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레드 카펫이 무대를 덮고 있는 그 위에, 중앙에는 반투명의 비닐을 창으로, 가벼운 나무 각목을 뼈대로 만들어진 사람 키를 훌쩍 넘기는 정육면체에 가까운 구조물이 떡 하니 놓여 공간(비주얼 아트디렉터 옥수진)을 압도한다. 그리고 무대 양옆에는 무대 중앙을 바라보게 놓여 있는 각 60여개의 객석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원래 객석자리는 중앙 블록만을 관객에게 오픈하여 객석의 관객은 무대 위의 공연 공간과 간이의자가 놓여진 객석 모두를 프로시니엄안에 넣고 볼 수 있게 되어있다.
관객이 입장하는 시간에 출연자 한 명은 이미 나와 걷거나 이런저런 몸 푸는 동작을 하는 듯 하면서 자연스럽게 작품으로 진입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아직은 어렴풋해 보이는 무대의 하수에는 높은 단을 세워 흰색 재봉틀인 보이는 물체가 놓여 있고, 거기에 누군가 앉아 익숙한 미싱의 소리가 낼 때에야 그것이 미싱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이미 그때 롱코트에 가방을 어깨에 맨 출연자(연출/출연 강요찬)는 시작 벨인 듯한 소리와 함께 그 비닐의 방으로 들어간다.
강요찬 〈구조와 의식〉 ⓒ2023 SPAF/옥상훈 |
〈구조와 의식〉(10, 19. 아르코 대극장)은 프로그램북 상의 구분에 의하면 컨셉 퍼포먼스에 강도가 5점으로 높고, 댄스가 4점으로 그 다음이다. 그 외에는 연극이 2점, 다원이 2점인 것으로 보아, 퍼포먼스가 주를 이루는 작품(기획/드라마터그 이창준)임을 알 수 있다. 그에 걸맞게 무대의 상황은 퍼포머들이 춤을 추러 나올 때와는 다른 태도와 분위기-마치 즉흥을 할 때처럼, 모든 감각을 세우고 있는 야수성-로 감각화되어 있고, 미싱 한대로 무대를 현실로 도발하여 이곳이 매우 초조하고, 진행형이고, 무슨 일이 곧 일어날 곳임을 생성해 간다.
이런 장치는 나머지 여자 출연자 2명이 객석에서 무대로 진입하는 방식이라든지, 그런 모든 행위의 발생을 가리지 않고 노출시키거나 조명(김재억)이 무대 위의 환상을 만들 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여 노출과 은폐의 프로시니엄 공식을 깨나간다. 또하나 시선을 끄는 것은 의상(디자이너 황석민)이다. 출연자 각각의 의상은 흰색이 주를 이루는 톤으로 통일성은 있으되 각 개인의 개성이 뚜렷이 보일 만큼 과감하게 변주한다. 평범한 복장에서 등의 하단이라든지, 바지의 옆 단 등을 과감하게 날린 의상은 통일성과 파격이 절묘한만큼 퍼포머를 개성적으로 보이게 하는 장치로 승격된다.
강요찬 〈구조와 의식〉 ⓒ2023 SPAF/옥상훈 |
작품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정교하게 준비되고 짜여진 퍼포먼스를 위한 물질적 또는 분위기 형성의 장치들을 보면 이 작품 창작진의 구조에 대한 고민의 깊이를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장치들의 힘은 ‘무대 위 객석’이었다면 아마 더 강하게 느낄 수 있었을 듯싶다. 난 배정된 원래의 객석에서 무대 위 객석으로 올라가고 싶은 욕구 때문에 잠시 갈등을 했지만, 보다 전체를 바라보기로 하고 그대로 눌러앉았다. 그리고 그 결정은 이 공연의 현장성을 느끼기엔 별로 좋은 결정은 아니었던 거 같다.
이 퍼포먼스를 시종일관 끌고 나가는 롱코트의 출연자는 가방에서 여러 연장을 꺼내 결국 중앙의 그 구조물과 결투를 벌인다. 아니 구조물은 그에 의해 해체 당한다. 그의 역할이 굳건하게 정해져 있는 바람에 이 퍼포먼스의 구조는 의외로 단순하다. 가시적인 구조물, 그것을 해체하는 주인공의 대립이 중심 뼈대이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상황을 위한 미싱과 구조 안에 갇힌 인간과 탈출을 시도하는 인간을 대변하는 나머지 출연자는 여러 형태로 “시각화된 오브제”와 표현(이 작품에서 출연자는 ‘표현자’로 명명된다)을 담당한다.
