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한국춤의 동시대성을 추동하는 젊은 춤꾼들(5)
모든 것이 변화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는 시대다. 어지럽게 변화하는 사회, 경제, 정치, 문화적 정세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스피드를 요구받는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이다. 또한 시대가 요구하는 이런 속도감에 피로감을 느끼고, 매일매일의 업무나 잡일에 쫓기며 어느새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람도 수두룩하다. 그러기에 시대가 강요하는 빠른 속도에 반하여 자신만의 시간을 되찾자는 생각, 즉 삶의 템포와 리듬, 일상의 감각을 바꾸어 보자는 생각, 한 번 품을 만한 일이리라. 22 Collective LAB의 대표이자 무트댄스의 이지현의 최근 안무작 〈호모 노마드〉(HOMO NOMAD, 2023년 9월 9~10일,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는 이러한 생각을 실천으로 옮겨 보자고 제안하는 윤리적 의미를 함축한 공연이었다. 그런데 공연에서는 이러한 의미가 내용보다는 형식에서 더 드러난다는 점이 훨씬 흥미로웠다.
이지현 〈호모 노마드〉 ⓒ잔나비와묘한계책 |
환하게 불이 켜진 극장의 무대와 객석 여기저기서 휴대폰을 손에 쥔 춤꾼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객석에서 걸어 나와 무대를 지나 퇴장하거나, 무대 좌우를 가로지르며 무심히 오가던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핸드폰 카메라로 관객들을 찍거나 촬영하고, 또 객석을 배경으로 삼아 셀카를 찍어, 어딘가로 전송하듯이 연신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 저 멀리, ‘시각 저 끝 너머’에서 빛의 속도로 주고받는 이미지에만 몰두하는 모양새이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 거리 등 일상 공간에서 언제나 흔히 볼 수 있는 익숙한 풍경이다. 그들은 각자 따로따로 등장하여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지만, 하는 짓은 다 똑같다. 즉 바로 앞에 관객이 있든 없든 아랑곳하지 않고, 핸드폰 화면만 주시한다.
기실 정보가 무한 속도로 이동하는 시대이고, 현대 정보기술은 지금-여기 우리 눈앞에 없는 것들을 생생한 모습으로 보여준다. 말하자면 원격 현전(tele-presence)이다. 그런데 이렇게 무한 속도에 지배당한 채 무미건조한 일상을 똑같이 되풀이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생동하는 실제를 보는 시각을 상실하고 자기 바로 곁이나 주변에 있는 것에는 무관심하게 산다는 것이다. 요컨대 〈호모 노마드〉의 도입부 장면은 현대의 속도 문명에 의해 실제 세계에 무감각해진 디지털 유목민의 모습을 간략하게 스케치하듯 드러내 보여준다.
이지현 〈호모 노마드〉 ⓒ재쿠 |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반감시키듯, 다음 장면은 아주 느리게 진행된다. 조명이 잠시 꺼졌다가 다시 밝아지면, 무대 오른쪽 뒤에 다섯 명의 춤꾼이 함께 모여 있다. 둘은 눕고, 셋은 손을 들고 선 상태로 뒤엉켜 있는 이들의 모습이 마치 조립된 하나의 집단 신체처럼 보인다. 한 무리를 이룬 몸들은 청량하면서도 밝은 타악기 소리에 맞춰 일제히 몸통을 앞으로 툭툭 내밀었다가 다시 거둬들이고, 머뭇머뭇 망설이며 앞으로 나아가고, 어깨와 상체를 움찔움찔하면서 간헐적으로 튕기는 동작으로 미세하게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운동을 절단하는 분절된 동작들이 인상적인 장면이다. 아마도 지속하는 시간에 틈을 내는 것이리라.
