오늘의 세태에 대한 고발로 읽혀지는 것은 물론이고 춤 <윤무>가 섹슈얼리티를 해부하는 작품이라는 점을 각인시키는 데 큰 구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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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적 에로티즘이 소비될 경우 포르노로 변질될 것이다. 에로티즘과 포르노그래피에서는 상대방의 몸을 대하는 속내부터 달라 겉모습은 유사할지라도 제각각 전혀 이질적인 몸들이 작동한다. 춤 <윤무>는 섹슈얼리티 해부 차원에서 위선적인 포장을 벗겨 오늘의 빗나간 에로티즘들에 메스를 가하였다. 에로티즘을 사회적 행위로 부각시키면서 그 왜곡상을 되짚는 <윤무>에서 격정적인 몸들도 사실은 소비재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윤무>는 춤의 보편적 속성인 성을 기반으로 춤 바깥의 어떤 현상 즉 섹슈얼리티에 접근하는 시각에서부터 독특하며 과감하였고, 이를 격식 있게 해부한 춤으로 특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