강요찬 〈구조와 의식〉 ⓒ2023 SPAF/옥상훈 |
〈구조와 의식〉이라는 제목에서 구조는 인간들이 속한 “사회적 구조”이고 “구조 안의 존재가 온전히 자유로워지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그럼에도 “최초의 의식과 탈출, 새로운 시도로 남겨진 결과들은 본래의 의도와 무관하기에 무의미한 것일까?” “자유를 향한 시도와 그 실패의 끝자락에 남아 있는 건 언제나 삶의 허무일 뿐인가?”로 강하게 반문하는 힘이 이 작품을 관통하는 일관된 원천이다.
이 작품은 처음에 불길한 징조로 만들어 낸 미지의 분위기가 일품이었다.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관객은 일상에서 퍼포먼스로 이행이 매우 자연스럽고 몰입도도 높았다. 무대 위의 평범치 않은 배치(객석 및 미싱, 구조물)가 관습을 흔들면서 비워진 그 자리에 상상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관찰자 혹은 주재자의 시선을 상징하는 미싱의 위치와 사운드는 구조 속에 갇힌 인간에겐 보편적인 불안과 긴장감을 흔들어 깨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것에 비하면 표현자들(정지욱, 양지수, 진솔, 성혜경, 정은영)의 행위는 훈련된 몸과 좋은 비주얼을 갖췄음에도, 비닐 창을 뚫거나 엉킹 실에 거미줄처럼 포획되는 시각적 행위가 있었음에도 공연의 긴장도를 유지하는데는 그리 기여하지 못했다. 상당히 날 것의 해체행위가 강렬했고, 그와 표현자들의 관계 설정을 드러내는 다른 행위과 모먼트 혹은 사건이 부재해서였을 수 있다.
강요찬 〈구조와 의식〉 ⓒ2023 SPAF/옥상훈 |
현재를 살고 있는 인간에게 당신은 갇혀있고, 갇혀있기에 답답한 거고, 그러니 구조를 인식하고 거기서 탈출해야 하지 않겠냐는 강한 문제의식과 구원의 의지, 그리고 그것의 결말에 대한 허무의 그림자는 충분히 동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누군가 나타나 그것이 해체해 버릴 수 있는 구조 임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 역시 영웅의 출연과도 같은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해체의 절정에서 구조물의 뚜껑이 덜렁덜렁 매달려 진자 운동을 하는 미장센의 강렬함도 컨셉 퍼포먼스의 날 것이 물릴 때쯤 적절하게 환기가 되는 미적 충족감을 주었다.
그럼에도 구조 대 의식, 가두는 것 대 갇힌 것, 가두는 것 대 해체하는 자, 갇힌 인간의 비극 대 탈출에의 욕구 등 모든 것이 또렷하게 이분법으로 나눠져 있는 그 구조와 그 사이를 메우는 구조적 장치의 부족은 관객에게 전개와 결말을 쉽게 예측하게 한 것은 아닌가 싶다. 사실 대단한 신화도 알고 보면 뻔한 스토리일 경우가 많지만, 신화가 힘을 갖는 것은 그 안에 인간의 복잡한 심리가 섬세하게 혹은 전형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에 봐도 봐도 교훈을 발견하고, 울궈도 울궈도 사골의 맛이 옅어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세상을 둘로 나눌 수 있다는 건 허구라고 한다. 요즈음은 복잡성 이론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 컨셉은 좀 더 정교하고 현실적일 필요가 있었고 퍼포먼스는 더 예측불허와 전략적 각본이 준비되어 빡빡한 구조로 관객과 정교하게 대화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어디 보통의 인간들인가 구조 안에 갇혀서도 그것을 견디며 멀쩡하게 살고 또 그것을 해체하는 놀이도 적잖이 해온 역사를 가진 징한 ‘인류’ 아닌가. 모든 예술이 그렇듯, 예술의 현장에서는 관객의 감각과 심리와의 팽팽한 밀당 게임이다. 퍼포먼스 성향이 강한 작품은 더욱 그것을 요구한다.
1999년 춤전문지의 공모를 통해 등단했다. 2011년 춤비평가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비평집 『춤에 대하여 Ⅰ, Ⅱ』를 출간했다. 현장 춤비평가로서 왕성한 비평작업과 함께 한예종 무용원 강사를 역임하고, 현재 아르코극장 운영위원과 국립현대무용단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