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그대로 남아 있거나 아니면 때때로 재해석되거나, 둘 중의 하나가 고전(古典)의 속성이다. 문학 해석에서 ‘작가의 죽음’을 강변함으로써 롤랑 바르트는 재해석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놓은 바 있다. 이런 급진적인 경우만큼은 아니더라도 대개 재해석은 창작의 한 방법으로 유용하다. 서울시무용단의 <백조의 호수>(세종문화회관 대극장, 4. 14~15.)는 고전의 재해석에 해당하는 작업이며, 그래서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와 유리될 수 없다.
재해석 작품으로 꽤 이름난 매튜 본의 1995년작 <백조의 호수>가 재해석과는 무관하게 매튜 본의 것으로 수용될 수 있다지만, 이미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를 알고 있는 한에서는 매튜 본의 작업을 그것에 국한해서 수용하지 않는다. 가령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가 아예 없었고 그래서 차이코프스키라는 사람이 20세기 후반에 살며 작곡했고 그가 작곡한 음악을 소재로 1995년에 매튜 본이라는 사람이 남성 수컷 백조로 <백조의 호수>를 세계 최초로 발표한 상황을 상상해보자. 이럴 경우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가 가질 파격성은 현저히 줄고 그 의미가 축소될 것이 뻔하며, 아니면 그의 <백조의 호수>는 영국 왕실의 행실과 잠재의식을 백조로써 패러디한 작품 정도에 머물 것이다. 1895년 러시아에서 초연된 이래의 <백조의 호수>들이 없었다면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허전해지기 마련이라는 점에서 고전은 추후의 재해석 작업들에 대해 보이지 않는 배경막 즉 일종의 격조 높은 병풍 구실을 한다.
서울시무용단의 <백조의 호수>는 한국춤을 기본으로 하므로, 일반적인 <백조의 호수>와는 처음부터 달라진다. 단적인 예로서 튀튀가 오히려 어색할 서울시무용단의 <백조의 호수>는 그러면 어떤 의상으로 백조들을 재현해야 하는가. 여느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와 서울시무용단의 <백조의 호수>가 같을 수 없을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또 서울시무용단의 <백조의 호수>는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 스토리텔링을 따르면서 이런저런 재해석을 덧붙였다.
이 점에서 서울시무용단의 <백조의 호수>는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의 한국춤 버전에 해당한다. 재해석의 의의가 큰 만큼 이번 공연은 조명되어야 하며, 공연 결과는 그것이 <백조의 호수> 버전들의 꽤나 긴 반열에 접근하려면 몇 가지 중요한 점부터 고려해야 함을 말해주었다.
비룡국 공주로서 아름다운 미모의 소유자 설고니, 마법과 주술에 능한 주술사 노두발수, 강성한 부연국의 지규왕자, 검독수리의 신령을 불러내 만든 피조물 거문조는 서울시무용단<백조의 호수>의 주요 캐릭터이다. 이들 등장인물이 고전 원작의 그들(오데트, 오딜, 지그프리트, 로트바르트)과 유사한 정체를 가질 것은 능히 짐작되는 일이며, 등장인물의 설정 단계에서 많은 영감을 제공하는 것은 고전의 매력이기도 하다.
감옥에 붙잡힌 설고니, 설고니를 한껏 조롱하는 거문조, 설고니에게 청혼한 노두발수를 내치는 설고니의 삼각관계는 서울시 <백조의 호수>의 제1장에서부터 펼쳐진다. 이는 이번 <백조의 호수>가 고전 원작의 틀거리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에 더하여 전체 5장으로 구성된 서울시 <백조의 호수>는 설고니와 지규왕자가 오데트와 지그프리트처럼 행복한 인연을 맺는 것으로 막을 내리는데, 그 사이에 노두발수와 지규왕자 군사들의 전투가 벌어지는 등의 상황이 개입하였다. 고전에 비해서 말하자면 나라 대 나라 간의 전쟁 관계를 설정하고 전투 모습 등을 그려 긴박감을 조성하는 서울시 <백조의 호수>에서는 작품의 현실감을 높이려는 지향점이 읽혀진다. 고전 <백조의 호수>가 서양 중세 시기 의 어느 가상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것과는 다르게, 고대 동북아시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서울시 <백조의 호수>가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설고니와 지규왕자가 인연을 맺는 것으로 막을 내리는 점은 서울시 <백조의 호수>가 고전의 주제 의식을 그대로 수용하였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서울시 <백조의 호수>에서 전투 신이나 거문조 군무진들의 조롱하는 듯한 집단행동 등은 모두 보조 장치에 해당할 것이고, 어디까지나 초점이 모이는 부분은 두 주역의 사랑의 감정이다.
