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즈음 퀴어는 성소수자 현상 일반을 지칭하는 뜻으로 확장되고 있다. 국내 춤계에서는 퀴어의 시각이, 필자가 알기로는, 흔치 않다. 때문에 아직은 퀴어 용어 자체가 생소할 것으로 관측된다. 성소수자라는 말 자체가 전체 사회 속의 소수자를 나타내므로 어쩌면 춤 무대에서 퀴어 시각이 잘 표출되지 않는 것 또한 자연스런 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거꾸로 춤을 비롯 예술에서 기존 관념을 흔들거나 뛰어넘는 속성이 기본이라는 점을 상기해 보자면, 그런 자연스러운 일 속에 이런저런 제한점이 뭉용인들에게서 내면화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봐야 하겠다.
박호빈이 안무자로서 렉쳐 퍼포먼스 스타일로 진행한 〈돌연,〉(5월 27~28일, 대학로극장 쿼드)은 성정체성의 주제를 정면으로 일테면 돌직구로 접근하는 점에서 돌발적이다. 알 사람은 알 테지만, 박호빈은 2000년대 중반 이후 〈꼬리를 문 물고기〉 〈엘레베이터 살인 사건〉 등 몇몇 작품에서 성정체성을 다루었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25년 전의 1998년작 〈녹색 전갈의 비밀〉은 이미 그 같은 작업의 예고작에 해당한다. 암컷 전갈이 수컷 전갈을 삼키는 행태를 2인무로 정교하면서도 예리하게 묘파한 이 〈녹색 전갈...〉은 그해 최고 수작으로 꼽힌 것은 물론 인간의 성정체성을 국내에서 은유한 (그때나 지금이나) 드문 작업으로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 있다. 박호빈 자신의 작업 경향 내에서 보자면 〈돌연,〉은 우발적이지도 돌발적이지도 않다.
〈돌연,〉이 열린 대학로극장 쿼드는 서랍식 객석을 갖춘 블랙큐브 구조로 이뤄져 있다. 여기서 안무자는 객석을 양쪽 벽면으로 나눠 서로 마주 보도록 하였다. 또 각 객석 앞에는 아주 엷고 투명한 주렴이 천장에서부터 길게 아래로 드리워지도록 해서 어떤 효과를 염두에 둔 듯하였다. 여기서 관객은 바닥 무대에서 일어나는 일을 세밀하게 바라보되 어느 점에서는 약간의 차단도 가해진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무대 양쪽 끝에는 기다란 스크린이 설치되어 강렬한 이미지 효과를 발산하곤 하였다.
박호빈 〈돌연,〉 ⓒ서울문화재단/BAKi |
무대에서는 성정체성에 관해 관객들에게 멘트로 물음을 던지는 3가지 심리테스트가 〈돌연,〉 공연의 주내용으로 진행된다. 첫 테스트는 생물학적 젠더 구분을 따르는 성역할(과 고정관념)이 와해되는 모습을 두 남녀의 행동거지로 드러낸다. 두 번째 테스트는 남녀의 성별이 남녀 각각의 뇌구조에 근거를 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두 남녀는 서로 간에 별로 다르지도 않은 움직임들로써 정서를 교환하며 어울리는 모습으로 가시화한다. 세 번째 테스트는 남자는 여장을, 여자는 남장을 하고 싶은 충동이나 경험이 없지 않았는지 관객에게 묻기 시작하면서 당신은 당신의 성이 편안한가, 당신이 실제로 좋아하여 취하고 싶은 젠더는 무엇인가, 마침내 당신의 성정체성은 무엇인가 등속의 질문을 제기하며 시작된다. 3가지 테스트는 전체적으로 성정체성에 관한 일반 관객의 고정관념을 의문시하고 반성을 유도하는 데 방점이 찍혔다.