어딘가로 조심스럽게 향하듯 모두 함께 전방과 주위를 주시하면서, 두 팔과 몸통을 느리면서도 신중하게 휘젓던 그들이 잠시 해체했다가 다시 모여 시나브로 나아가면, 무대 전면의 좌우를 가로지르는 가느다란 길 조명 하나가 무대 바닥에 깔리고, 무대 오른쪽 앞에서 등장한 한 명의 춤꾼이 그 길을 따라서 엉금엉금 기어간다. 또 그와 동시에 무대 왼쪽에서도 한 명의 춤꾼이 더 등장하고, 둘이 이동하기를 반복하면 무대 뒤쪽으로도 길 조명이 하나 더 깔린다. 그 길을 따라 기다가 걷고, 일어나 뛰어서 가고, 다시 지친 듯 걸어가다 쓰러지는 둘은 홈이 팬 인생길을 한결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보이고, 두 길 사이에서 신중하게 주변을 살피며 조심조심 움직이는 무리는 무미건조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새롭게 사는 방식을 모색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이지현 〈호모 노마드〉 ⓒ재쿠 |
조명이 꺼졌다가 다시 들어오면, 무대에는 비슷한 의상을 차려입은 춤꾼들이 흩어져 서 있다. 그들은 허리를 옆으로 숙여 무대 바닥을 훑듯이 바라보고, 서서히 몸을 곧추세우며 허공을 올려보다가 빠르게 바로 선다. 또 한 팔을 길게 늘어뜨린 채 허리를 옆으로 깊게 숙였다가 아주 느리게 똑바로 세운 후 두 손으로 허벅지와 몸통을 문지르기도 한다. 다 같이 한 곳을 보면서 똑같은 동작을 이어가던 그들 중에서 다른 동작을 하고 다른 곳으로 뛰쳐나가는 이가 보이고, 각자 보는 방향도 달라지더니, 미친 듯 발작적으로 움직이거나, 비명을 지르는 이도 있다. 하나의 조직화한 질서로부터, 규범화된 체계로부터 불쑥불쑥 비집고 나오는 자들이다. 그러다 다시 함께 모여 무대 이쪽저쪽으로 우르르 몰려다니고, 일사불란한 군무를 펼치다가 무대 중앙에 다시 모여, 비스듬히 드러눕거나, 앉거나 선 채, 미동도 하지 않고 한동안 객석을 응시한다. 아주 느리거나 정지 동작으로 짜진 춤이지만, 그 어느 춤보다도 춤추는 몸의 정동을 실감하게 하는 춤이다.
골똘히 고민하다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타진하면서, 때로는 함께 혹은 각자 어딘가로 향하는 듯한 이들은 성급하게 쫓기지 않으며 조금씩 인생을 다시 생각하고,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속도와 보폭으로 다르게 사는 방식을 찾아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물론 여행에는 즐거운 일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때로는 돌발 사건이 발생하고, 험한 길을 통과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좋다고 생각되는 장소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움직인다. 이를테면 이지현이 염두에 두고 있는 호모 노마드, 곧 유목민은 광야를 이리저리 거리낌 없이 마구 돌아다니는 칭기즈칸의 후예도 아니고, 누구와도 관계를 맺는 마당발 정치인 같은 사람도 아니며, 바쁘게 세계를 돌아다니며 장사에 열을 올리는 자본가도 아닌 듯하다. 요컨대 춤 만든 이가 생각하는 유목민은 제자리에서 너무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삶의 새로운 관계성을 모색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시대의 흐름과 현대 기술문명의 속도에 역행하듯, 과하게 움직이지 않는 채 차분하게 진행되는 춤은 아마도 이러한 호모 노마드의 인생관을 표현하는 것이리라.
이지현 〈호모 노마드〉 ⓒ잔나비와묘한계책 |
그러다 무대 뒤로 뛰어간 한 명의 춤꾼이 굳게 닫힌 문을 열어달라고 애원하듯 두 손으로 격렬하게 허공을 두드리는 동작을 한 후, 춤꾼들이 두 패로 나뉘어 무대 좌우에 일렬로 서면, 그 사이에서 한 명의 춤꾼(이지현)이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처럼 오가다가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되풀이한다. 또 대열을 흐트러뜨리고 흩어진 춤꾼들이 입고 있는 상의 지퍼를 열어 풀어헤치고 무대 여기저기로 다니기도 한다. 아무 배경음악도 없이 마치 경건한 의식을 거행하듯 사뭇 진지하게 오가는 그들 한가운데서 이지현이 솔로 춤을 이어가면 다른 춤꾼들이 모두 퇴장하고, 홀로된 그가 팔을 내뻗으며 허공을 올려다보고, 뭔가를 바라고 구하는 움직임을 지속하면, 째깍째깍 시계의 초침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매우 다급하고 절실한 상황이 임박한 듯 무엇인가를 희구하는 춤이지만, 움직임은 아주 딴판으로 느리고 진중하게 한동안 지속된다. 