그런데, 남녀 두 주역이 표현해내는 정감어린 정서의 춤이 서울시 <백조의 호수>에서 전반적으로 미흡하고 조연 부분에 해당하는 순간들에 비해 덜 인상적이었다. 이는 고전 <백조의 호수>에서 흔히 느껴진다는 이른바 숭고한 사랑의 감정 면에서 서울시 <백조의 호수>가 미진하였음을 나타낸다. 또한 군무진의 춤사위들이 도약과 회전에 치중하는 것은 일견 작품의 박진감 혹은 긴박감을 위해 있을 법한 설정이라 이해될 수 있겠으나, 한국춤의 원형질을 바탕으로 현대적 무용단을 지향하는 단체에 자연스럽게 기대되는 한국춤의 정중동의 미를 구현하는 부분도 미흡하였다.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는 두 주역의 2인무가 표현하는 사랑의 감정 교환과 백조 군무진들의 매우 정제된 대형 춤 도형을 핵심으로 한다. 서울시 <백조의 호수>가 물론 고전발레는 아니지만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의 주제 의식을 따르는 전제를 충족시키려면 그에 상응하는 나름의 방법을 가져야 한다. 그 방법이 무엇이든지 간에 방법의 결과를 <백조의 호수> 한국춤 버전이라 부를 수 있기 위해서는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의 2인무와 백조 군무가 전달하는 차원의 감정과 미감은 필수적이다.
대본 줄거리에 동북아시아의 옛 설화를 삽입하거나 한국춤을 바탕으로 백조의 호수를 전개하는 것만으로 <백조의 호수>가 살려지는 것은 아니다. 시각적, 청각적 효과를 살리기 위해 무대와 의상에서 여러 장치들을 동원하고 음악에서 국악기와의 조합을 어느 정도 모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시 <백조의 호수>가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에 필적할 장치는 앞서의 감정과 미감에 바탕을 둔 개성적인 춤이라 생각된다.
서울시 <백조의 호수>에서 무용수들의 실연력이나 무대에서의 열의가 전달된 반면에 작품과의 앙상블 정도는 낮았다. <백조의 호수> 원곡과 어우러진 여성 군무 부분을 제외하면 음악과의 일체감이 평이한 점 등에서 집단무 효과도 높지 않았다. 백조와 왕자의 이인무 부분을 비롯하여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의 강점인 감정의 흐름을 짚어가며 춤을 음미해볼 부분이 미흡하였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 고대 동북아시아의 지역성과 시대성 그리고 전투 장면 역시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여겨졌다. 그것이 서울시 <백조의 호수>를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에 비해 현실감과 한국에서의 토착감을 드높일 계기로 될 수 있는 것도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에 필적할 2인무와 집단무의 감정 및 미감이 충족될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서울시무용단은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의 창작무용극 개작 작업을 경험하면서 창작무용극의 향방을 재검토할 기회를 가졌음에 분명하다. 21세기에 창작무용극은 어떠해야 하는가. 특히 2000년대 들어 국공립 단체들의 창작무용극이 최근 4, 5년 사이에 상당히 위축되거나 낙후해지는 경향을 거듭하는 현시점에서 이 물음은 유의미하게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창작무용극이란 이름이 구태의연한 것은 시대 감성과 거리가 있는 듯한 그 어감 때문인가, 아니면 이름이야 어떠하든 낙후한 창작무용극의 실체 때문인가.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를 한국춤 버전으로 재해석 개작하려는 서울시무용단의 이번 작업은 이와 같은 추세를 넘어서려는 문제의식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질 만하다. 이런 차원에서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를 한국 창작무용극으로 개작할 경우 무엇보다도 그 예술적 방법론이 관심의 주대상이어야 한다. 한국 창작무용극이 고전발레에 대해 가질 변별점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시 <백조의 호수>는 한국춤 전문 무용수들이 공연하는 기본적인 차별성 이외에 춤 흐름에서 그러한 변별점들이 제대로 감지되지 않으며 서울시무용단 고유의 예술적 의도나 모색을 선별해낼 단서도 미흡하였다.
물론 고전발레가 과연 창작무용극 버전으로 개작 가능할지 의구심이 제기될 만하다. 이와 같은 의구심은 지금까지 항상 노출되었던 의구심으로서 가치가 없지 않다. 이 의구심을 해소할 해법은, 앞서 누차 언급하였듯이, <백조의 호수>의 주제 의식을 따르는 경우에는 고전발레의 감정과 미감을 창작무용극 버전으로 재해석-재창조해내는 일이라 생각된다. 굳이 창작무용극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았더라도 서울시무용단의 <백조의 호수>에서 보듯이 창작무용극이 당면한 문제는 우선은 안무와 연출을 축으로 해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