3가지 테스트 과정 후에 관객이 객석을 나와 바닥의 무대로 나오도록 청하는 멘트에 따라 관객은 바닥 무대에서 출연진들과 뒤섞이게 된다. 이 부분에서 출연자들은 마이크를 통해 이런 질문부터 제시한다. 안드로진(양성구유자, 자웅동체자)에게 가장 편한 화장실은 어디일까? 그들에게 적합하다고 여겨질지 모를 성중립 화장실 역시 또 하나의 아우팅이자 낙인찍기 도구가 되지는 않을까? 그리하여 성소수자가 외출을 자제하고 결국 숨어버려야 하는 현실이 강조된다. 이어 관객이 착석하면 어느 나라에서 20살의 여자 안드로진이 12살 적에 종교단체에서 겪은 푸닥거리가 멘트와 몸짓 이미지로 소개된다. 해당 종교에서는 이 푸닥거리를 동성애자들을 정상인으로 전환시키는 해방 의식으로 내세우며 마약중독자, 알콜중독자들에게도 똑 같은 의식이 행해졌다고 고백하였다.
박호빈 〈돌연,〉 ⓒ서울문화재단/BAKi |
공연 도입부에서나 각 심리테스트, 관객 참여 등 구분되는 지점마다 대여섯 명이 주로 스트릿댄스와 힙합 풍의 움직임으로 춤을 쏟아내는 부분이 삽입되었다. 처음에 어느 여성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어 그렇게 춘 부분은 공연 마지막에 소개된 종교 단체의 푸닥거리 의식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며 다른 부분들에서 그들의 춤은 관객들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도록 하는 각성제로 구사된 듯하다. 여기에다 공연 내내 동원된 테이블에는 대개 앞서의 그 여성이 올려지는데, 테이블은 해부대 아니면 처치대 같은 설비로 다가온다. 말하자면 테이블은 관객들이 인간의 성정체성을 감정적으로 대하는 선에서 훨씬 더 나아가 그 현상과 그런 현상을 억압하거나 간과하는 현실을 상당히 냉정하게 돌아볼 것을 의도하는 장치로 보였다.
박호빈 〈돌연,〉 ⓒ서울문화재단/BAKi |
스트릿 군무진을 제하면 전체 공연은 박호빈 등 3인에 의해 전개된다. 두 남자와 한 여자는 때로는 온몸을 얼굴까지 엷은 천을 붕대처럼 감싸고 또 박호빈은 여성의 성징(性徵)을 천으로 부착하거나 착용하여 젠더 구분을 초월하였다. 박호빈다운 발상의 소산이다. 세 번째 테스트에서 남성 출연자가 007가방에서 여성 속옷이나 스타킹 등속을 입어보고 흩날리며, 박호빈이 양성구유자로 분장한 차림새로 그를 인도하고 축복한다. 점차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해들어가는 그의 독무는 〈돌연,〉의 압권으로서 깊은 여운을 남겼다.
박호빈 〈돌연,〉 ⓒ서울문화재단/BAKi |
〈돌연,〉에서 객석을 양분하여 고정된 젠더 구분 관념을 들추고 제시해보려 한 부분이나 중간에 관객이 일어나 출연진들과 뒤섞이도록 한 부분, 그리고 관객 자신의 성정체성을 돌아보고 객석을 다시 임의로 찾아보도록 한 부분, 관객에게 2개의 알사탕을 미리 제공하고 그 선택에 따라 성정체성을 생각해보게 되는 과정이 멘트로 예고되었어도 실현되지 않은 부분들은 그 소기의 연출 의도들이 완전히 달성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였다. 이로 인해서인지 〈돌연,〉은 렉쳐 퍼포먼스로서 진행되었으되 전반적으로 소통보다는 전달에 치중한 감을 주었다.
박호빈 〈돌연,〉 ⓒ서울문화재단/BAKi |
수천년 인류사에서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의해 억눌려지고 왜곡되었던 것으로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진단되기 시작한, 단적으로 말해 인간 본연의 모습을 원형질로 여기는 사고방식은 우리 주변에서도 점진적으로 확산되는 중이다. 이보다 더 일찌감치 박호빈은 양성구유자를 주목하는 여러 작업을 진행해왔고 이번에는 선명한 메시지로써 일반인들을 향해 훨씬 가까이 다가갔다. 성정체성에 관해 기존 관념에 머무는 것은 넓게 보면 기득권을 용인하거나 그에 안주하는 한계를 안기 마련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퀴어 시각이 드문 국내 춤계에서 이번 공연은 상당히 돌발적이다. 〈돌연,〉은 성정체성뿐 아니라 순응을 스스로 내면화하고 또 그것을 자연스럽다고 합리화하는 풍토 속에서 도발하고 도전하는 메시지로써 자기 색깔을 명료하게 내보였던 것이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