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춤과 노래가 함께 있는 것으로는 뮤지컬이 첫째다. 뮤지컬 열풍이 무대를 장악한 지 꽤 된다. 그렇다면 춤과 노래가 공존하는 것을 새삼스레 볼 일도 아니련만, 춤과 노래가 짝을 이루는 작품 ‘킥’에 시선이 기우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우선 킥부터 짧게 풀어보자. 킥, 말하는 맥락에 따라선 남여가 갈라질 적의 그 무엇이 느껴지는 말이겠다. 킥은 차는 쪽이나 차이는 쪽이나 어김없이 가슴 아렸던 그런 순간을 응축한다. 김재덕의 춤 단체 모던 테이블이 공연작 <킥(Kick)>에다 ‘차인 사람들의 러브노트’라 부제를 붙인 것도 헤어진 인연들의 못내 잊히지 않는 눅눅한 심경 때문이리라(3. 16~20. 아르코 소극장).
어디나 있을 법한 킥의 사연을 춤과 노래로 녹여내는 춤 작품으로서 <킥>은 여러 면에서 독특하다. 그런 사연을 소재로 했다 하여 쉽게 대중적이라 일컬을지 모르겠지만, 그 형식이 따라주어야 대중적이게 된다. 모던 테이블이 붙잡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며, 그래도 그런 사연을 춤과 노래가 공존하는 형식으로 풀어내는 것도 일반적인 뮤지컬 그리고 댄시컬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 그래서 독특하다는 것이다.
춤추고 노래하기, 이를 일컬어 김재덕 현상이라 해도 좋다. 판소리의 발림이나 노래에 따라붙는 몸짓을 춤이라 하지 않는다. 김재덕이 노래하며 내지르는 몸짓은 그의 공연 도중에 그 자신이나 다른 출연자들이 하는 춤들과 함께 더욱 춤으로 진행된다. 지난 몇 해 누차 있었듯이, 춤꾼과 안무자로서 거기에다 싱어송 라이터로서 그의 역할을 한꺼번에 담은 김재덕 현상의 공연은 뮤지컬 혹은 댄시컬 어느 일방으로도 분류되기 어려운 요소를 담고 있으며, 이를 자기들은 댄스 콘서트라 부른다.
그간 있은 공연들을 좀 키우고 종합한 이번 공연은 단일 제목과 주제 속에서 춤꾼-연주자를 적극 융합시켰으며, 그래서 김재덕 현상을 구성한 요소들이 한층 강화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소극장 록 콘서트를 연상시키듯 3인조 밴드가 연주하는 흐름을 타고 여섯 춤꾼들은 힘이 강한 톤의 춤을 폭발시켰다. 이전에 모던 테이블이 공연할 경우 출연진의 무대 배경에 밴드를 배치하여 산만했던 데 비해 이번엔 아르코 소극장 객석 쪽에 밴드를 배치하여 춤 관람 시선에 안정감을 주었고 춤의 존재감을 배가하여 댄스 콘서트라 부를 만하였다.
‘소용 없어 내 옆에 없어 지나간 꿈 속에 가시꽃...’ ‘이젠, 이제는 더 이상 과거를 잊자...’처럼 공연에 등장하는 노래들은 모두 자신의 노랫말을 쓴 김재덕의 자작곡이다. 트로, 민요, 합 그리고 판소리 창법을 자유자재로 섞는 김재덕은 싱어송 라이터 (+) 춤꾼으로서 그만의 장기(長技)를 발산하고 있다. 경계 넘기가 다반사인 흐름에서 그래도 김재덕 식의 퍽 드문 장기가 럭비공처럼 대개의 예측을 벗어날 가능성도 얼마든지 상상된다. 그만큼 김재덕에게는 활화산으로 솟구칠 그 무엇이 감춰져 있고 그것이 시선을 붙잡는 키포인트가 아닐까 한다.
싱어송 라이터의 자작곡을 자신의 춤으로 풀어가는 김재덕의 행위는 대필(代筆)이 아닌 자필(自筆)의 성격이 매우 짙다. 물론 안무자가 자신의 춤을 추어내는 행위나 화가의 그림그리기 역시 자필적이겠는데, 김재덕 모던 테이블의 경우는 노래와 음향에까지 자필의 범위를 대폭 확장시켜 나간다. 자필성은 뮤지컬이나 댄시컬에서의 일반적인 대필성 공연에 비해 모던 테이블의 공연을 아예 별개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결정타로 작용한다. <킥>의 소재였음직한 사연들이 김재덕 자신의 실제 편력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도 없고 그다지 확인할 일도 아니지만, 그것들이 무대에서 김재덕 그리고 공연자들의 실제 사연인 것처럼 성큼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공연작 <킥>의 유별난 자필적 특성에서 기인한다. 이처럼 ‘킥’에는 관객에게 바로 밀착해 들어가는 요소들이 내장되어 있고 그런 만큼 휘발성도 크다.
<킥>은 ‘차인 사람들의 러브노트’를 연주곡을 바꿔 이어가는 콘서트의 그것과 유사하게 옴니버스 방식으로 펼쳐 보였다. 자필성의 춤과 노래는 일관된 줄거리에 매이지 않고 차인 사람들의 눅눅한 심경들을 때로는 애잔한 고독감으로 때로는 화끈한 팽만감으로 소통하였다. 이유나 곡절을 알 수 없이 주절주절 내뱉어지는 너스레나 아니리와 장난질들에서도 사실은 차여지는 세대들의 고독감이 짙게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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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킥>에서 즉발성의 느낌이 강한 뻗침 동작들과 역동적인 활개침, 느릿하거나 빠르게 엉켜드는 몸짓들과 함께 트랜스로 진입하는 신들린 목청으로 댄스 콘서트는 소통의 열기를 더한다. 가수 윤석기와 김재덕이 주고받는 노래와 창은 그것이 콘서트에서의 주고받음이 아니라 댄스 콘서트에서의 주고받음이라는 점에서 차원을 달리 한다. 게다가 윤석기의 판소리 창법은 확실히 <킥>의 윤기를 돋우는 바가 있었다.
이처럼 김재덕 현상은 춤을 놀이하는 몸예술로 넓히고 또한 국악 창법 양식을 춤과 병치시켜 몸짓과 소리를 몸 깊숙이에서 우러나오는 매체로 다듬었다. 여기에 횡설수설 너스레나 김재덕의 자기 편력, 심지어 초현실주의 세계에서나 등장할 엽기적인 공상의 이야기가 삽입된다. 반면에 감정 표현에서 춤(꾼)들 간의 관계보다는 주로 몸, 음향, 가사, 목청에 더 의존한 점은 <킥>에서 음악 콘서트와 댄스 콘서트의 변별점을 흐리게 만드는 취약점이다. 그래서 예컨대 춤꾼들의 집단적인 일체 연기에 치중한 구성을 탈피하여, 김재덕의 춤 연기나 반주곡 ‘십리도 못 가서...’를 타고 펼쳐지는 이정인-곽대성의 대무 연기와 같이, 관계에 초점을 둔 춤적 구성이 더 보완될 필요도 있다.
다시 환기하면, 자서전과 자필은 동일하지 않다. 자필은, 특히 김재덕 현상 속에서, 자신의 육신 그리고 육성에까지 걸쳐 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생생한 몸성과 직결된다. 김재덕 현상의 <킥>은 춤예술이 감춘 이 미묘한 위력을 벗겨내었으며 덩달아 우리도 뮤지컬 와중에서라도 그리고 대학로에서 춤을 흥미롭게 짚어볼 순간을 만난 것 같다. (전재: 한팩 뷰, 201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