다른 공연들과 차이가 현격한 속도와 움직임 템포가 다른 질감과 색깔, 느낌과 정서를 만들어내고, 춤 보는 이들에게 이것들을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독특한 몸짓 감각과 아기자기한 구성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노마드의 삶은 언제나 하나의 중심이 있는 전체성에서 벗어나는 탈주선을 그린다. 국가는 전체성의 상징이다. 그리고 노마드는 국가의 외부에서 항상 그들과 투쟁하는 자이다. 국가의 영토적 힘과 노마드의 탈영토적 힘이 맞부딪치는 형국이 펼쳐지는 것이다. 즉 노마드로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에는 격렬한 공격성이 포함되어 있다. 전체성 외부에서, 국가 바깥에서 질서를 따르지 않고 수상한 관계를 만들고 있는 노마드는 바로 들뢰즈가 말하는바 전사 혹은 ‘전쟁기계’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두 명씩 짝을 이뤄 춤추던 중간에 마치 무술 동작처럼 강력한 공격성을 함축한 두 번의 독특한 솔로 춤이 펼쳐진다. 무대 중앙과 무대 왼쪽 앞, 밝고 둥근 조명 빛이 내리쬐는 국지적 공간에서 잇달아 펼쳐지는, 내공이 깊은 무술인의 수려한 품새와 같은 출중한 춤은 노마드로 산다는 것이, 전사로 산다는 것이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라 대단히 전투적인 일임을 암묵적으로 드러낸다.
이지현 〈호모 노마드〉 ⓒ잔나비와묘한계책 |
마지막 장면은 수미상응하는 속도감으로 갈무리된다. 무대 중앙에 큰 원 형상을 만든 채 서서 세차게 춤추던 춤꾼들이 뒹굴거나 기면서 이쪽저쪽으로 휩쓸려 다니고, 일제히 객석 쪽으로 등을 보인 채 무릎을 꿇고 앉아서 차례차례 상의를 벗어 뒤집더니 다시 입는다. 그러다 다시 일어난 그들은 아주아주 느리게 여러 방향으로 걸어간다. 슬로 모션 같은 동작이다. 걷고 또 걷던 그들이 한 팔과 허리를 늘어뜨린 채 몸통을 울렁울렁하다가 다시 일어서 모두 객석을 응시한 채 재차 걷는다. 느리면서도 무심한 걸음걸이이다. 그러다 객석 쪽으로 향하던 그들이 갑자기 몸을 틀어 무대 뒤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가다가 일부는 객석 쪽으로 뒤돌아 뒷걸음질 치고, 다시 모두 함께 뒤로 돌아 걸어간다. 무대 뒤쪽에 다다른 그들이 전신을 굼실굼실하고, 두 손을 허우적거리면서 허공으로 치켜올리면 메인 막이 내려온다.
이지현의 〈호모 노마드〉는 일반적인 다른 공연에 비해 템포와 속도가 훨씬 느린 공연이다. 현대 테크놀로지가 가져온 이동 및 전송의 가속화에 반해, 그는 속도 둔화, 즉 감속에 관심을 보인다. 물론 공연이 시종일관 느리게만 진행된 것은 아니다. 종종 빠르게 진행되기도 했지만, 이내 속도를 늦춘다. 의도된 연출로 보인다.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느린 춤이 속도를 강조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저항하는 몸짓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지현이 생각하는 호모 노마드는 전체성으로부터 급하게 탈주하는 자가 아니라, 또 바쁘게 싸돌아 다니는 자본주의적 인간형이 아니라, 외려 제자리에서 너무 움직이지 않은 채, 속도감 있게 흘러가는 시간에 구멍을 뚫어 텅 빈 시간을 창출함으로써, 지금-여기에서 바로 즉시 삶의 방식을 바꾸고자 하는 자이다. 요컨대 〈호모 노마드〉는 무한 질주하는 속도 문명을 일단 정지시키는 '쉼표'가 되어, 다른 식의 인생을 창조하는 데 요긴한 것은 지나친 운동이나 다방향으로 무한히 뻗어나가는 변화가 아니라, 오히려 과도한 생성변화의 절제임을 역설하는 공연으로 보인다.
최찬열
한국춤과 현대춤, 전통춤과 탈춤을 추었다. 국립모스크바대학에서 인류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소속 민족인류학연구소에서 인류학 박사 과정을 마쳤으며, 다시 미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지금은 몸의 예술과 인문학에 기반한 통섭적 문화연구에 몰두하며, 춤문화연구소에서 미학과 춤 역사를 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